나의 여행기/중국 서안, 화산

'7월 - 나의 서안 여행 '

수행화 2018. 8. 14. 11:27


서안 >



서안 (西安,西京)은 중국 산시성의 성도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지리적으로 북의 북경, 남의 남경, 그리고 낙양을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이라하여 서안( 일명 서경) 으로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고대에는 장안 (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 도시,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당나라의 수도였던 도시, 일찌기 서양문물을 받아 들였던 도시라 문화와 역사의 내력이 깊을 것같아 언젠가 한번 가보려고 내 마음에 '위시리스트'로 담겨 있던 도시였는데, 갑자기 여행 기회가 와 급히 가방을 싸게 되었다. ( 7.21~7.25 )


로마·아테네·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 꼽혔다는 시안을 마음에 그렸으나, 내가 주마간산으로 바라 본 시안은 서구화된 퍽 현대적 도시의 모습이었다.

시안은 1992년 7월에 개방도시로 지정되어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완성을 통하여, 중국 서부 최대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안 국제 공항>


오전 9시 15분 출발, 11시 30 분경에 시안 공항에 도착했고, 1시간 시차가 있으니까 3시간 남짓 비행한
모양이다. 
공항 건물을 빠져 나오니 7월 정오의 태양이 광장에 가득하다.
어딜 가나 끝없이 마주치던 한국 여행객들이 거의 보이지 않아 여름 서안은 바야흐로 여행비수기 지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근사한 인천 공항 제2청사를 방금 떠나 온지라 이 공항이 은근 수수하다고 여겼는데 그래도 세계적 관광 도시로서 70개 도시에 129 노선의 비행기가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실크로드 출발지'라는 곳에서부터 여행 일정이 시작됐다.
그 옛날 
대상(隊商)들이 낙타에 비단을 싣고 로마까지 간 길인 실크로드의 깃점이라니 기대가 아주 없을 수는 없다. 동서양 문물의 교류가 활발했고, 불교를 비롯한 종교가 이길을 따라 흘러 들어 왔다고 알고 있는데 실망스럽게도, 작은 공원 한 부분에 조각상을 설치해 둔 것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고대의 동서 문화 교류의 루트였다는 세계사적 의미가 크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14)되었다고 한다.




<섬서성 역사 박물관>

 

1991년에 개관하여 문을 열었으며, 주변에서 출토된 선사시대로 부터 주, 진 , 한, 수나라 시대의 유물을
다량 전시하고 있다고 하여 기대하고 들어섰더니
입장하는 현지인, 학생들의 줄이 어마어마하다.

중국의 엄청난 줄서기 인파는 상상초월이라는 것,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산시성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 38만 점이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전시유물의 상태는 대부분 깨끗해서 육안으로 고대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관람객 사이로 팔을 뻗어 사진 몇장 찍었으니 내 눈 대신 카메라만 건성 관람한 모양새가 되었다. 



전시물들은 빼곡하고, 통로를 메운 관람객, 특히 무리지어 다니는 학생들로 한 걸음 진전이 어렵다. 웬만하면 도중에 잘 관두지 않는 나는 실내의 악취를 견디지 못해 2층까지만 관람하고 나오고 말았다. 박물관 관람을 했다고 말하기도 뭣하다. 역사 탐구가 내 여행 목적이 아니라고 편하게 맘 먹는다. 




<회족 거리>





회족은 중국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을 하던 이슬람계 무역상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는데 모르겠고, 지금 이곳  회족거리는 먹거리 골목이다. 남대문 시장의 확장판 같다.





무덥고 무거운 공기, 비릿한 음식 냄새에 구미가 동하기는 커녕 어서 거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유감이었다. 양꼬치도, 엿가락도 다 싫고, 쾌적한 커피숍에 아이스커피 생각만 가득하면서 빠져 나오기 바빴다. 사진 한 장 찍는 사이에 일행과 헤어지는 촌극까지 벌어진, 난장 그자체이다. 



  

머리에 두건을 둘러 이슬람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도 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을 것 같은 왁짜한 거리인데 멋진 물건은 못 봤고, 만든 음식이 변질되지 않나 걱정하며 지나쳤다. 





다양한 먹거리와 쇼핑을 위한 거리라 관광 코스에 포함된 모양이나 우리 취향은 아닌 것으로, 찜통 더위에 조리하는 가게가 뿜어내는 열기에, 소음까지 더해 인내심은 바로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 





시장을 빠져 나와 광장 쪽에서 중국풍 물씬한 건물이 눈에 크게 띈다. 북경에서 본 엄청나게 넓은 식당을 떠올려 주는 건물로 식당이요 호텔인 것같았다. 내부는 모르겠으나 도시에 어울리게 깔끔하고 괜찮아 보인다.



<종루 광장>


 



종루 광장이 있는 이 곳이 서안의 중심부로 아름다운 거리인가 한다.

종루는 자태가 반듯하고 늠름하여 보기 좋았고, 무엇보다 회족거리를 나와 툭 트인 광장을 만났다는 게 더 반가웠지 싶다. 당나라 시절에는 아침에 이 곳에서 종을 쳐서 일반인들이 통행을 시작했고, 성밖으로 일들을 나갔으며 밤이 되면 북을 쳐서 성 안으로 들어 오게 했다고 하니 당시에는 통행에 제한이 많았던 모양이다. 

높이 38m, 한 쪽 변의 길이가 35.5m, 건축 면적이 35.5 ㎡ 라고 하고, 종루의 예술적인 가치나 규모가 중국에서 최고의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에서는 거슬리도록 많은 커피숍이 여기는 드물었는데, 멋진 스타벅스 건물이 눈에 들어 오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위와 인파를 피해 무조건 들어 간 우리에게 쾌적하고 시원한 테이블이 물론 기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할머니의 힘으로 못할 일은 없어 곧 자리를 만들었다. 에어컨 그늘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일상이 실은 소중했다는 걸 여기 와서 새삼 깨우친다. 여행이 주는 교훈 하나!





광장을 4등분하는 한 쪽은 백화점 건물이다. 야경을 보기까지 시간을 보내려고 백화점에 들어갔더니 휴게나 편의 시설은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쇼핑이 아쉽지도 않으니 되짚어 나오고 말았다. 





어둠이 내리고 건물이 조명 옷을 입으니 아름다운 딴 인물이 된다.
공기가 서늘한 계절이라면 차 한잔 마시며 배회해도 좋겠다 싶게 예쁜 공간으로 변해간다.







목조 건물인 종루 내부에는 당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청동의 종이 있다고 한다. 빤히 바라만 보고 다가가 보지 못했다. 이 무슨 게으른 여행이란 말인가!  





낮에 보았던 호텔 건물은 종루 광장 야경의 한 부분을 맡아 톡톡하게 역할을 한다.
등불이란 유정(有情)한 것. 우리 마음에 어느듯 옮겨 와 따스한 불 하나를 밝히며 곤두 선 신경을 다독여 준다.


 

 


종루와 마주 보는 쌍둥이같은 건물은 고루(鼓樓)라고 한다.
종루가 종을 쳐서 통행을 알리면 고루는 북을 쳐서 성문이 닫히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영화 셋트장처럼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게 서 있다. 



 광장으로 연결된 길은 어느듯 사람들 발길이 분주해 보인다. 명소는 명소인가보다.  



고루(鼓樓)의 아름다운 모습. 1380년, 종루보다 4년 먼저 축조된 누각이라고 하는데 밤에 보아서인지 보존 상태가 너무 좋아 보이고 조명발에 더 멋져 보인다. 월하 미인이 이런 것이다. 약 34m 높이로 종루보다 조금 낮은데, 계단을 오르면 내부에는 다양한 북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고 하고, 고루를 애워 싼 24개의 북도 있다고 한다. 됐고.
밤잠은 몽땅 설치고 새벽에 집을 나서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실은 피로를 초인적으로 밀치고 다녔던 것.
하루를 접게 했다는 고루 앞에서 우리의 긴 하루 여정도 접었다. 




< 화산 (華山) >



산이름에 악(岳)이 들어가면 대개 험준한 산이다.
화산은  중국의 오악(五岳) 중 하나이고 5대 명산 중 하나라고 한다..

화산은 동봉, 서봉, 남봉, 북봉, 중봉으로 5개의 큰 봉우리와 소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고, 
우리가 오를 서봉은 해발 2,086m라고 하니 엄청나게 높은 것이다.





화산 여행의 중심, 센터라 해야겠다. 이 곳에서 매표를 하고 케이블 카를 타러 가야 한다. 
한국에서 안 오르는 산을 여행오면 늘 오르다니......




 

티켓을 사는 줄이 아니라 티켓 사기 위해 건물에 들어 가는 줄이라는 것이 웃기는 광경이다. 줄서기 봉이 고정으로 촘촘하게 설치돼 있는 모양에 아주 질린다. 고정봉을 보니 늘 한 없이 줄을 서는 모양이다.
버스에서 샌드위치로 아침 때워가며 일찍 서둘렀지만 햇살은 대륙의 더운 맛을 보여준다. 뙤약볕은 차라리 애교볕이다 싶게 노골적으로 땡볕 세례를 퍼부으니 우리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내리꽂히는 햇살은 주체가 안되고, 이 장사진의 줄서기는 일상인듯 해서 산에 오르기도 전에 걱정이 앞서는데 광장에서 만나기로 한 가이드는 나타나지 않아, 기다리다 못해 결국 이 줄서기 대열을 따라 뱅글뱅글 돌고 돌아 실내로 들어갔다. 가이드를 찾겠다고 방송을 하려 했고, 늦게 나타난 가이드는 난감해 했으니,
웃긴 에피소드가 1,2,3,4........의 한 꼭지,


 



우리는 서봉투어 옵션(150불)으로 퍽 많은 돈을 지불해가며, 화산의 대표 봉우리라는 서봉을 올랐다.
 중국의 산들은 이렇게 인공적으로 계단을 만들며 시멘트를 퍼부었고, 복사열이 장난이 아니다. 



 


첫번째 계단을 오르며 벌써 힘에 부쳐 올라 온 길을 뒤돌아 보니 입구가 웅장했었다. 멋은 없지만.
그런데 이것은 시작이고, 계단을 오르면 또 다음 계단이 있고........몇 백개의 계단을 정수리에 해를 인 채로
오르기에는 애초에 무리인 코스였는데.......모든 용기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는 깨달음 또 하나!  

무리 없이 편하게 케이블 카 타고 노닐줄 알았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던가!

70 넘은 할머니 그룹, 우리를 만난 현지가이드가 아연실색했다는 말이 엄살이 아니었으니..... 
죽을 힘을 다해 올랐고, 에피소드들은 쌓여갔다. 회상은 늘 즐겁다는 건 철칙! 



 


오른다고 당장 케이블카를 태우지는 않는다. 케이블 카를 타기 위해 또 줄을 서야 한다. 역시 줄서기 봉이 설치돼 있고 (그래도 지붕은 있다) 줄을 따라 또 어지럽게 돌고 돌아야 했으니....기다리는 것이 일상인지 광고판 같은 것이 설치돼 있고 영상이 하염 없이 지나간다. 

장님이 산 오르듯 서봉을 보면서 동서남북 봉의 방향도 모른 채 계단 오르기에만 골몰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등산을 못하는 나는 봉 이름을 몰라도 좋고 명산을 오르게 해 주는 케이블카에 오직 감사할 따름이었다. 





화산은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바위산을 병풍 삼아 두르고 있다.
근육질의 산세는 햇살 받은 반사경처럼 빛나고 아름답다.

가파르게 운행하는 케이블 카가 휘청, 덜컹할 때마다 비명이요, 신음이 절로 나온다.

2013년에 개통하였다고 하는데 대역사를 이룬 것같다.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소봉들의 면면이 다 수려하다. 무섭긴해도 이런 신선놀음이 다시 없다. 서릿발같이 차거워 보이는 매끄러운 산줄기에 식물들이 혈관처럼 뻗어 있다. 산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그림을 완성한다. 



 

 

눈으로, 머리로 챙겨 담고 싶어 나름 집중했으나 20분의 탑승시간은 찰라처럼 짧고도 짧게만 느껴졌다.

 




산은 인간에게 한 어깨를 관통하라 허락한다. 이 절벽산을 뚫고 케이블카를 들여 보낼 생각을 하다니....



 


절벽 앞에서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 바람에 더 가까이 사진을 찍지 못했다.
절벽을 부수듯 정면 돌파하는 묘기의 순간이다. 소름에다 비명에다......

  



케이블 카 서봉 종착지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정상이 있고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모양인데, 
40˚c 가 넘는 한낮에 산을 오를 의욕은 우리에게 없다.
패스트푸드점을 들어가려니 자리는 없고, 음식을 싸 가지고 와서 먹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여기 오른 것만도 장한 일이라 여기고 바로 되짚어 케이블 카를 타고 내려 오고 말았다.  

 


< 와룡사 >.


 




섬서성 최초의 불교사원이라고 한다.
불교가 전파된 이후 수나라때 복용선원, 당나라때 관음사로 불리다가 송나라에 이르러 지금의 와룡사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고도 오래된 고찰인가 한다.
 늘 느끼지만 
우리나라의 고찰처럼 아름다운 자태는 보기 드물다.
건물 외양이나 일본식의 향 공양대 등으로 보아 시류에 맞춰 퍽 변한 것같기는 하다.

빗자루질 하던 스님은 법당 바닥을 신발로 밟았다고 우악스런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쫒아내고 문을 꽝 닫아 버린다. 시멘트 바닥을 신발 신고 들어간 가이드를 따라 들어간 우리에게, 불전함에 보시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수행이 안된 스님이 불교를 욕되게 한다. 



 


자비라고는 없어 보이는 절을 나오면서 아쉬워서 절 앞의 동네 사진만 애궂게 한장 찍어 본다.



 

<서문원 거리>

 


명, 청 시대의 모습을 잘 간직한 거리로서 서안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골동품과 문방사우, 서화, 갖은 도장 등 100여종의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양쪽으로 즐비한 거리이다.
우리의 인사동 거리 느낌으로, 좀 더 옛스럽다고나 할까~~~.

 




'비림 박물관' 정문을 들어섰고, 문묘라는 문도 보았지만 거기까지 가보지 못했다. 
긴 길을 걸어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피로가 게으름의 원인이다.



 

옛 서화, 골동품 등에 취미가 많은 이에게는 흥미로운 거리임에 분명하다. 대개의 관광객들은 이 거리에서 도장들을 새긴다고 하는데, 도장이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세상에 우리는 이미 들어섰다.

 



서문원 거리 입구에는 맹자, 공자, 주자의 동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학문을 사랑해서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학자들은 마땅히 칭송 받아야 할 일이다.  학문을 사랑하지만 지금 우리는 시원한 물 한 잔이 아쉬웠다.


마침 입구쪽에 노천 찻집을 발견하고 자리를 잡으니 아뿔사! 에어컨은 언감생심이고, 뜨거운 차만 팔고 있다.

뜨거운 녹차를 내리 마시면서 땀 닦고 부채질해가면서, 여기 와서 팥빙수 가게 내면 잘 되겠다는 실 없는 소리만 해댔다. 우리에게는 그게 실로 관광보다 더 관광이다.


 

 


다리가 겹겹이 걸린 거리를 자주 지났고, 가로수가 많이 보인다. 홰화나무 수종이라고 하는데, 열에 강하고 뿌리가 깊은 모양이고 무엇보다 가볍게 일렁이며 그늘을 내주어 도시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곳은 차도를 양분하여 가운데 가로수가 있는 곳도 많고 나름 시원하게 지내게 설계된 듯하다.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거리를 담아 보며 해본 생각이다.

 



<섬서 시립 미술관> 




미술관 건물이 로마 원형 경기장을 닮아 조금 생소하나 깔끔했다.



 



그림이 많이 전시돼 있고, 옥 공에품도 보기 좋게 전시해 두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부채 그림이 예뻐 사진을 찍으면서 비슷한 그림의 기념품이 있나  찾아 보았으나 없었다. 별로 건진 건 없으나 이른 아침이라 사람에 치이지 않아 그 무엇보다 쾌적했다.




 <화청지>

 


이 곳은 서안에서 25km 떨어진 여산이라는 지역으로, 아름다운 경관에 지하온천수까지 있어 역대 왕들의 휴양지였다고 하고, 특히 이곳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전설적인 사랑 얘기가 담긴 곳이라 관심이 남 다른듯 했다. 
당 현종이 지은 누각이 화려하여 화청궁이라 이른다고 한다.


 



화청궁 앞은 무리 지은 관광객들로 이미 왁짜하다.

 




화청지 입구에는 당 태종의 멋진 풍모와 양귀비의 매력을 강조한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어 눈길이 먼저 간다.
양귀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라 하겠다.



 


누각이나 건축물이 나지막한 산을 거슬리지 않고 소담하여 거부감은 없다. 저녁에는 이 산과 건물이 바로
연극 장한가의 무대로 쓰인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도 가끔 쉬어 갈 정도로 휴양지로서 조건이 좋은 모양이다.



  


숲그늘이 심오하고 안온한 우리 궁궐에 비하면 이 곳은 그저 밋밋하게 주르르 펼쳐진 모양새라 근사한 곳이라고 할 일은 아니다. 우리 고궁의 여름 뜰과 화청궁의 멋을 대비해 보면서 느낀 가르침 또 하나,
우리는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은 늘 외눈으로 보아 넘긴다는 것.
중국 중원의 햇빛에 방비 없이 노출된 채로, 인파를 뜷고 걸으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던 것은 잠시 눈요기로나마 화청지를 보았다는 허영심의 충족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목욕을 마친 양귀비의 조각상 앞도 성지순례지인듯 인산인해이다. 

양귀비 상이 비너스상을 닮아 실감은 조금 떨어진다.
양귀비는 둥근 얼굴에 풍만한 몸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에는 다산과 풍요가 미의 기준이라 몸집이 있는 사람을 미인으로 여겼다고 하고, 목욕을 마친 양귀비는 양쪽에서 부축하고 움직일 정도로 비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하지만 양귀비는 미인의 상징이요 대명사이니 지금 아름다움이 우선일테다.





정문 앞의 이 공간이 잠시 한가해진 틈을 타 양귀비와 현종의 조각과 바닥의 그림을 동시에 사진에 담아 보며 즐거워했다. 순발력 있게 사진 찍느라 녹차이이스크림을 건네 받긴 한 것같고 먹진 못했다.




<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많은 여행객이 서안을 찾는 첫째 이유는 병마용을 보기 위함일 것이다. 진시황에 관한 전설같은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곳, 설화가 아니어서 세계 불가사의의 한 장이 된 이곳을 말이다. 

이 갱은 진시황릉과 함께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1979년 개장 이후 세계 인기 박물관 아시아 부문에서 늘 1,2 위를 차지하고 있다니 이곳 방문이 서안 여행의 하일라이트라 하겠다.  


진시황은 진나라 31대 왕( B.C 246 ~  B.C 210년 재위) 으로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BC 221년 한나라와 제나라의 군대를 잇따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만리장성을 축성하고, 불로장생을 열망한 나머지 불로초를 구하려 했다는 점 등으로 중국 유학자들은 그를 폭군으로 비판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이며,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통치자임에는 틀림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진시황의 무덤은 아직 발굴하지 않아 그저 산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1Km 정도 떨어진 이곳
병마용 갱이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관람지이다. 입구에서 걸어 들어 오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 것은 뜨거운 날씨 때문일 것이다. 실은 15분 정도 걸렸을 것같은데....
물론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박물관입구를 향해 모여든다.

  




현재 1호, 2호, 3호갱은 관람할 수 있다고 하는데 건물이 나란히 보인다. 




우선 1호갱이 완전히 정비되어 있고 규모도 크다고 하여 1호갱을 먼저 관람하기로 했다.

모두 8,000여점의 병사와 520점의 말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커다란 돔 체육관 같은 건물에 들어서니 발 아래  흙인형이 나란한 광경이 널리 펼쳐져 있다. 감흥 이전에 어안이 벙벙하다. 이것이 정녕 진시황 당시 조성된 것이란 말인가? 진시황이 자기 사후를 지키려 건설한 지하세계란 말인가? 내세의 안녕을 위한 노력으로 그는 지금 영생을 살고 있는가? 2,200년 전에 조성된 것이 어떻게 온전하게 유지되었었나 참 믿기지 않는다. 진시황의 실존과 사상을 분명히 증명해 주는 갱이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가 이곳에서 도자기 조각을 발견하면서 처음 빛을 보게 되었고,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다는데 아직까지 발굴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실제 병용의 모습은 기골이 장대한 젊은 사람을 모델로 하여 키는 190cm 전후이며, 얼굴은 8가지 유형을 기본으로 하여 수염이나 머리 모양을 달리하여 각기 다른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흙을 덮었을 때 중력을 분산 시켜 붕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사이 사이 벽돌벽을 쌓았다는 것, 그 벽돌벽 위에 홈을 만들어 통나무를 걸친 다음 그 위에 다시 나무로 덮개를 하고 다시 그 위에 두껍게 흙을 덮는 방식으로 갱이 조성되었다는 안내 표지가 사이 사이 붙어 있다. 다섯 군데의 경사진 입구를 통해 작업을 했으며 작업이 완료되면 곧 바로 나무로 입구를 막고 흙벽을 덮어 완벽하게 밀봉했다는 설명도 있다.
용병의 디테일도 굉장하고, 벽돌도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고, 벽을 쌓는 방식도 퍽 기능적으로 보이고......사설 달기가 민망한 광경이다. 






 둥근 지붕을 얹은 박물관 내부는 냉방 시설이 없어 상당히 후텁지근하고 답답하다. 군데 군데 통로를 만들어 두어 숨 쉴 틈이 있긴 했다. 관람자들의 모습이 개미처럼 보이는 것은 이 돔 건물의 높이와 규모를 말해준다.

 





흙 인형을 완벽하게 복원하기까지의 많은 과정을 짐작케 하는 공간들이 더러 보인다.





1호갱과 나란한 2호 갱으로 들어 가 본다.





조각이 난 채 출토된 병마용들을 퍼즐 맞추듯 맞춰가며 본 모습으로 복원하는 일이 간단할 리는 없다. 작업하는 공간 같은 곳도 보인다. 이 작업만도 수십년이 걸릴지 알 수 없겠다 싶었다. 






용병의 모습을 복제하여 마네킹 모양으로 유리장 안에 전시해서 관람자의 이해를 도우려 한다. 하지만 그 앞은 북새통을 이루는지라 참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장교의 얼굴(←)과 중급관리(→)의 얼굴 표정이 다르고, 복식도 물론 다르다. 목도리에 소매 주름에, 디테일이 예사롭지가 않다. 




말과 기마병, 그리고 병사 이외에도 훈장을 단 군인 등 많은 군상이 세워져 있다. 결국 땅에 묻혀야 하는 군상들에 이렇게 꼼꼼하게 공을 들였다는 게, 현실을 완벽하게 지하세계에 재현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병마용이 제작 당시에는 아름답게 채색이 되어 있었다는 설명이 군데 군데 있다. 출토 후 공기 접촉으로 급격히 탈색 되었다는 것을 여러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블루나 핑크 색상이 스며 든 것이 보여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늠름하고 멋진 병사가 아름답게 채색된 의관을 갖추고 대오를 지어 있는 모습을 그려보니 굉장히 멋있었지 싶다. 이 쯤 되면 흙으로 빚은 인형에도 영혼이 깃 들었을 것같다. 




<흥선사>

 

 

3 세기 말, 당나라 시절  창건된 사찰로서 중국 밀교의 발상지였다는 설명이 있다. 인도에서 건너 온 승려들이 거주하며 공부 했고,  많은 불교 경전들이 이 곳에서 번역되었던 유서 깊은 사찰이라고 한다.
일본 진언종 불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고 안내문이 일러준다.

1956년에 섬서성의 핵심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  국무원에서 국가 중요 불교 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포대화상을 무척 섬기는 것 같다. 어깨에 자루를 메고 다닌다 해서 포대 화상이라고 하는데 배를 내놓은 익살스러운 표정 때문에 친근해 보이고, 재물을 안겨 준다는 속설에서 잘 모시는 모양이나 우리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여기는 중국!


비파를 들고, 창을 들고 법을 지킨다는 사천왕상은 우리 사찰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중국인들들의 향사랑, 불꽃 사랑은 유명하다. 이곳에도 젊은 아가씨들이 향을 한 주먹씩 들고 참배하고 있어, 예쁘다고 말해 주니 좋아했다.

 




<대자은사지 공원>





자은사와 대안탑이 면해 있는 공원.
쾌적하고 넓게 잘 조성되어 있다.





'대안탑은 자은사 내에 있는 7층 석탑이다. 
자은사는 당대에 황제 고종이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며 만든 절이라고 하고,
대안탑은 중국에서 유명한 불탑 중 하나로,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탑 내에 계단이 있어 올라 가며 원경을 볼 수 있다는데 지친 나머지 패스.....
공원 담장 너머로 탑만 바라 보았다.

 




멋장이 건물 앞에서 뿜고 있는 분수가 내 피로를 조금 덜어 가는 것 같다. 무슨 건물인가 궁금하여 돌아가 보니 문은 꼭 닫혀 있으나 식당이 운영 중인 듯했다. 





 언제 조성된 공원인지 잘 모르겠으나 건물도 조경도 세련되고 멋진 곳이다. 건물은 모던 중국풍을 컨셉으로 일관성이 있어 통일된 분위기이다. 깔끔한 공원이라 그늘을 골라 앉아 친구들과 잠시 쉬었다. 청소차가 지나 다니면서 우리 대화를 방해했고, 잠깐 신발만 벗어도 공안이 달려 와 지적을 한다. 우리만 지켜 봤는지, 근무하는 공안이 워낙 많은지 잘 모르겠으나, 공원을 깨끗하게 관리하겠다는 뜻이라 쾌념치 않았다.





놀이를 주제로 한 것같은 동상도 여럿 보이고, 아기자기한 노점도 규격화 되어 얌전하다. 




대안탑 북광장을 바라보는 공간이다. 
고대 도시, 장안이란, '장안의 화제'라는 말에서 보듯이 선진하고 멋진 도시였을 테고,
지금의 서안이란 요란하지 않으나 깨끗한 계획도시를 치밀하게 꿈 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넉넉한 광장을 바라 보면서 중국인들의 저력과 추진력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 실크로드 쇼>


낙타에 비단을 싣고 로마까지! 멀고도 험난했을 길을 개척했던 중국 고대인들의 모험심과 도전정신은 세계가 한 지붕이 된 지금에도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한다.

그런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현재 일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곳이 시진핑 주석의 고향이기도 하여 모두들 자부심을 갖고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에 힘쓰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실크로드 쇼라는 쇼를 마련하여 옛 영화를 재건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모양이다. 


화청지에서 공연하는 장안무가 장대하고 화려하다고 하나, 더위에 지친 우리는 '실크로드쇼'라는 실내쇼를 선택했다. 극장은 시내를 벗어나 휑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계절이 바뀌는 무대, 무대가 바뀌는 게 아니라 관중석 전체가 무대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장치, 잘 훈련된 낙타가 등장하는 무대, 우리가 앉은 좌석 바로 앞 통로를 지나 무대로 뛰어 드는 늑대, 불상이 모셔진 석벽에서 쏟아지는 폭포....진부한 내용을 덮어 주는 입체적인 장면이 볼거리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전장에 보내고 기다리는 어머니, 추위와 맹수와 갖은 악조건을 견디며 귀향하는 길에 아들은 불귀의 객이 되고 돌아 온 친구들은 모두 어머니의 자식이 되려 한다. 
모니터에 영어 자막을 봐가며 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면 멋진 순간들을 놓치게 되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순간 순간의 느낌으로 무대만 바라 보기로....





무대에서 실제로 폭포가 쏟아진다. 몇 톤의 물을 쏟아 내는지 모르겠으나 시원하고 근사하다. 





로마에 당도하여 서양문물을 접하기도 하고, 또 귀국하면 성대한 환영이 기다리고.....
실크로드를 통하여 문물이 오갔다는 의미를 전하려는 무대같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화려한 안무로 대미를 장식한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구름이 솜털 흩날리듯 가벼이 떠 있는 것을 무심히 바라 보았다.
구름이 씻겨 나가고 유난히 말간 이 하늘이 서울의 폭염을 예비한 것인줄 이 때는 몰랐었다. 


내 여행 이력에 가장 발걸음이 무겁고 굼뜨게 다닌 여정있으나
정리하면서 그런대로 볼 건 본 것같다는 생각으로, 싫었던 기억들도 함께 정리해 나갔다.
대륙이라하지만 14억 인구의 땅에 발을 딛은 이상 사람에 치이는 건 각오해야 했는데, 늘 적응이 안된다.

기념품 하나 편하게 살 여유도 없이 무턱대고 걷던 일정이나, 이해 안되는 현지 사정에 얼마간 심정이 상했으나, 격의 없는 친구들과 한껏 웃어 젖히는 바람에 다 쓸려 가버렸다. 


내 생애 또 다시 방문할 일이 없을 서안을 좀 더 촘촘히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나, 돌발적인 상황, 불편한 상황에도 크게 파안대소하며 넘겼던 지혜로운 여행이었다는 결론으로 여행을 간추려 보았다. 


<7월 21일부터 7월 25일의 4박 5일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