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1년

[소풍] - 성 석제

수행화 2021. 5. 5. 10:22

성 석제 작가의 글에는 다소간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길래 내가 이 봄에 거푸 몇 권을 찾아 읽지 않았나 싶다.  그중 '소풍'은 음식 이야기가 매력적인 산문집이다. 맛깔스럽고 목 넘김이 수월한 음식 삼키듯 술술 읽어 넘겼고 뼈 있는 농담도 쌉싸름한 뒷맛이 무겁지 않고 좋았다. 맛집 기행이기도 하고, 추억 속의 맛을 짚어 보기도 하는데, 실은 두런두런 사람 사는 이야기, 너, 나, 우리의 이야기로 들린다. 무심히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맛깔난 얘기가 담뿍해서 정말 유쾌해진다. 경험이라는 식재료를 작가 고유의 레시피로 요리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 같다. 톡 쏘는 유머와 위트는 비법 양념으로 구미를 당기게도 하고, 도도한 고명이 되기도 한다. 물론 재미는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 삶이 소풍이요, 소풍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이라 소풍을 기리며 음식에 관련한 작가의 에피소드 53편으로 정리한 것이다. 김밥, 너비아니, 부대찌개 이동갈비, 닭곰탕 등 주식 관련의 1부, 냉면, 칼국수, 비빔국수, 라면 등으로 면류의 2부, 김치, 대구포, 홍시, 조미료 등의 3부, 소주 막걸리 생맥주 솔잎차. 등등의 음료는 4부에 엮여있어 우리 먹거리 전반을 대충 아우르는 범위는 되지 싶다.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진 음식에 세상 풍경을 뿌려 입히고, 기억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버무리면 요리 완성! 삶은 소풍이 된다는 걸 본다.

"요로콤 조로콤 혀 쌓도, " "현다 안 현다 말을 해대도 다 말 뿐이랑 게"   <P. 56>
"해독 불가능한 말들을 들으며 갈비뼈에 붙어 있다 떨어진 갈비를 주워 먹는다.  < P. 56> 

생애 최초로 월급쟁이가 된 때 회식의 추억 으로 "불에 달군 칼로 1.5~2 밀리미터의 두께로 얇게 썰어 앞 니 사이에 끼우고 차근차근 깨물면 입 안 가득히 향이 퍼지며 구수하니 단맛이 나는 게 어란이다."  <P. 59>

제사를 지내는 날에는 자정가지 불을 환히 켜놓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린다. 아버지는 문어를 오리고 제사 준비를 마친 어머니, 고모와 아주머니들은 라디오 연속극에 빠져 있고 아이들은 삼촌과 고모부가 두는 장기 구경을 하고 있다. 나는 사랑방에서 할아버지 앞에 모릎을 꿇고 '죽은 혹(획), 건방시러운 (겉멋이 들어간) 삐침'이 나타날 때까지 알밤을 맞아가며 지방을 쓰느라 죽을 지경이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P. 104>

"그런데 칼구수에 웬 만원 자리 지폐만 한 배춧잎이 떠 있다. 푹 익은 배추가 들어간 칼국수가 바로 'ㅈㅊ'식당'의 특징이며 식당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칼국수 대부분에 배추가 들어간다. 그게 무슨 맛인지는 먹어보면 안다. 하여튼 죽여주는 맛은 아니고 죽을 맛도 아니다. 배추가 어디 사람을 죽이던가, 죽여주던가, 그저 온화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정도이다, 그리고 깨 가루가 조금 뿌려져 있다.  < P. 178>

"자연에 여러 가지 얼굴이 있듯이 자연이 주는 선물인 맛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시고 맵고 짜고 달며 쓴맛에 떫은맛이 혀가 느끼는 맛의 대표주자라면 후보선수로는 짭짤, 씁쓸, 떨떠름, 달콤, 쌉싸름, 새콤, 시큼, 집질, 찝찝 등등이 있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다는 밍밍, 싱거움도 넓은 의미에선 맛의 얼굴 가운데 하나다.  < P 224 >

어린 시절에 먹던 잊을 수 없는 라면 맛, 라면을 먹고 싶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을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무지개를 찾는 소년처럼 헛되이, 저 멀리에서 황홀하게 빛나는 그 시절을 되찾으려는 것이라고.  <P. 185> 

그 국화차는 어쩌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같은 국화는 없다. 같은 시간은 없다. 같은 공간의 같은 침묵, 그 같은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 국화차를 만난 이후 달라졌다. 따지고 보면 모든 국화차, 모든 사람, 모든 순간이 그렇다. 이 순간의 우주는 이 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 때 미다 그 국화차, 그 순간, 그 사람을 맛보았다는 느낌으로 행복하다. 슬프다.   <P. 298>


소소한 한 끼 식사에서부터 해외 여행지에서 맛본 특별한 음식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소풍 담소가 자유로이 흘러 흘러 내게까지 와 닿아, 상상하고 웃으며 공감할 수 있다니, 실로 문자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을 거듭 해본다.   
'미쉐린의 별'이 빛나는 특별한 레스토랑 순례가 아니어도, 모퉁이를 돌면 곧 만날 것같은 소박한 식당의 식사도
감칠맛 우러나는 문장으로 거듭 나 우리에게 기분 좋은 맛을 선사한다.

음식 맛은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맛이 있고, 개인의 역사와 추억에 의해 지극하게 기억되는 맛이 있다, 누군가와 함께 먹어 추억이 된 음식, 아름다운 장소에서 먹어 특별해진 음식,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영혼의 뿌리와 닿아 있는 음식 등등, 우리의 삶이 음식으로 시종(終)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고, 같은 음식에 다른 맛을 느낄 이유는 그래서 충분하다는 생각이 된다.

미국 드라마 '아메리칸 셰프'에서 유명한 맛 칼럼니스트는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에 독설과 악평을 퍼부어 한 요리사의 인생을 뒤집는 것을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하여 기분이 언짢았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입맛이 세계 표준 자격증이라도 부여받은 듯 안하무인이어서 잊히지 않느다. 요즘은 음식 얘기로 날밤을 새듯하며 매스컴 광풍을 몰고 다니니 맛 칼럼니스트라는 분들의 세치 혀가 권력화한 점도 있을 것같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는 열 개의 인격이 있고, 천수관음은 천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간의 인격이 변화무쌍하고 개개인의 취향도 다채롭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음식 맛의 개별성이라니! 

이 산문집의 글들을 쫒아가다 보면 음식 맛이 맛도 되고, 멋도 되고 당연히 추억도 된다는 자각에 한 끼 식사의 소중함을 마음에 담게된다. 마주하고 또 마주하는 한 끼 식사를 이야기가 있고 유쾌한 순간으로 기억에 남기겠다는 다짐 정도는 해야겠다.  망각이란 진정 무책임한 기능이라는 건 꼭 유념할 일이다. 작가가
 말했듯이 사월의 도랑물처럼 투명하고 도랑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가볍게, 소풍 삼아 한나절 책을 읽었다.


해학과 유머가 체화한 듯한 작가의 촌철살인의 명문장은 노력 그 이전에 타고 난 자질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더부러 문학을 향한 먼 동경의 역사가 마법이요 노력의 동력이었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작가의 육성을 듣다보면.....  
"아마 알프레드 노벨 씨도 몰랐을 겁니다. 한국의 농촌 마을에서 저와 같은 소년이  모깃불 곁에 있는 멍석에 앉아서 여성으로서는 가장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8회) 스웨덴의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1858~1940)의 <늪텃집 처녀>를 읽으며 이상한 동경심에 사로잡혔다는 것을요. 예, 알 수 있을 리가 없죠." 

그리고 "성 석제 작가는 천재" 라는  소감을 곁들여 '소풍'의 일독을 권한 나의 젊은 벗에게 백배 공감을 보내야겠다. 누군가와 뭔가를 공감할 공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인가! 머리 무거워 하는 사람에게 나도 일독을 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