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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제단에서 울리는 화음

올해는 산책을 일과 삼아보기로 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충실히 바깥출입을 하고 있다. 동네 한바퀴 걷는 일이 고작이지만 눈밭에라도 구를 듯이 얼굴 싸매고 중무장하고 나서니 남보기에는 웃길 일이다. 하지만 찬바람과 절대 친하지 않은 나의 사정이니 나름의 노력을 들여보는 것이다. 어제는 동네를 걷다가 벚꽃 가로수에 가지 치는 광경을 보았다. 인도를 따라 꽃구름 그늘이 드리워지면 찻길도 아랑곳 않고 오르락거리며 배회하던 그 길에서이다. 거기 사다리차가 웬일일까 해서 가까이 가보니 사다리 높이 앉은 기사님이 벚꽃나무 잔가지를 치고 있었다. 아니, 벌써! 봄을 준비하나! 고맙고 반가운 작업 중이라 조심히 지나갔다. 그래! 봄이 멀지 않았다. 봄, 따스한 그리움의 말을 입 속에 담아 보며 걸었다. 간 밤에는 야밤을 ..

노트북/2021년 2021.02.10

새 마음 챙겨보기

'코비드-19(COVID-19)', '확진자', '팬데믹', '사회적 거리두기 2.5 단계, 3단계'.......... 이 생소했던 말들로 날이 새고 밤이 지던 한 한 해를 보냈다. 크리스마스가 실종되더니 보신각 제야의 타종 행사도 없어 새해 새 마음 불러오는 것이 퍽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오가는 길에 캐롤을 들으면 12월이 축제같고, 구름 인파가 종각을 에워싸고 제야의 순간을 다함께 카운트, 삼, 이, 일, 댕.....울리면 서기(瑞氣)가 물결쳐 전해 오는 것같아 새마음 새 기운을 북돋웠는데 그마저 침묵에 들었다. 건국이래 67년 만의 침묵이라니 특기할 일이다. 해돋이 명소도 출입금지 차단 줄로 쓸쓸하고, 제야 이벤트의 성지 같던 뉴욕, 시드니, 홍콩 등 다른 도시들도 관객 없는 불꽃이 썰렁하긴 마찬가..

노트북/2021년 2021.01.01

'내 생에 마지막일 것들'

갑갑하네 울적하네 투정하는 사이에도 세월은 흘러 한 해를 넘기려 한다. 대책 없는 불만은 역시 소모적이었다 싶다. 강물이 굳이 세차게 달리지 않아도 언젠가 바다에 당도하듯이, 이 불만의 시간들도 흐르고 흘러 끝내 망각의 바다에 가 닿을 것이다. 지난달에 십여 년 만에 이사를 했다. 힘이 들고 번거로웠으나 거대한 정리작업을 한바탕 한 것 같아 가벼운 마음도 든다. 그러면서 또 '내 생에 마지막일 것들'이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 나는 가끔 가는 해외여행에서 어느 낯선 도시에게나 아름다운 풍광에게 잘 지내라며 마음의 인사를 보내고 떠나오곤 했었다. 이 만남이 '내 생에 마지막'일 것이리니 부디 아름다움을 오래 간직하고 잘 지내라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다. 3년 전에 간장을 담으면서도 이번이 내 생에 마지막 간..

노트북/2020년 2020.12.22

'유현준'의「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으니...

사실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잘 몰랐었다. 손녀 세영이가 읽어보라며 가져다 주기 전까지는.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니 아이와 책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한담도 나누게 되는 소중한 시간도 있다.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읽혀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저자의 프로필을 살펴 보다보니 얼마 전에 신문 칼럼에 '도시 이야기'(?)를 기고한 홍익대 교수 분이라는 걸 알았다. 하버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건축가로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대중적 인기가 상당하다고 하는데 내가 tv를 꼼꼼히 시청하지 않아 얼른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도회적인 외양으로 일단 출중하게 멋있다. 그간의 대한민국은 속도전으로 집을 짓고, 길을 만들며 개발이라는 목..

노트북/2020년 2020.09.06

당신이 옳다/ 정 혜신 -공감의 힘

책을 두고 누군가와 담소 나누는 일이 언제였었나 싶게 서서이 드문 일이 되어졌다. 눈도 아프고 귀찮은 거 싫어진 시절에 든 친구들에게 종이책 얘기는 꺼내는 것마저 눈치 없는 짓 쯤으로 됐다. 그런데 우리 손녀들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재밌다면서 가끔 나에게 도서 추천도 해주어 너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얼마 전에도 둘째 세영이가 책 한 권을 내밀며 읽어보니 아주 좋았었다고 두고 갔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아이가 할머니와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 씀씀이에다 미리 '좋아요'를 눌렀고, 읽으면서 깊어진 아이의 속마음이 보여서 놀랐고 감동이었다. 아기라 자라 이 어른을 가르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당신이 옳다'라는 책, 그래서 글 잘 쓰는 정신과 의사로 기억하는 정 혜신의 글을 오랜만에 읽게 됐다. 내용은 ..

노트북/2020년 2020.08.01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관람기

궁리파 할머니 나와 행동파 손녀, 규영의 조합! 언뜻 언밸런스하게 들릴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의기투합하면 에너지가 제법 충실하다. 손녀의 스케줄 관리에 뜻밖에도 할머니와의 미술전 관람이 하루 끼워져 있다하여 즐거울 하루 이벤트를 기대하며 부품하게 며칠을 보냈었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은 '인사 센트럴 뮤지엄'에서 열리는지라 오랜만에 인사동 공기도 마시고 아이와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는 가 없는 행복을 누렸다. 르네 프랑수아 길랭 마그리트(1898년 11월 21일~1967년 8월 15일) 는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단순한 정보만 갖고 나섰다. 초현실주의 작품은 선입견 없이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생각해서인지 머리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도통 없긴 ..

노트북/2020년 2020.07.09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관람기

대책 없고 먹먹하게 5월을 흘려보내던 나에게 손녀들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관람이라는 호사를 안겨 주었다. 가벼운 흥분에다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집을 나서니 몹시 인색하던 내 안의 미소가 화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타민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에게 이런 날은 며칠치의 활성비타민이지...' 산소라도 들이킨 듯 새틋해진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공연장인 블루스퀘어를 내비에 입력하고 출발하려니 우리 세영이는 어서 앞자리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내비를 저가 봐주어 할머니 수고 덜어주겠다는 빠른 판단이 얼마나 귀엽던지! 내 우충충하던 마음의 배경이 싹 바뀌는 걸 느끼면서 달렸다. 물론 세영이에 힘 입어 가쁜하게 도착을 했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한 것도 아닌데 로비에는 이미 관람객으로 어느정도 붐비고..

노트북/2020년 2020.06.09

「작은 아씨들」- 영화 보고 책 보고

영화 '작은 아씨들'을 우리 집의 작은 아씨들, 두 손녀와 함께 보았었다. 저희들끼리 관람했는데 할머니와 함께 한번 더 보고 싶어 졌다는 기특한 제안에 버선발로 달려 나간 건 물론이다. 영화는 마치 명화를 슬라이드 쇼로 감상하는 느낌이라 나는 장면 장면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차라리 스토리는 부차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맞다 싶다. 복고풍의 아름다운 의상들이며 고풍스러운 생활상들이 그만큼 멋있게 보였다. 내 감상을 말했더니 손녀가 나를 일깨워준다. 실은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의상상을 받은 작품이었다고 말이다. 그럼 그렇게 받을만하다 여겨졌다. 영화에 힘입어 책이 다시 나왔구나 했더니 또 손녀가 생일 선물로 이 사랑스러운 책을 내게 선물해 줬다. 생애 처음으로 순수하게 자기 노력으로 준비한 선물이라는 말이 귀에 ..

노트북/2020년 2020.05.02

「페스트」- 알베르 카뮈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를 1947년, 그의 나이 34세에 세상에 내놓았고, 그해 6월 10일 출간 후 한 달 만에 초판 2만 부가 매진될 정도로 화제작이었다고 한다. 이듬해에 터진 제2차 세계 대전이 페스트 소설의 착상에 기폭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한가하고 습관에 젖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질병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것과, 잔쟁 초기의 양상은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았다고 작가는 말한다. 194 × 년, 알제리 해변에 면한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 오랑에서 발생한 전염병 사건의 기록을 소설로 쓴 일종의 연대기로서 역사성을 가진 형식이라는 설명이 있는 소설이다. "솔직히 말해서 도시 자체는 못 생겼다. 일견 한가로워 보이는 이 도시는 전 세계 각지에 있..

노트북/2020년 2020.04.29

스스로 봄길이 되어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 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질긴 명줄은 언제나 끊어지려나, 이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 우리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 분석과 전망의 말은 향연을 이루지만 그저 불투명하기만 하다. 불안에 절어 지내던 지난 2개월 여 동안의 신문은 확진자, 사망자 숫자 카운트하는 기사로 도배되어 접하기도 두려운 지경이었다. 그렇게 심란하던 어느 아침, 땀에 흠씬 젖은 한 의료인..

노트북/2020년 2020.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