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기/인도 여행

인도 내 정녕 아지 못할...신비.

수행화 2008. 8. 28. 13:10

  인  도

 인도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곳이었다고,
    그래서 '신비의 나라'라고 하나보다 하고 생각해 본다.

    평화롭기도하고 또 슬프기도 한, 많은 극단이 공존하는 사회를 보기 때문인지?

    왜 인간은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저 까만 눈의 아이들은 길에서 구걸하며 자라는가?
    부처님께서 2000년 전에 깨우치신 지혜에 새삼 놀라고 그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은 고(苦)에서 출발하여 고(苦)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아니던가?
    그러나 모든 것은 자신의 운명이요 전생의 업으로만 여겨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고
다만 내생의 보다 나은 환생을 꿈 꾸며 산다고 하니
뿌리 깊은 윤회 사상인지 아니면 현실 도피와 무지의 소산인지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윤회와 해탈 또 깨달음 , 인도는 여러가지 빛으로 우리를 사색케한다



 1. 갠지스강

 여명의 갠지스 강

 새벽의 갠지스 강에서 강렬한 일출을 지켜 보면 누구나 조금씩은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강물은 그 많은 세월과 함께 또 그 많 영혼을 흘려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삶과 죽음의 의미가 오버랩 되어 스쳐간다. 어떤 삶이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강에 들어 서려면 지나야 하는 매달리는 행상과 구걸하는 아이와 함께 뒹구는  깡마른 소, 똥...  지옥을 뚫고 배에 몸을 실어 보니 이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이다.

  삶의 방식을 생각케 하는 갠지스...

갠지스 강변 

 인도의 건기에도 강폭이 넓고 도도히 강물을 내 보내는 갠지스.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면 내생을 기약받는다고 여기는 인도인들은 찬 기운이 감도는 새벽의 강물에 몸을 적시고 있다.

 강 언저리에는 주검을 화장한 매캐한 냄새가 감돌고 있는데도.


  2. 아잔타 석굴  
   

 

  29개의 석굴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인 아잔타 석굴.

  세계 불교문화, 불교미술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듯.
인도 중서부의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의 북동쪽 104km에 위치하며 기원전 3세기 무굴 왕조에 우기의 승려 수행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절벽 위의 산을 마치 건물에 창을 만들듯 절묘하게 깎아 들어 갔으며 벽면의 벽화, 부조들을 차분히 보아야 할 것을 더위와 현기증으로 빨리 나온 것이 조금 후회.

3. 엘로라 석굴





 엘로라 석굴도 아우랑가바드 북서쪽 30km에 위치하며 아잔타 석굴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의 3대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석굴 내의 무수한 조각들은 바위산을 통째로 파 들어 가며 조각된 것으로 산의 일부라고 한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를 돌며 그 규모에 크게 놀란다. 석굴 내 불상은 대부분 사진에서처럼 코가 훼손 되어 있어 새삼 중생의 무지함을 본다.

 


4. 타지마할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워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타지마할. 붉은 사암의 멋진 정문을 들어서면 정원 너머 신기루처럼 솟아있는 유백색의 건물.

 순간 그 아리따운 자태에 넋이 나가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아픔과도 같은 전율이 퍼져 나온다.

 고귀한 차가움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가까이 가서도 꿈만같은 아름다움이다. 보석으로 수 놓은 벽을 만져보며 또 전설같은 사랑의 얘기를 떠올리며 갑자기 말을 잃었다.

 건축에 뛰어난 무굴제국의 왕, 사자한( 세계의 지배자 라는 의미 )이 출산하다 죽은 사랑하는 아내 뭄 타지마할( 궁전의 진주 라는 의미 )의 죽음을 슬퍼하며, 인도, 페르시아,중앙 아시아의 건축가들과 22년동안 건축하여 아내에게 바친 건축물이라고한다.

 뽀얀 대리석의 살에 수 놓듯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보석의 꽃잎과 가녀린 줄기들. 1653년에 이런 심미안(審美眼)이 있었다니... 붉고 푸르고 녹색빛을 내며 사랑스럽게 새겨진 문양들은 모두 원석이며 보석이라고한다.


 

 

 궁전 측면의 모습이다.건축물의 네 모서리에는 사진에 보이는모양의 세련된 첨탑이 대칭으로 서 있어 둥근 돔 형태의 부드러운 곡선에 조형미를 더 해 주는 듯했다.

 그늘도 하얗게 느껴지는 건물에 비껴 서면 누구나 인간의 능력에 대하여, 사랑의 힘에 대하여, 가족에 대하여 많은 상념이 떠 오를 것이다.

 지나친 아름다움은 차라리 엄숙함이 되어 우리를 경건하게 한다.


 5. 나란타 대학 (Nalanda)

 

 왕사성 북쪽에 있는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절

 이미 B.C 5세기에 불교 연구의 중심이었고, 당나라의 현장 스님도 여기에 유학 했었다고 한다.

 붉은 벽돌의 일부만 남아 있으나 굉장히 큰 규모였으며 당시의 건축 기술과 왕성했을 경전 연구의 모습이 상상된다.

 

 나란타 대학의 남아 있는 부분.

 설계가 그냥 보아도 멋있고 짜임새 있어 보이고, 곳곳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기숙사등 부대 시설도 아 주 잘 볼 수 있었다.

 당시의 붉은 벽돌은 두께가 얇고 예쁜데  잘 구웠는지 아직도 보존 된 것이 많았다.


6. 산치 대탑

 



 보팔주, 비르바역에서 8마일 지점인 산치촌에 위치 하는 반구(半球) 모양의 탑 (기단 직경 120피트, 높이56피트).

 B.C 250년 경에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건축물로 여겨지지 않게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피폐한 성지를 순례하다가 모습이 온전한 탑을 보니 무한한 신심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문에는 섬세한 조각이 눈에 들어 오고 자세히 보면 불상은 없고 깨달음의 상징인 보리수, 불법(佛法)의 상징인 바퀴등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법륜(法輪)을 의미하는 바퀴와, 성불을 의미하는 보리수가  불상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타

 

 새벽 봄베이 역전의 노숙자들.

 낮에 두르고 다니던 보자기 치마는 밤에는 이불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쓰레기 봉투를 함부로 버린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노숙자의 무리들.

 

 어디든 관광객이 정차만 하면 순식간에 구름처럼 몰려 오는 아이들.

 동정심 많은 한국관광객만 따라 다닌다. 순간의 동정이 아이들 버리는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

 "석가모나불", "보살님" "어머니"... 서툰 우리말을 읊으며 따라 다니는 아이들이 차라리 귀엽다.

 "볼펜"을 외치며 따라 다니는 아이들 보고 내가 하던 말 "공부도 안 하면서 볼펜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