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8년 11

스페인 여행기를 올리고 나서.

나에게 여행은 나비의 출생처럼 어제나 싱그러운 가벼움으로 시작한다. 내가 두르고 있던 일상을 허물처럼 벗어 둔 채 한 마리 가벼운 나비가 되어 날아본다는 기분이 일단 들기 때문이다. 나비의 삶이 유한하듯이 내게 허용된 자유가 길지 않기에, 나는 나비로서의 내 여정을 남 달리 더 소중히 여기며 매순간에 충실하려 애를 쓰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은 보면서 또 찍으면서, 들리는 것은 들으면서 또 메모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에 대한 사전 공부가 미흡한 나를 내심 질책해 가면서... 나를 힘 들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임을 또 한번 알게 해 준다. 그렇게 힘 든 내가 나는 좋다. 그렇게 치열한 순간이 나는 좋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여행의 현기증이 다소 엷어지면서 정작 힘든 일은 시작 된다. 여행 사..

노트북/2008년 2008.12.22

내 여행의 변천사(變遷史)

나는 내가 결혼하여 아기 엄마가 된 이후로 단 한번도 나 홀로 집 밖에서 자 본 일이 없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쪼르르 친정에 달려가지도 않았으니 친정에 가서 자는 일도 물론 없었고, 화가 나면 쇼핑을 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들 해도 나는 그렇게 충동적인 일도 저질러보지 못했는데 하물며 가족을 두고 홀로 여행한다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융통성이 몽땅 없는 탓도 있다지만 나는 하루라도 집을 비우면서 내가 만든 가정의 질서를 내 자신이 깨 볼 마음이 없었다 일상에 몰입하여 언제나 거기 그렇게 있기에 가족들은 차라리 나의 존재 가치를 잊은 게 아닌가 골똘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기도 했다. “그래, 나는 공기와 같다니까. 언제나 함께 있으니까 존재 자체에 무심하고 또 그 고마움을 알 수 없는 공기...공기가 ..

노트북/2008년 2008.10.18

나의 유별난 명절 증후군

명절의 계절이 되면 신문, 잡지, 텔레비전 할 것 없이 온 메스컴은 주부들의 ‘명절 증후군’을 큰 사회 문제로 기사화하며 자못 심각하다고들 한다. 지난 추설명절에도 어김없이 이 주제는 수면 위에 올라 와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명절 직후에 이혼 소송이 부쩍 늘어난다는 뉴스에다, 이혼 숙려제가 도입되고부터 그나마 이혼율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아주 희망적(?) 메시지까지 전해준다. 철통같이 단단하고 권위적이던 남성우월주의는 이제 대수술을 기다리는 환자가 되어 수술대 위에 눕혀진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 주부는 시댁에서 가사노동(?)에 절어 있고, 남편은 저의 부모님 댁에서 편히 쉬어 자세로 대접만 받으려고 한다! 설정이 좀 불공평하기도하고, 또 온갖 치다꺼리에 심신이 피로한 주부에게 관심을 보여야 하며,..

노트북/2008년 2008.10.09

버리는 기술-오늘의 화두

얼마전 신문에서 ‘버리는 기술’이라는 책 광고를 봤다. 작가가 일본인인 것으로 보아 좁은 주거 공간을 가능한 쾌적하고 유용하게 쓰기 위한 어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실었을 것 같다. 물자가 넘쳐 나고 개개인이 소지하는 물건이 엄청난 이 시대에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임에 틀림이 없고 잘 버리는 것이 미덕이기도 하고 또 기술이기도 할 것이다. 일년 이내에 한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은 말 그대로 무용지물이니 버려야한다는 설, 물건 하나를 사면 하나를 꼭 버려야 한다는 의견... 자칭 살림의 달인이라는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말이며 그 원칙이 틀리지 않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나도 살면서 많은 것을 버리기도 했고, 또 쓰잘 데 없는 것을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눈에 띄면 숨 막히게 거추장스러우나 보관..

노트북/2008년 2008.09.08

새집에 입주하며.

2004-6-17 내 한 없이 빈약한 컴퓨터 실력으로 홈페이지 구축에 도전, 딸 윤경이의 도움으로 며칠 밤을 새워 가며 내 개인 홈페이지를 오픈 했었고. 밤잠 설친다고 남편씨에게 걱정을 많이도 들어 가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또방문하는 자 없는 조용한 방일지언정 나는 가끔 들어가서 이것 저것 먼지도 털고 했건만... 남의 집을 깡그리 망쳐주는 알 수 없는 손길에 의해 허물어져 가는 페이지에 애 태우는 나에게 아들이 거처를 마련해 주어 지금의 집으로 옮겼다. 2008-8-25 우선 잡기장 글을 옮기고 보니 요모조모 알아 가며 꾸며 볼 마음이 생긴다. 적응이 빠르진 않으나 실증 잘 안 내는 내 성격은 또 여기에 잔잔히 정을 붙일 것이다. 아들, 딸이 깔아 준 방석에 나는 늘 잘 놀고 있다.

노트북/2008년 2008.08.25

한복 한 벌의 추억

5월은 온 대지가 생명의 푸른 기운으로 넘실대는 가슴 벅찬 계절이다. 가뭇가뭇 지워지던 겨울의 회색을 5월은 삽시간에 초록으로 덮으며 가늘게나마 남아 있던 지난 겨울의 꼬리를 잘라 버린다. 자연 속에 내장된 시계의 정확성에, 그 충실한 흐름에 경외감을 보내며 이 힘찬 봄 맥박의 고동에 발맞춰 걸음을 고쳐 보게 하는 계절이다. 5월과 어버이 날과 한복 한 벌. 어머님과 내 젊은 날들을 한꺼번에 떠 올리게 하는 슬프고도 애잔한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1972년. 결혼 후 처음 맞는 어머니날 (그당시는 어버이 날을 어머니 날이라고 일렀다)에 나는 두 분 어머니를 위해 선물을 마련했다. 봉급을 받은 날 퇴근길에 포목점에 들러 한복감 두벌을 엄선해서 샀다. 물론 내게는 다소 벅찬 지출이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마련을..

노트북/2008년 2008.08.25

박완서의 단편 '그여자네 집'을 읽고

김용택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노트북/2008년 2008.08.25

규영이의 행복 사전

규영이가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감격 시대를 맞이했다, 반 배정을 받고 생애 첫 교실에 앉아 있는 차분한 모습이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다. 기대를 가득 실은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배움의 찬란한 세계에 성큼 들어 선 것에 나는 감격 했다 저의 엄마, 휴가까지 낸 아빠에게는 뭐 설명이 필요 없는 감격의 날이었으리. 창틈을 통해 딸을 보겠다고 머리들을 조아린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행복을 나는 보았다. 그날 나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 내는 시인의 마음에 한껏 공감했고, 지난 시간들을 떠 올려 보며 난데 없는 애틋한 감상을 일으켰고 이 모든 장면에 마음으로 감사를 보냈다. 입학식 전 날 나는 규영이에게 넌지시 한마디 일러 줬다. 학교는 유치원과 다르고, 선생님도 유치원 선생님과 다르다고, 특히 선생님은 유..

노트북/2008년 2008.08.25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 -한비야-

한비야의 책은 이미 몇권을 읽어 그의 저돌적인 성실함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 배낭 여행을 스케치해 본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4권 중 3권을 읽으며 그의 큰 그릇에 또 놀라고 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여정을 따라서 훑어 읽어 내려 가는 동안 나는 초인적인 한 비야의 적응력에 질리고 말았다. 그는 정녕 배낭 여행의 대부이고 오지 여행의 선구자이며, 영혼의 자유를 구가하는 여장부이다. 외국어로 단단히 무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지평선 넘어, 수평선 넘어 지구의 끝이라 할지라도 배낭에 용기만 담으면 어디든지 못 갈 곳이 없다는 담대함이라니! 폭풍이라도 일으킬듯한 강한 호기심에다 넘쳐나는 자신감으로 스스로의 인생에 도전장을 던져 보고, 신들매를 조이고는 험난한 여정에 들었으며 인내와 용기를..

노트북/2008년 2008.08.25

아름다운 겨울

겨울의 긴 치마 끝자락에 함박눈이 소복히 내려 겨울의 기억이 아름다우려 하고 있다. 아니 지난 겨울은 내 생애에 또 하나 아름다운 겨울이었다. 눈을 곱게 얹고 그림이 되어 정물처럼 서 있는 창 밖의 나무를 바라보며 작년 이맘 때 영훈이랑 눈 속에서 보낸 날들을 떠 올려 본다 기억에 시간이 차곡차곡 입혀져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마치 눈에 갇혀 외부와 격리라도 된 양, 공연한 상상을 해가며 모처럼 사치한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다 새벽 병원의 흐린 불빛, 지루한 얼굴의 간호사와 두런두런 출산 수속을 밟고 있던 딸 부부의 긴장된 얼굴... 대견하고 애처러웠던 순간들. 나는 체질에 안 맞게도 강심장이 되어 뛰는 가슴으로 영훈이의 출산을 지켜보았고 아름답고 늠름한 아기 영훈이는 그렇게 세상과 만났다. 아기는 엄마..

노트북/2008년 2008.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