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221

김 영하의 '작별인사'를 읽고.

김 영하 작가의 책은 대부분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것 같고, 나도 걸러가며 보아도 제법 읽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나는 2010년도부터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의 애청자로서 작가가 차분한 음성으로 들려주는 책얘기들을 상당히 좋아했다. 이번 신간 소설 '작별인사'에도 역시 관심이 집중된 모양이다. 책 출간과 거의 동시에 도서관에 대출 예약 신청을 해두었건만 차례는 오지 않고 하세월 따분하게 기다리던 중, 책바라기, 나의 젊은 벗이 자신이 최근 읽은 책 목록을 보내왔다. '작별인사'도 나란히 얹혀 있어 달려나가 책을 샀고 아무런 기본정보도 없이 곧 읽었다. 배경이 휴머노이드가 보편화한 미래의 세상이라 SF 영화 보듯 읽으면서 아주 시의적절한 주제라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하나보다 생..

노트북/2023년 2023.07.18

등불을 끄고, 영원한 잠에 드시니.

12월이 꽁꽁 얼고 있었다. 기상이변의 여파로 전 지구가 혹한에다 폭설에다 힘든 겨울이 닥칠 것이라는 뉴스가 넘실댔다. 생각이 바빠지는 이 세모의 시간에 기상 이변보다 더 매서운 비보가 우리 집에 날아들었다. 큰 올케 언니가 졸지에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지병도 없으셨고, 일상을 독립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셨으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얼마 전 전화 통화에서도 이 해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도록 하자시어 여전히 무탈하게 보내시구나 여기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던 나는 바로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그 또렷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고, 미처 다하지 못한 말마디들이 내 안에서 끓어 넘쳐 마음도 몸도 심하게 떨었다. 전라도 지방에 폭설이 내렸었고, 중부 지방에도 눈발이 쉬임 ..

노트북 2022.12.2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럿셀(B. Russell, 1872~1970)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저서를 남긴 철학자요 195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알고 있다. 이 글은 1972년 3월 6일 전국비종교협회 런던 남부지부 후원하에 배터시(Battersea)읍 공화당에서 강연한 내용이라고 서두에 쓰여있다. 러셀은 순수 철학적 주제들에 기여한 바 크지만 도덕이나 종교에 관한 사상으로는, 기도교적 입장에서는 크게 이단자로 평가할 만하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어법으로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한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감동을 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말하기에 앞서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정의한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 누구든 스스로를..

노트북/2022년 2022.11.07

봉숭아 꽃씨를 받으며.

어느새 깊은 가을이다. 두꺼운 그늘을 깔아주던 나뭇잎들이 갈잎 되어 함부로 떨어져 내린다. 습기 머금어 싱그러웠던 풀빛은 가뭇 없이 사라지고, 곱게 물이 든 것도 잠시, 바람결 타고 비처럼 쏟아지다가 발치를 고이 덮기도 한다. 비우며 또 다른 생을 꿈꾸는 나무를 바라보며 순응을 생각한다. 나의 옥상 꽃밭에도 가을이 내려 풀잎에서 가벼운 가랑잎 소리가 난다. 폭염과 폭우에 위태로웠던 시간을 간신히 추스리고 꽃까지 피우느라 힘이 들었나, 벌써 수척해 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시든 꽃들을 잘라 주면서 내년에는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리라 꽃에게 약속해 본다. 작년 이맘때 미국 다녀오느라 집을 비우는 바람에 우리 소박한 꽃밭과 가을을 보내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늦둥이 백일홍이 그런대로 화려했고, 가을..

노트북/2022년 2022.10.23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무성한 추억을 남기고 이 여름도 떠날 채비에 들었다. 가을이 성큼 창문 턱까지 다가오며 가는 걸음을 재촉한다. 가열했던 여름도 보내는 마음은 아쉬운 일. 미국 사는 딸네 가족이 방학을 우리 집에서 보내면서 아주 다채로운 여름을 보냈다. 아이들은 추억을 만들어 여기도 두고, 또 그득히 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나의 공간은 본모습을 되찾았지만 일상은 늘어진 고무줄 형국이 돼 버렸다. 맥 놓은 시간이 점점 길어져 타성에 젖어들 것만 같은 불안감이 스멀거려 맘 크게 추슬러 닥치고 독서에 돌입하기로 한다. 일단 책상 위에 이 책 저 책 수북이 쌓아 두고 오며 가며 바라보는 것이 먼저다. 그게 은연중 무게감이 되어 압박을 가해 오니 책을 뒤적뒤적 하게 되던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마침 아는 동생이 강추한 책 '..

노트북/2022년 2022.09.02

[소풍] - 성 석제

성 석제 작가의 글에는 다소간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길래 내가 이 봄에 거푸 몇 권을 찾아 읽지 않았나 싶다. 그중 '소풍'은 음식 이야기가 매력적인 산문집이다. 맛깔스럽고 목 넘김이 수월한 음식 삼키듯 술술 읽어 넘겼고 뼈 있는 농담도 쌉싸름한 뒷맛이 무겁지 않고 좋았다. 맛집 기행이기도 하고, 추억 속의 맛을 짚어 보기도 하는데, 실은 두런두런 사람 사는 이야기, 너, 나, 우리의 이야기로 들린다. 무심히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맛깔난 얘기가 담뿍해서 정말 유쾌해진다. 경험이라는 식재료를 작가 고유의 레시피로 요리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 같다. 톡 쏘는 유머와 위트는 비법 양념으로 구미를 당기게도 하고, 도도한 고명이 되기도 한다. 물론 재미는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 삶이 소풍이요, 소풍에 빠..

노트북/2021년 2021.05.05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 - 정 연복.

지난달에 '정 연복의 그림 이야기'라 부제가 달린 책,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을 저자로부터 받았다. 종이 날에 손가락이 베일 것 같은 새 책을 받아 들 때면 내 손은 언제나 공손해진다. 새 책이 주는 파릇하고 도도한 긴장감도 있지만 저자의 땀과 공력이 오롯이 전해져 와 존경의 념이 들기 때문이다. "상상의 박물관에서 행복한 산책 하시길", 정 연복 드림, 책이 표지부터 우선 아주 사랑스럽다. 뽀얀 우윳빛 배경이 좋고 시선이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이 사뿐히 자리한 모양새가 요즘 말로 엣지있다고 해야겠다. 표지 다음 장은 우아한 황갈색 빈 페이지 두 겹으로 여유롭고 멋스럽다. 또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처음처럼 다시 표지의 그 여인을 만나게 된다.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미처 가시지도 않았는데 차분한 시..

노트북/2021년 2021.04.30

<아름다운 날들> - 성 석제

"위대한 노래는 이승에도 천국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천국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 속해 있고 추억이라는 이름의 왕이 다스린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에서 '달콤하고 즐겁던 그 아름다운 날들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노래하는 '백작 부인의 아리아', 를 불러오면서 '아름다운 날들'의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시골 마을의 부잣집 손자, 장 원두는 초등 학교 신입생으로 일견 공부 잘하고 모범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다른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이다. 바보 친구 진용이는 지극한 가난에 무능한 아버지를 둔 불우한 환경으로 늘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는다. 손자 원두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는 위엄으로 가정을 통솔하시면서도 원두에게 지극한 내리사랑을 보이시니, 힘든 노동에다 술 주정뱅이 아버지..

노트북/2021년 2021.04.18

'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작가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는 작품이 널리 돌풍을 일으킨 것에 비해 상당히 베일에 가리운 인물이라고 한다. 그녀의 작품이 영미권은 물론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34국에서 출판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출신이며, 고전문학을 전공한 여성이라는 점 이외에 별 알려진 정보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때때로 아무런 정보 없이 그저 제목에 끌려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이번에도 오래 전에 어디선가 보고 메모해 둔 책 제목이 설핏 떠올라서 도서관 대출 신청을 했더니 바로 받게 되어 졸지에 읽었다. 그러자니 무심히 페이지를 넘겼는데, 뜻밖에도 예사롭지 않은 문장에 곧바로 매료되었고, 1권을 빛의 속도로 읽어버렸다. 책을 덮고나서 끝이지만 끝이 아닌 미진한 마음에 ..

노트북/2021년 2021.03.14

TV 제단에서 울리는 화음

올해는 산책을 일과 삼아보기로 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충실히 바깥출입을 하고 있다. 동네 한바퀴 걷는 일이 고작이지만 눈밭에라도 구를 듯이 얼굴 싸매고 중무장하고 나서니 남보기에는 웃길 일이다. 하지만 찬바람과 절대 친하지 않은 나의 사정이니 나름의 노력을 들여보는 것이다. 어제는 동네를 걷다가 벚꽃 가로수에 가지 치는 광경을 보았다. 인도를 따라 꽃구름 그늘이 드리워지면 찻길도 아랑곳 않고 오르락거리며 배회하던 그 길에서이다. 거기 사다리차가 웬일일까 해서 가까이 가보니 사다리 높이 앉은 기사님이 벚꽃나무 잔가지를 치고 있었다. 아니, 벌써! 봄을 준비하나! 고맙고 반가운 작업 중이라 조심히 지나갔다. 그래! 봄이 멀지 않았다. 봄, 따스한 그리움의 말을 입 속에 담아 보며 걸었다. 간 밤에는 야밤을 ..

노트북/2021년 2021.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