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1년 6

[소풍] - 성 석제

성 석제 작가의 글에는 다소간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길래 내가 이 봄에 거푸 몇 권을 찾아 읽지 않았나 싶다. 그중 '소풍'은 음식 이야기가 매력적인 산문집이다. 맛깔스럽고 목 넘김이 수월한 음식 삼키듯 술술 읽어 넘겼고 뼈 있는 농담도 쌉싸름한 뒷맛이 무겁지 않고 좋았다. 맛집 기행이기도 하고, 추억 속의 맛을 짚어 보기도 하는데, 실은 두런두런 사람 사는 이야기, 너, 나, 우리의 이야기로 들린다. 무심히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맛깔난 얘기가 담뿍해서 정말 유쾌해진다. 경험이라는 식재료를 작가 고유의 레시피로 요리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 같다. 톡 쏘는 유머와 위트는 비법 양념으로 구미를 당기게도 하고, 도도한 고명이 되기도 한다. 물론 재미는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 삶이 소풍이요, 소풍에 빠..

노트북/2021년 2021.05.05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 - 정 연복.

지난달에 '정 연복의 그림 이야기'라 부제가 달린 책,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을 저자로부터 받았다. 종이 날에 손가락이 베일 것 같은 새 책을 받아 들 때면 내 손은 언제나 공손해진다. 새 책이 주는 파릇하고 도도한 긴장감도 있지만 저자의 땀과 공력이 오롯이 전해져 와 존경의 념이 들기 때문이다. "상상의 박물관에서 행복한 산책 하시길", 정 연복 드림, 책이 표지부터 우선 아주 사랑스럽다. 뽀얀 우윳빛 배경이 좋고 시선이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이 사뿐히 자리한 모양새가 요즘 말로 엣지있다고 해야겠다. 표지 다음 장은 우아한 황갈색 빈 페이지 두 겹으로 여유롭고 멋스럽다. 또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처음처럼 다시 표지의 그 여인을 만나게 된다.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미처 가시지도 않았는데 차분한 시..

노트북/2021년 2021.04.30

<아름다운 날들> - 성 석제

"위대한 노래는 이승에도 천국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천국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 속해 있고 추억이라는 이름의 왕이 다스린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에서 '달콤하고 즐겁던 그 아름다운 날들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노래하는 '백작 부인의 아리아', 를 불러오면서 '아름다운 날들'의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시골 마을의 부잣집 손자, 장 원두는 초등 학교 신입생으로 일견 공부 잘하고 모범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다른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이다. 바보 친구 진용이는 지극한 가난에 무능한 아버지를 둔 불우한 환경으로 늘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는다. 손자 원두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는 위엄으로 가정을 통솔하시면서도 원두에게 지극한 내리사랑을 보이시니, 힘든 노동에다 술 주정뱅이 아버지..

노트북/2021년 2021.04.18

'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작가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는 작품이 널리 돌풍을 일으킨 것에 비해 상당히 베일에 가리운 인물이라고 한다. 그녀의 작품이 영미권은 물론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34국에서 출판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출신이며, 고전문학을 전공한 여성이라는 점 이외에 별 알려진 정보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때때로 아무런 정보 없이 그저 제목에 끌려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이번에도 오래 전에 어디선가 보고 메모해 둔 책 제목이 설핏 떠올라서 도서관 대출 신청을 했더니 바로 받게 되어 졸지에 읽었다. 그러자니 무심히 페이지를 넘겼는데, 뜻밖에도 예사롭지 않은 문장에 곧바로 매료되었고, 1권을 빛의 속도로 읽어버렸다. 책을 덮고나서 끝이지만 끝이 아닌 미진한 마음에 ..

노트북/2021년 2021.03.14

TV 제단에서 울리는 화음

올해는 산책을 일과 삼아보기로 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충실히 바깥출입을 하고 있다. 동네 한바퀴 걷는 일이 고작이지만 눈밭에라도 구를 듯이 얼굴 싸매고 중무장하고 나서니 남보기에는 웃길 일이다. 하지만 찬바람과 절대 친하지 않은 나의 사정이니 나름의 노력을 들여보는 것이다. 어제는 동네를 걷다가 벚꽃 가로수에 가지 치는 광경을 보았다. 인도를 따라 꽃구름 그늘이 드리워지면 찻길도 아랑곳 않고 오르락거리며 배회하던 그 길에서이다. 거기 사다리차가 웬일일까 해서 가까이 가보니 사다리 높이 앉은 기사님이 벚꽃나무 잔가지를 치고 있었다. 아니, 벌써! 봄을 준비하나! 고맙고 반가운 작업 중이라 조심히 지나갔다. 그래! 봄이 멀지 않았다. 봄, 따스한 그리움의 말을 입 속에 담아 보며 걸었다. 간 밤에는 야밤을 ..

노트북/2021년 2021.02.10

새 마음 챙겨보기

'코비드-19(COVID-19)', '확진자', '팬데믹', '사회적 거리두기 2.5 단계, 3단계'.......... 이 생소했던 말들로 날이 새고 밤이 지던 한 한 해를 보냈다. 크리스마스가 실종되더니 보신각 제야의 타종 행사도 없어 새해 새 마음 불러오는 것이 퍽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오가는 길에 캐롤을 들으면 12월이 축제같고, 구름 인파가 종각을 에워싸고 제야의 순간을 다함께 카운트, 삼, 이, 일, 댕.....울리면 서기(瑞氣)가 물결쳐 전해 오는 것같아 새마음 새 기운을 북돋웠는데 그마저 침묵에 들었다. 건국이래 67년 만의 침묵이라니 특기할 일이다. 해돋이 명소도 출입금지 차단 줄로 쓸쓸하고, 제야 이벤트의 성지 같던 뉴욕, 시드니, 홍콩 등 다른 도시들도 관객 없는 불꽃이 썰렁하긴 마찬가..

노트북/2021년 202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