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기/베트남

역동적 힘이 보이는

수행화 2008. 8. 28. 13:37

베트남(Vietnam)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베트남.
 다분히 주관적 관점에서, 스쳐 지났던 호치민시, 하노이의 느낌을 적어 보기로 한다.

베트남은 오토바이로 하루를 시작하고 오토바이로 하루를 마감 하는듯,
남자는 물론, 아오자이를 휘날리며 한껏 모양을 낸 아가씨까지도 다 오토바이족이다.

호치민시는 미군이 주둔 했고 상업도시라 그런지 거리에 활기가 넘치고 행인들 모습도 밝았으나,
 하노이시는 수도이면서도 조금 낙후된 듯 보였고, 느리고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통일은 되었으나 국민의 의식주 문제등, 해결할 일이 많아 보였다.

제일 먼저 본 생소한 풍경은 주택의 형태였다.

검소한 생활을 하며, 호화 주택을 없애야 한다는 국가적 방침에 따라
집은 가로의 폭이 6m(?)를 넘지 않아야 한다고
차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집은 방 하나 정도의 폭에,길이로 길어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구조로나, 채광면에서 전혀 비효율적일텐데

뒤로 거실, 부엌 등을 두고 그 형태로 2층도 올리고, 앞면에 베란다도 내어 쓰고는 있었지만
보기가 굉장히 답답하고 너무 졸렬해 보였다.
나머지 토지는 또 유용하게 쓰긴 하겠지만 일단 제약이요, 불편으로 여겨졌다.

또 하나는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한 관계로 어느 쪽은 벼 심고 어느 지역은 수확하는등 대중이 없었다.
그리고 특기할 일은 들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여자였고, 버스길 옆에서 장기 두고 노는 사람은 모두 남자였다는 것.

고깔 모양의 모자를 쓰고 푸르고 넓은 들에 혼자 쭈구려 일하는 모습에서
강한 생활력, 철저하게 희생적인 모성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 베트님에서는 대한민국의 새마을 운동을 비롯하여 각가지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모델로 삼아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고 했다.

그 한 예로는 아이들 공부에 전력을 다하고, 부부가 맞벌이 해서 아이에게 비싼 과외 시키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니...
자기들은 우리의 교육열이 발전의 동력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엷은 안개비에 젖은 하롱베이의 모습.
 '인도차이나' 영화 속에서 감동적으로 보았던 바로 그 하롱베이.

 하노이 남동쪽으로 180km 떨어져 있는 해안의 절경.
 90년도 중반에 이미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베트남의 명승지.

  그 고요의 바다, 서정미 넘치는 정경을 한번 본 모든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생각된다.

 

 3000여개의 섬이 바다에 점점이 뿌려져 있고,
 소리 없이 떠 가는 배 위에서 그 에메랄드빛 해면을 바라보노라면...

 또한 눈을 들어 겹겹이 두른 기암 괴석을 보노라면.
 바로 옆으로 잡힐 듯 스쳐 지나가는 나즈막한 봉우리들을 보노라면.

 우리 마음의 심연(深淵)은 어느듯 무심의 감동이 넘쳐나고, 수면에 없는 파도는 우리 가슴 속으로 와서 서늘한 파문을 일으키며 오래 남는다.

 서늘한 감동을 언제까지나...

 하노이 남쪽으로 93km떨어진 '닌빈호아루'.(Ninh Binh Hoa Lu)

 육지의 하롱베이라 불리우나 운치는 많이 떨어져도 의외로 사람들은 관광지의 모습이었다.
 
 발로 노를 기막히게 잘 젓는 아줌마. 맹렬 베트남 여성.
 우리가 탄 배가 움직이면 이런 배가 대당 하나씩 따라 와서는 마지막 U턴 지대에서 광주리 속의 먹거리들을 파는 것이다.



 작은 2인승의 배를 타고 푸른 벼논을 지나치면서, 꼬불 꼬불한 물줄기를 따라, 주변의 병풍 두른 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 보는 것도 특이한 경험이다.

 더 특이한 것은 배가 중간쯤 가면, 사공 한명은 자기의 가족 사진을 보여 주며, 자기 아내와 엄마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하며 수공예품을 팔아 부수입을 올리는 것이다.

 대부분 영어는 못하고 불어는 조금씩 하는데 열심히 손짓, 발짓해 가며 판매 하려 애를 쓴다. 프랑스 통치를 받은 탓인지 프랑스 관광객이 많다.

 우리 일행의 배가 모두 U턴 하려는 순간, 우리배  담당인 아가씨에게 가로 막혀 바나나 콜라 등을 안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말 집요하나 더운 햇빛을 받아 익은 바나나는 아주 맛이 좋다.

 

 하노이시의 거리 풍경.
 
 자전거, 오토바이는 중요한 교통 수단이고 오토바이가 내 뿜는 매연이 굉장 했으며 자기들도 코에 삼각 수건을 마스크처럼 하고 다녔다.

 출근 시간의 오토바이 행렬은 정말 진풍경이다.

 

 호치민 기념관 앞에 서 있는 한국산 차.
 '경찰청지청' '현대면허시험장'이라고 씌어 있다.

 호치민 공항에서도 보았듯이 시내에는 한글이 씌어진 자동차가 더러 보였다. 왜 글씨를 지우지 않느냐고 물어 보니 '외제차'라는 걸 보이려고 그런다나.

 6.25 이후에 우리도 미국차라고 하며 영어를 지우지 않고 다녔을까? 생각해 보았다.

 호치민 기념관 앞에서 간단하게 자기네 악기를 소개하고 기념품을 판다. 호치민의 시신은 묘에 안치 되어 있었고 기거 하던 집도 그대로 보존 되어 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산 작은 거인.

 작은 나무 책상, 침대, 고물 라디오, 회의용 나무 탁자가 어느 소인국의 진열품처럼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