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8년

버리는 기술-오늘의 화두

수행화 2008. 9. 8. 12:35
 

얼마전 신문에서 ‘버리는 기술’이라는 책 광고를 봤다.

작가가 일본인인 것으로 보아 좁은 주거 공간을 가능한 쾌적하고 유용하게 쓰기 위한 어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실었을 것 같다.

물자가 넘쳐 나고 개개인이 소지하는 물건이 엄청난 이 시대에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임에 틀림이 없고 잘 버리는 것이 미덕이기도 하고 또 기술이기도 할 것이다.


일년 이내에 한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은 말 그대로 무용지물이니 버려야한다는 설,

물건 하나를 사면 하나를 꼭 버려야 한다는 의견...

자칭 살림의 달인이라는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말이며 그 원칙이 틀리지 않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나도 살면서 많은 것을 버리기도 했고, 또 쓰잘 데 없는 것을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눈에 띄면 숨 막히게 거추장스러우나 보관해 오는 오랜 물건도 있고,
냉큼 잘 버리고서는 찾고 또 후회할 때도 있다.

그러니 버리는 보편적 기술이 뭔지 궁금하기만 하다.


몇 년 전 이사를 하고 난 후, 책이 너무 많아 짐스러우니 전집 종류를 모두 버리자는 남편의 말도 있고,

또 내가 이 많은 책을 안고 있다가 다음에 아이들을 너무 힘들게 할 것 같기도 해서 이 참에 좀 버리자고 맘먹고,
통 큰 결단으로 책을 산더미처럼 버렸다.

가정생활 백과, 육아 전서, 가정 의학대전, 임어당 전집, 김형석 에세이 전집, 무슨 사상가 전집........

물론 내가 처녀 시절부터 사서 모은 것이니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다 버려졌는데,

아이를 키우며 나의 가정교사 역할을 충실히 하던 육아전서, 내가 아플 때마다 펼쳐 보곤 해서 낡아진 그 두꺼운 의학대전, 괜한 지적 허영심에 할부로 사고서는 몽떼뉴 편 한권 밖에 읽지 않았던 사상 전집.

책장 하나 분량을 몽땅 버리니 당시에는 좀 가뿐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아까운 마음에 아주 가슴까지 아파왔고 왜 나는 언제나 나의 것만 홀대하고 양보해야 하나 싶은 자학의 감정에 빠져 우울하기조차 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내 책을 집어다 자기 사무실에 비치해둔 우리 아파트 관리소장의 방에 가끔 가면 내가 버린 임어당 전집, 셰익스피어전집 등이 떡하니 꽂혀 있는 걸 보게 되는데 반가우면서도 어째 좀 씁쓸하기도 하곤 해서, 이제는 책을 자주 사지도 않지만 절대로 더 버리지 않으리라 마음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사를 하게 되니 또 자연히 ‘simple life’를 떠 올리게 되고 나는 나와 인연이 다한 물건들을 분류하고 강한 의지로 버릴 물건을 꼼꼼히 찾으려 들었다.

결심은 매몰찼으나...

용도를 다해 시간과 함께 기억에서 사라졌던 물건들이 눈에 뜨인 순간, 어둠에 갇혔던 그 하찮은 물건들이 빛 세상에 나오는 순간, 빛깔의 파장만큼이나 빠르게 기억의 저장고에 휘리릭 반사를 일으킨다.

“아니, 참 이런 게 있었지!”

“그때가 참 그랬었지!”

그 작은 물건들은 마치 마중물이나 된 듯이 저 아래 자잘한 기억들을 잘도 펌프질해 올린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샀던 자동 연필깎이(당시로는 야심차게 마련한)가 눈에 뜨이니 아들은 당장 그걸 샀던 남대문 시장과 그 추웠던 날의 기억 하나를 건져 내고,

딸아이의 작은 수영복을 보면 초등학교 시절 한탄강 물놀이의 기억이 오롯이 거기 묻어나오는 등등 기억 속 한 장면들을 환하게 조명해 준다.


내가 수를 놓아 만든 딸의 피아노 가방과 보조 가방은 바래인 빛깔이 역사를 말해주건만 손녀들이 가져가서는 고모 가방이었다고 낄낄거리며 들고 다녔고, 아빠가 입던 촌티 나는 손뜨개 가디건을 딸내미가 유치원에 입고 가는 웃기는 일도 있게 되고,

아들의 일기장, 스케치 북, 수집하듯이 많이도 모아 둔 지우개들에서 아이의 성품이 되짚어 보이기도 한다.


귀여운 아기가 수놓인 액자, 딸의 블라우스 소매에 수 놓였던 자수만을 오려 만든 작은 액자.

그 예쁜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혀 내 보내며 행복해 했던  내 젊었던 마음과 잠깐 만나 보기도 한다.

분주한 손길로 내 모든 슬픔을 이겨 보려 육신을 한 없이 힘들게 했던 젊은 엄마인 내가 아이들에게 부려 봤던 작은 사치들도 설핏 설핏 모습을 비춘다,


이 작은 것들은 뭉게뭉게 뜬 생각을 하게 하더니 급기야 내게 작은 위안을 보내 주는 듯하다.
아니 내가 내게 애처러운 위안을 보낸다.

-그대, 돌이켜 보면 여리나 열정적으로 또 예쁘게 아이를 다독다독 키웠노라-고.

나는 그 위안을 잘 접수한다.

이렇듯 물건이 가진 히스토리는 우리에게 뜻 아닌 추억의 시간을 주기도 한다.

정서적 가치(sentimental value).
이렇게 실물 가치는 전혀 없으나 마음껏 자기만의 높은 가치를 매기며 우리를 띠뜻하게 해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 것이다.  

기념은 기념일에 오간 선물만의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자디잔 일상에서 매 순간 떨어져 나가 기억 저 멀리 흩어져 버린 지난 순간과 잠깐 조우하는 것도 기념적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우리 비록 위대하지 않으나, 명성에 빛나지 않으나 나름 고귀한 시절은 가지고 있는 법.

그래서 내가 내린 늦은 결론은!

버리는 것만이 진정 미덕은 아닌 것. 잘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불가에서 출가자는 삼의일발 (三衣一鉢)의 삶을 지향한다.

옷 세벌과 식사를 위한 발우 한 벌이면 육신을 위한 삶은 영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근검하고, 탐하는 마음 내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삶, 소욕지족(小慾之足)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며 그 근간(根幹)을 우리는 본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버리는 문제가 화두가 되는 현실이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