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기/폴란드

Never Again

수행화 2008. 9. 9. 20:01

폴란드 (Poland)

폴란드의 공식 명칭은 폴란드 공화국(Repubric of Poland), 인구 38,176,000명, 국토 면적312,685㎢로서
한반도의 약 1.4배 면적의 국가이다.
 폴란드 인종이 98%이고 폴란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이다.


북쪽으로는 발트 해에 면해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동쪽으로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서쪽으로는 독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폴란드는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의 점이지대에 있어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으며, 여름에는 따뜻하다.
여름 최고 34℃, 겨울 최저 -21℃ 정도이다.

정치적으로는 1947년 이래 공산당인 폴란드 통일노동당[communist] 이 집권해온 1당체제 국가로 소련이 모델이 되어 정치구조와 행정조직이 이루어졌다.
최고의 정치적 권한은 당 중앙위원회의 정치국과 당 제1서기가 행사했다.
그러나 1989년 폴란드의 정치체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고,
그 결과 폴란드는 소련 진영의 공산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코페르니쿠스, 쇼팽(1810~1849), 큐리 부인 등 많은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나라이며
20세기에 활동한 폴란드의 작가들 가운데 헨리크 솅키에비치, 부아디수아프 레이몬트, 체수아프 미우오슈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명성을 누린 연주가들 가운데서
피아니스트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와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특히 유명하다.

또 우리에게 친숙한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 인이다.
.폴란드는 종합적인 교육체계를 통해 낮은 문맹률을 유지하고 있고 교육열이 대단한 국가라고 한다.
. 7∼15세의 학생에게 의무교육이 실시되며, 모든 학교교육이 무상으로 이루어진다.


1.아우슈비츠 (Auschwitz)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비아 주에 있는 오슈비엥침(Oswiecim), 독일아우슈비츠(Auschwitz)
크라쿠프 서쪽으로 61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며,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고 150만명이 목숨을 잃은 곳으로 빨간 벽돌 건물로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Never again"- 용서하되 잊지 말자'
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들은  역사를 거울 삼으려 하는 하는 것같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유태인, 카돌릭 교도, 동성 연애자, 집시 등이 수용 대상이었다고 하고
폴란드에 수용소를 설치한 것은 폴란드가 유태인이 가장 많고
유럽의 중심지역으로서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힛틀러의 나치스 당이 집권한 후 우수한 아리안 인종에 대한 선호와 그에 따른 선별 사상도 있었고
유태인이 독일의 시장 경제를 장악하여 그폐해가 심각한 수준으로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대두 된 것이
 힛틀러가 이런 역사적 만행의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이라고도 한다.

혹은 오스트리아 출생인 힛틀러가 비엔나 미술대학 응시에 낙방한 것이 한 원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고 한다.

'쉰들러 리스트', '아름다운 인생'...
유태인의 후손이 세계 각국에서, 특히 미국으로 많이 이주하였고 영화 산업을 주도하고 있기에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더 생생한 영화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체코와 폴란드 국경

육지로 이웃 국가와 마주하여 있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생소한 일. 조금 허술해 보이는 건물이 국경 초소이다.

체코-폴란드, 폴란드-헝가리. 헝가리-비엔나의 국경마다에서 여권을 검열하는 등 통과 수속이 있었다.

구 공산권 국가를 지난다는 실감이 가득...

'ARBEIT MACHT FREE'
(노동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구호 아치가 수용소의 성격과 희생자와 살아 남은 자의 고뇌를 잘 말해 주는 것이다.

폴란드 속담에 '불 속에서 잃은 것은 재 속에서 찾아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끈기와 기다림이 실린 말이다.

수용소 건물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동이 나란히 있다.철조망 사이의 자갈길이 영원으로 통하는 길이듯 아득하다.

전시실에는 당시의 많은 사진이 있고 생체 실험에 이용된 깡마른 소녀의 큰 눈에 고인 눈물은 잊혀지지 않는다.


집단 학살 수용소의 수석 의사 '맹겔레'는 출산과 단산의 연구 등 많은 생체 실험을 하였고 특히 쌍둥이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하는 등 경악할 얘기들을 듣게 된다..


희생자들이 남긴 머리카락 카페트, 안경테 더미, 산을 이루고 쌓여 있는 가방들, 새로운 생활에의 준비로 가지고 왔을 법한 법랑 냄비 등...,
특히 신발들, 신발이 모두 예쁜데다 아기 신발까지 보여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제 2의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에서 3Km 떨어져 있고 아우슈비츠의 20배 규모라고 한다.수용소 안까지 기차가 들어 가게 되어 있어 영화의 장면을 실감케한다.

수용소 정문

정문은 말 그대로 '죽음의 문'

기차 선로가 정문 안을 길게 통하고 있어 슬픔은 더 해진다.
오랜 기차 여행 후 안내 받은 곳이 샤워장이 아닌 가스실이었다는...그래서 그많은 소지품들이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2. 크라코프 (Krakow)

크라코프 시내

우리가 방문한 크라코프(Krak
ow)는 왕조의 도시로 우리의 경주처럼 유서 깊은 도시라고 한다.

전쟁의 피해가 없어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고 가까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더욱 유명하고 교통의 중심지이다
시내는 전차가 중요한 교통 수단 같아 보였다

화폐 단위는 '즐로티(Zlotty)'이고 1즐로티는 우리의 300원 정도이다

중세풍의 건물 옆에서 현대적 분위기의 노천 카페가 성업 중이었고 특히 이곳 할머니들은 치장을 잘 하고 외출하길 즐긴다고 한다. 예쁜 할머니들이 많아 보기는 좋았다.

크라코프 광장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총 4만㎡의 광장으로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넓은 광장이다.

주위에는 옛 크라코프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 있다.


광장에는 비둘기가 굉장히 많았고 광장 넓이만큼이나 크기가 커 보였다.

크라코프 구시가지에 이기에오 대학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수학 했고, 2005년에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여기서 수학했고 졸업 후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 교회

광장 앞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

두 개의 첨탑이 멋지고 1222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와 높은 제단이 있다.

주변에는 관광객을 위한 마차, 소품울 파는 노점들이 즐비하고, 거기 아이들과 사진도 같이 찍어 주곤하는 마법사 복장의 남자 모습도 보인다.

바벨성

녹지로 들러 쌓인 바벨탑을 외관으로만 바라 볼 수밖에 없어 못내 아쉬웠다.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며 진기한 보물이 많다고 한다.

지하에는 폴란드왕과 영웅들의 묘소도 있다고 한다.

바벨성 앞의 거리는 다른 거리와 마찬가지로 양쪽으로 고풍스런 건물에 1층이 거의 상가로 쓰이고 있었다.시간을 두고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다른 문화를 엿보고 싶었으나 그시간이 또 문제...


3.
소금 광산

크라코프에서 남동쪽으로 13km 거리에 있는 비엘리츠카는 암염이 생산되어 온 곳으로
1978년유네스코 최초로 자연 및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 비알리카 소금 광산은 약500년이 넘게 존재해 왔다는 것을 11세기에 알 게 되었고
1996년까지 소금을 채취하다가 지금은 중단하였다고 한다

비알리츠카 소금층은 오랫 동안 바다였던 곳이 지층의 변화로
180만년에서 200만년 전에 물이 증발하고 소금만 남아 암염이 되었다고 한다.
소금을 바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우리와는 달리 암염에 의존하던 유럽은 소금광산이
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자원이면서 보물이었다.


소금 바위 속, 지하 100m의 전시장에는 비엘리츠카의 역사와
700년 전당시 소금을 파내는 방법 등을 보여 주는 전시실이 있으며, 소금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조각품과 예배당도 있다.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여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일반인에 개방된 곳은 2.5Km정도라고 한다.

소금광산을 찾은 관광객들은 우선 지하를 378개의 통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깊은 땅속인데도 바닥은 물론 천장 벽 전체가 소금이다.
1493 년에 이곳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왼손에 지구를 들고 있는 조각상의 모습이 특이하다.


.

소금 광산 입구

세계 12대 관광지라고 알려지기도 한 소금 광산의 산뜻하고 예쁜입구.

깜깜한 지하 세계를 들어 가는 입구로 생각 되지 않는다.

아이들도 견학 온 모양.

내려 갈 때는 수십개의 계단을 통해 지하 100m까지 빙글 빙글 내려 가야 하는 데 상당히 현기증이 나는데, 올라 올 때는 30초만에 엘리베이터로 올라 오게 된다.

3시간 정도가 소요 된다.

지하라
연중 17ºc 정도의 기온이라고 하더니 역시 조금 쌀쌀하다.

전시장으로 꾸민소금 광산

어두은 소금 호수를 바라 보며 감상한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아주 감동적 이벤트였다.

지하 공간에는 온통 소금이고 당시의 광부들이 만들었다는 각종 조각들과 광부의 생활상을 그린 모형들을 소금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일생을 갱 속에서 살다 간 광부의 일생을 생각해 보니 순간 우울한 기분이 된다. 누구를 위한 인생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그 안에다 무려1백여 점이 넘는 정교한 소금 조각상을 새기며 소금과 더부러 일생을 마친 것이다. 괴테의 조각상도 보인다.

지하 대 성당

채굴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엄청나게 큰 공간에 대성당도 만들어 놓았다.

대성당 천장에는 소금 결정체로 만들어진 대형 샹들리에가 걸려 있으며, 성당 벽면에는 예수의 마지막 만찬 장면등 각종 조각예술품을 감상 할 수 있다.

지하에 이렇게, 더구나 소금만으로 잘 꾸민 성당이 있다는 데 경탄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한 광부들의 삶의 자세에 고개 숙여진다.

특히 불 밝힌 소금 샹드리에는 일품.소금이 빛의 투과성이 이렇게 좋은줄 미처 몰랐다.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 우리는 타트라 산맥을 구비 구비 넘었다. '동구의 알프스'라고 불리우는 타트라 국립 공원의 부드럽고 목가적인 경관을 눈이 시리게 보며 달려 보았다.

드넓은 해바라기밭, 키가 낮은 옥수수밭 등이 그림같은 마을과 초원 속에 함께 어우러져 차창 안의 우리 마음에 평화를 던져 보내는 듯했다.

역시 흔들리며 차창 안에서 찍은 그림이라 마음에 안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