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8년

내 여행의 변천사(變遷史)

수행화 2008. 10. 18. 01:46

 

나는 내가 결혼하여 아기 엄마가 된 이후로 단 한번도 나 홀로 집 밖에서 자 본 일이 없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쪼르르 친정에 달려가지도 않았으니 친정에 가서 자는 일도 물론 없었고,

화가 나면 쇼핑을 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들 해도 나는 그렇게 충동적인 일도 저질러보지 못했는데 하물며 가족을 두고 홀로 여행한다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융통성이 몽땅 없는 탓도 있다지만 나는 하루라도 집을 비우면서 내가 만든 가정의 질서를 내 자신이 깨 볼 마음이 없었다

일상에 몰입하여 언제나 거기 그렇게 있기에 가족들은 차라리 나의 존재 가치를 잊은 게 아닌가 골똘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기도 했다. 

“그래, 나는 공기와 같다니까. 언제나 함께 있으니까 존재 자체에 무심하고 또 그 고마움을 알 수 없는 공기...공기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라고 마음 속으로 외쳐 보며 홀로 분노하고 하염 없이 슬퍼해 보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아들이  대학 입시 예비고사를 치루고 발표를 기다리던 겨울 어느날.

또래 수험생을 가졌던 내 친구들끼리 수험 바라지로 힘들었던 우리가 우리에게 휴가를 주기로 하고 1박 2일로 수안보 온천엘 갔었다. 참 옛 기억이 새롭다.

친구들과 결혼 후 처음 떠나 본 여행이고, 또 나로서는 밖에서 자 본 최초의 날이라 근심도 있었으며 내심 여간 의미 깊지가 않았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도 그렇게 자지러지게 웃어젖히며 하루를 잘 보냈다. 


휩쓸려 웃고는 지냈지만 버스만 타면 남 달리 멀미가 심한 내가 참으로 오랜만에 시외버스를 탔으니 오가는 길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거기다 다음날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덩달아 아침부터 온천욕까지 따라 하고 시외버스에 올랐으니 돌아오는 버스에서 멀미는 나를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혔고 지옥 입구쯤(?)를 드나들게 했다.

지친 나그네에게 길은 멀고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다고 했다.

“여기가 어디메 쯤일까?,”

뿌연 유리창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하염 없이 문질러가며 달빛 휘뿜한 바깥을 살폈고 기진맥진, 망연자실, 흐르지 않는 시간을 원망했다.


고속버스터미널 광장 찬 공기는 내 뒤틀린 오장을 어느 정도 달래 주었고, 그 차가움에 한동안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온 몸의 맥은 발끝을 타고 땅으로 빨려 들었으며 나는 허물만 남은 거미가 되어 휘적이며 걸었다.

바깥 나들이에 이다지도 적응을 못하는 걸 보니 내 생활이 참 답답하긴 했나보다.

그래서 내 하루의 자유는 이렇게 가혹하게 나를 고문하노라 여기며 서글픈 눈물을 삼켜 가며 병든 닭 비 맞은 꼴이 되어 집 현관을 들어서니 거실 사잇문에 커다랗고 하얀 종이가 포스터처럼 나붙어 있었다.

이게 뭔가!

“Welcome, Thank you for your safe return

딸이 매직펜으로 쓴 문구 아래 남편, 아들, 딸 우리 가족 셋의 싸인이 나란했다.


나의 한 쪽 울쩍했던 마음은 가뭇 없이 사라지고 생으로 정신이 들었고,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며 예기치 못한 환영에 빠르게 감응했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잔잔한 포말이 되어 하염없이 나를 적시고 있었고 그 느낌은 세월이 지나도 별반 바래이지 않고 있다. 아니 바라지 않게 하고 있다.
세 식구가 머리 맞대고 마련한 소박한 이벤트, 마련한 가족들은 그저 조그만 이벤트로 여겼을지 모르나 나에게 어찌 작을 수 있으며 감동을 어찌 빛 바라게 할 수 있겠는가!
감격의 기근시대라 실낱같이 내리는 보슬비도 소나기로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내 아이들과 남편이 내 가슴에 걸어 준 영원한 사랑의 포스터로 여기고 있다.


커다란 달력 뒷면에 쓰여 진 그 환영 플래카드를 내 오래 간직하며 간간이 보곤 했었는데 이사 통에 폐지인양 사라진 모양이다.

그 포스터는 고감도로 스캐닝 되어 내 마음 속 폴더에 빛나게 저장 되어 있음에도 나는 늘 아쉬운 마음이다.


지금은 친구들이랑 도반들이랑 며칠씩 집을 비우며 여행도 하곤 하여 가족을 적이 불편을 주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랐고 모두 가정을 이루어 내 잔손이 필요한 건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내 융통성의 가 없는 발전이며 세월이 올려 준 내 위상(位相)인 것 같다.

며칠 후면 나는 또 일상을 잠시 내려 두고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도반들과 여행을 떠난다.

가족들에게 여러 가지로 미안함를 어찌 두루 말로 다 하랴!


여행 중에 가족의 얼굴을 떠 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현관 앞에 나붙었던 최고의 환영 포스터를 함께 기억한다.
그리고 초심으로 돌아가 진정으로 내 가족에 감사한다.

그리고 늘 기원을 남기고 온다.

나 이곳을 언제인가 우리 가족과 함께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