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1년

밤은 다시 내게 찾아 와.

수행화 2011. 7. 27. 00:06

유난히 길었던 장맛비가 아직도 미련을 떨구지 못한 걸까?
아니면 우리 나라도 아열대 기후로 돌아 서는 것일까?  
한 줄기 맞으면 아플 것같은 세찬 비는 쏴~ 쏴 댓숲에 부는 바람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다.
지난 달 (6.24)  딸이랑 외손주들을 보내고, 내게 이렇게 다시 밤이 찾아 와 빗소리에 귀를 열어 두고 앉아 있게 한다.
아이들 장단에 함께 노닐다가 봄은 지는 줄 모르던 새 지고마는 꽃잎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채.

이 비가 그치면 여름은 그 뜨거운 속내를 드러내고 대지에 김을 마구 올리며 한껏 쪄 오를 것이다.

어디 더웁지 않은 여름이 있을까마는,
외신 보도에 미 중서부와 유럽의 혹서에 생명을 잃은 사람까지 속출했다고 하니,
집으로 돌아 간 딸에게는 막중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인데,
더하여 이렇듯 지글거리는 여름과도 한판 겨루어야할 처지가 되었다.
왁짜지끌, 웅성 웅성, 분주하게 드나들며 숨 돌릴 여유도 없던 이곳의 나날은 이제 순식간에 먼 기억이 되고,  
갑작스런 고요가  주어졌으니 참으로 어색하기도 할 것이다.

며칠 전 웹캠으로 본 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해 보여 애처러웠다.
그러나 어쩌랴! 몸이 간 곳에 마음이 오롯이 따라가 주는 것이 곧은 물길인 것을.  

이제 '맥심' 커피를 시원하게 한 잔 만들어 들고,
녹음을 뒷배경에 두고 햇살 쏟아지는 투명한 낮을 마주해 보라.
얼마나 많은 평화가 거기 뿌려져 있었나!
뒤섞인 시간의 매듭은 호르르 풀릴 것이다.
  
그 유리알같이 맑은 고요에 힘 입어 다채롭고도 들떴던 날들의 기억을 차근차근 접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따금씩 펴 보며 즐거워 할 일이다. 
딸에게 하고싶은 말을 하고 보니 은근히 나에게 타이르는 말같기도 하다.

그 사이 아이들이 쑥 자라 준 것이 너무 장하고 예쁘다.
말도 근사하게 잘 하고, 친구 사귀면서 단체 생활도 잘 하고,
뭐든 잘 먹었으며 우리 작은 영지 기저귀까지 떼었으니...

그 뛰어난 학습효과(?)는 유감 없는 실력이 되어,
엄마가 요모조모 바쁜 틈에도 저희들끼리 썩 잘 놀아 준다니 기특하고도 고맙다.
그런데 유치원 가방 하나씩 둘러메고 친구들 출석 부르기 놀이 하며 아래 윗층으로 뛰는 건 차마 안쓰러운 풍경이다.

아이들 떠난 자리가 저으기 컸던지라 이것 저것 제자리 찾아 보내는 내 일도 꽤 많더니,
얼마간 정돈이 되어 이전의 일상 앞에 서니 왠지 내 모습이 낯설고 어설프다. 
 
뛰고 솟으며 놀던 아이들의 크고 작은 맑은 소리가 빠져 나간 공간은
음소거가 된 장면처럼 싱겁고도 맥이 없는데.
"좀 더 많이 사랑해 줄껄" 아쉬운 마음에 뿌리는 할아버지의 말만 허공에 맴돈다.
그것도 몹시 자주.

영훈이가 가장 많이 쓰던 말.
" 문 좀 열어 주세요."
" 이거 고장 났어요. fix해 주세요"...
우리 도도한 영지의 높은 콧대가 묻어 있는 말.
" 건우는 나 조야(?) 해"...
달포 남짓 다닌 유치원에서 관심을 모았던 모양인데.....어찌 웃지 않으리!
두리번거리며 혹은 서성거리며 이삭 줍듯 아이들이 남긴 흔적들을 주워 담는다.

이번 주말에 누나들은 와서 내내 보낸 동생이랑 고모 그림만 그리다 갔다.
그림도 예쁘게 잘 그렸지만 마음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다시 거세어지는 빗소리에 잠은 자욱하게 멀어져만 가고, 
두런 두런 갈피 없는 생각만 많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