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2년

소설 '남한산성', 웃으면서 곡하는 슬픔

수행화 2012. 7. 12. 01:08

남한산성을 나는 좋아한다.

불현듯 나서기 맞춤한 거리에다 구불구불 산허리 몇 구비만 휘돌아 들면 산은 우리에게 가볍게 품울 내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숲 사이로 잘게 부서지며 떨어지는 빛을 달빛처럼 조금씩 밟으며 걷다 보면 마음의 짐을 잠시 부려 놓는 나를 보게 되기에 더욱 좋다.

그리고 산 모롱이를 따라 그어진 성벽의 부드러운 곡선을 늘 경이롭게 바라보곤 한다.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이 아담하고도 부족함이 없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자태라 여겨져 사계절 남한산성을 좋아한다.

 

그런데 늘 읽고 싶었던  김 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나는 이곳이 우리 조국의 아픈 역사,

그 한 페이지가 잦아 든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1636 12월 청태종이 10만 군사를 몰고 쳐내려 왔으나 아무런 준비 없었음에 쫒기듯 황망히 이곳으

몸을 피했으며, 조정도 따라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나름 항전을 위해 각처에서 구원 오는 군사는 도중에 모두 분리 되고 격파 되었으니, 항전의 동력은 약해져 갔고,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더 이상 백을 곤궁하게 할 수 없는 터인지라 강화론이 대두되었고 성 안은 주전파와 주화파의 논쟁으로 날을 지새우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왕은 웃으면서 곡하는 처절함으로 1637 1 30일 삼전도에 나가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

리는 항복의식의 치욕을 감내함으로서 짧고도 긴 치욕의 남한산성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많은 인원이 인질로 끌려 갔으며 이후 조선은 청에 복속되었으니,  이 주종

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망할 때까지 약 250 여년 간 지속 되었다고 한다.

국격을 지킬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허물어야 했던 허약한 우리 조선의 역사를 새겨 읽음에 애달픔만 쌓였다. 

 

책을 덮고 나는 오늘 다시 남한산성에 올라 성벽의 굴곡을 따라 쉬엄 쉬엄 걸어 보았다.

수치스런 역사의 순간들을 소설과 대비해 보니 성은 커다란 비극의 무대로 보여 애잔함이 가득 느껴졌다.

왕이 건넜을 그 강은 간밤에 내린 비에 불은 몸짓으로 멀리서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시대를 아프게 상기 시켜주는 소설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고,

그런 작가의 기적같은 붓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책 없이 흘러만 갔던 시간의 초조함도,

모든 것을 얼어 붙개 하던 겨울도 한 폭 수묵화처럼 그져지는 활자

에 깃든 공력을 송구하게 읽어 보매 내 가난한 글을 덧붙임은 예의가 아닌 듯하다.

 

그 해 겨울은 일찍 와서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 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 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 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 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 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 눈 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맹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 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동장대 위로 해가 오르면 빛들은 눈 덮인 야산에 부딪쳤다. 빛이 고루 퍼져서 아침의 성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 고였다.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먼 골짜기에서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철저하게 무력했던 우리 역사에 분노했고, 우리는 어쩌면 배움을 잊고 사는 민족이 아닌가 하는 하는 피로감이 밀려 왔다. 근거 없이 자만해진 너와 나, 우리를 생각하며 힘 든 시간을 가로질러 살아 온 우리 선조들의 애환이 내내 마음에 걸려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문장에 홀린듯 경탄하며 집중했던 시간이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