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2년

사진 속 세상 읽기.

수행화 2012. 9. 7. 00:12

 

여름은 내게 언제나 독서의 계절이었다. 모두들 떠나는 휴가를 떠나지 않음으로, 딱히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자제하는 편이이기에, 노는 입에 염불하듯 책장 넘기는 것이 좋다.

 

나이 들어 시간이 많을 때 읽어 보겠노라고 꽂아 둔 책도 많건만 나는 자주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빌려다 본다. 서가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책 제목을 읽어 보기도 하고 정말 기발한 제목들도 많다 이 책 저 책을 뽑아서 훑어 보다가 두어권 씩 빌려 오곤 한다. 

그러다 내 시야에 들어 온 제목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하루

 

무료해지려는 나에게 뭔가 말해 줄 것 같은 제목에 이끌리고, 사진을 담은 페이지가 멋지기에 근사한 사진 구경이나 하며 눈도 쉬어 볼 겸 빌려 왔다.

 리지앙에서 라다크까지라는 부제에 맞춰 베이징을 시작으로 베트남, 태국, 인도를 거쳐 오는 경로를 따라가 본다. 물론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은 없는채로.

 

필통에 연필 열두자루를 곱게 깍아 채운 기분으로 여행 준비를 마쳤으며 달빛에 기대 서서 녹슨 나침반 뚜껑을 열어 보며 길을 나선다는 출발의 장면부터 마력을 발산하고 있다.

 

한번 드르르 넘겨 보려 가져 온 책이었으나 그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

사진은 말을 하고 거기 짧게 붙여진 작가의 시적 감상은 뭇 언어에서 건져 올려 정제된 잠언처럼 정갈하고 서정적으로 닥아오기 때문이다.

 

 세상을 책이라고 한다.

여행을 하는 건 세상을 꼼꼼히 읽는 것이라 말한다.

내면이 빈약해서는 책을 꼼꼼히 읽을 수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

한마디로, 보아도 느끼지 못하고 돌아 온 뒤에도 남는 게 없다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막처럼 흐르는 말의 잔상에 매달린다. 

시간은 어디에나 언제나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으로 공평하게 주어진다.

나의 시간내가 스친 여행의 빈곤한 궤적이 잠시 클로즈업 된다.

작가가 말하듯이 책을 절대로 꼼꼼하게 읽을 수 없는 발 도장 찍기 방식의 여행,

깃발 부대의 왁짜하고 부산스런 후진적인 우리의 여행을 감히 대비 시켜 보니 조금 서글퍼진다.

 

그래도 나는 그 여행을 언제나 소중히 생각하며 순간에 무척 충실하려 애 썼다고 여기고 있다.

기억이 증발해 버릴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가이드 따르랴, 남 사진 찍어 주랴, 그렇게 바쁜 중에도 나는 실 없이 많은 사진을 찍어 대며 바삐 움직인다.

늘 커다란 스크린은 보지 않고 뷰 파인더 안에 들 작은 부분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더러 있는데 빛을 쫒으며 뛰다시피하는 나의 사진 찍기는 거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훗날 비록 내 머릿 속에 정리된 장면과 저장된 사진과의 실체적 간극에 절망할 때가 많을 지라도.

그러나 그렇게 찍은 사진과 짧은 기억들은 여행지에 두고 온 내 시간과 함께 서랍 안 깊은 어둠 속에 묵혀지고 천천히 내 일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내가 서랍을 열어 불러 줄 때까지.

그러다 오래 닫혔던 서랍이 열려 빛을 보는 순간 기억 서랍까지도 함께 열리며 지난 여행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안다. 젊어 있던 환한 기분을 맛본다.

제한적인 기억일지라고 화려하게 부활하며 사진 너머에 갇혀 있던 소소한 감상들을 불러 모은다.

사진이 주는 순 작용일 것이다.

 

 길을 잃거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거든 언덕을 넘어 히말라야로 가자!”

 

가슴을 데우는 뜨거운 말을 이정표 삼으며, 낯선 길을 또박또박 걸으며 한 컷 한 컷 찍어서 이렇게 근사한 책까지 남길 수만 있다면 뉘 아니 짐을 꾸리지 않을 것인가?

진정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찾아 떠나는 용기가 젊음과 멋지게 녹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행은 낭비가 아니라 나를 보고, 내일을 보게 하는 시력의 부단한 증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