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9년

헤르만 헷세(Herman Hesse), ‘정원 일의 즐거움’

수행화 2012. 12. 3. 22:21

“정원의 여름이 그토록 황급히 왔다가 간다는 사실은 놀랍고 걱정스럽다.정원에서는 생명체의 덧없는 순환을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시들고 썩고 사라진 하찮은 곳에서 죽음을 뚫고 새싹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자연의 순환은 단순하고 명징하다. 정원에서 생명체의 순환을 다른 곳에서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지난해의 죽음에서 양분을 얻어 소생하지 않는 여름은 없다, 모든 식물은 흙에서 자라나올 때 그러했듯, 역시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간다.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우리 인간만이 제외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 사물의 불멸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번 뿐인 인생인 양 자기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1908)“

오랜만에 책 한권을 오래 오래 읽었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독백 같은 글이 아름답고 긴 시를 읽고 있는 느낌이라 함부로 페이지를 넘겨 젖힐 수 없는 엄중함이 있어 다른 책이랑은 아주 차별할 수 밖에 없게 한다.
헤르만 헷세의 글에서 느껴지던 순수함, 우리 내면을 한참 들여다보게 하는 깊은 사색적 분위기.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미.......정원 일을 하며 쓴 이글은 헤르만 헷세의 은둔적인 면모가 서정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져서 경의를 보내게 된다..


우리 젊은 날 영혼은 ‘데미안’을 읽으며 열병 앓듯 열기에 휘말렸고, 오래 전에 소설 ‘향수’에서 고향의 산과 호수와 바람과 풀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묘사된 자연에 감탄하며 읽으면서 스위스의 아름다운 마을을 마음에 그려보기도 했었다. 그 자연을 배경으로 그려진 청년의 순수한 모습에 몹시 감명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정원 일을 하며 그는 밤이 낮에게 외치는 소리, 밤은 다시 낮을 부르는 소리, 시간이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즐거움과 순수함과 깊은 사색을 함께 가꾸었기에 100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지금에 우리는 경이에 가득한 마음으로 정원 일의 즐거움을 얘기하는 시인의 말을 소중히 듣게 된다.

고독하게 꿈꾸고 생각에 잠기고 미화하지 않고 고백하듯 글을 쓰고,
사물의 순환에서 넓은 의미의 윤회를 느끼는 시인,
무심히 존재하고 익숙하게 보아 넘기는 작은 것들에게도 
 잔잔한 관심과 진지한 애정을 보내는 그에게는 성자의 모습이 서려 보인다.
잡초와 담벼락 사이에 불쏘시개를 비비고 앉아 있는 시인의 모습.
자기 몸처럼 아끼던 낡은 정원용 칼을 잃어버리고 엄청나게 우울해진 시인.
인간적인 친근함으로 즐겁다.

그리고 그는 정원 일에 도무지 뒤지지 않는 삽화가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 알았다.
정원에 대해, 꽃에 대해, 새에 대해, 나비에 대해 향기에 대해....
영감은 끝을 모르고, 그것은 손 끝에서 부활하여 아름다운 정물이 되어
아담한 화폭에 담겨 있으니 시인의 능력은 끝이 어디였을까 싶다.

“고독하고 의연한 나무들.
나는 나무를 존경한다. 나무는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위대하고도 고독하게 삶을 버티어 간 사람 같다. 나무 꼭대기에서는 세계가 윙윙거린다. 나무 뿌리들은 무한 속에 안주한다. 그사이에서 나무들은 모든 생명력을 끌어 모아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서 분투한다. 그것은 바로 나무들에 내재해 있는 고유한 법칙을 따르는 일이다. 나무들 본래의 형상을 완성해 가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일이다. 아름답고 강인한 나무보다 더 성스럽고 더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나무에게서 서두르지 않는 즐거움을 배운다.“

지친 우리에게 조용하고 품위 있는 언어로 노래해 줄 시인이 그리운 시절이다.
지금 우리는 막말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을 보아도 T.V를 보아도 막말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그악스런 현실에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래서 정원을 가꾸는 사색하는 시인의 여유와 기다림과 부지런함에 한 없이 이끌리고 있는가 한다.

 

< 2009. 6.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