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9년

르노아르 (Auguste Renoir : 1841-1919) 미술전

수행화 2012. 12. 3. 22:30

긴 방학이 다 잦아든 즈음에 아이들과 시간을 맞추어 르노아르 전시장을 찾기로 했다.

세기적인 명화가 우리에게까지 찾아 와서 발품 조금 팔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놓쳐서는 아니 될 일이나 그게 퍽 맘 같지가 않은 데...
아이들 손잡고 가족 나들이 삼아 나서니 아니 즐거울 수가 없다.

르노아르의 그림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고 많이 보아 온 터이나
화가의 손놀림을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느끼며 보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다.
마치 어떤 종교 의식에 참석한 듯 엄숙해지면서 사뭇 경외감이 생기는 것은 나만의 기분인 것인가?
책 읽는 모습, 바느질하는 모습, 피아노 치는 모습, 춤추는 모습, 목욕 하는 모습, 소풍의 모습 등. 이 모든 우리들의 일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 아름다운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화가는 보여 준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그런 무심한 순간들에 행복해 하고, 더욱이 화가는 그 순간에 빛을 투영하여 빛나는 환희의 순간으로 거듭 느끼게 하는 것이라 생각해 봤다.

나는 그림을 다만 아름답다 혹은 불편하다고 보는 지극히 단순한 눈으로만 볼 뿐 문외한이니 어떤 평가도 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난해하지 않고 편안하고 바라 보면 그 환희에 찬 아름다운 기운이 전해지는 이런 그림이 나는 좋다.

특히 시골 무도회’라는 그림이 퍽 인상적인데,  
바람에 치맛자락을 한껏 부풀리며 춤을 추는 여인, 자잘한 꽃이 뿌려진 드레스가 소박하고 아름다운데, 그녀는 우리를 바라보고 해맑게 웃고 있고 우리는 그 웃음에 빙그르르 전염이 된다.
그녀는 훗날 르노아르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르노아르의 그림은 인물화이거나 누드화가 대부분인데 그의 연필화와 풍경화가 또 그렇게 아름다웠다.
특이하게도 많은 여백 위에 살짝 그려진 풍경화 한점이 머리에 쏙 들어 오는 것은,
많은 빛과 색채가 들어 간 다른 그림과 상반되는 청량가 때문인가 한다.
여백도 어엿한 그림이 된다는 걸 알게 함이 거기 있다.

118점 중 70여점이 유화라고 하고, 인물, 누드, 정물과 풍경으로 구분된 그 많은 작품 대부분이 프랑스 오르쉐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소장이고 나머지는 워싱턴 국립 박물관과 일본의 소장품이라 한다.
그렇다면 전시를 위해 한 곳에 모았단 말인가?

미술관 곳곳에서 메모도 하고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열심히 바라 보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행복이다.
이 아이들은 이런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니 물론 문화적으로 잘 익은 열매도 거두리라 싶다.
우리 아이들도 벌써 고흐 전도 보고 보테르 전 도 보았다지 않은가!


그리고 미술관 한 켠에 전시된 천경자 화백의 전시가 있어  두둑한 덤을 선사 받은 기분이었다.
르노아르의 풍부한 붓놀림에 비해 정돈 되고 간결하면서 강렬한 멧세지를 던지는 그의 그림을 오래 오래 바라 보고 싶었다.
원색이 아닌데 원색을 느끼게 하는 어떤 강한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익히 보아 온 꽃과 뱀과 여인과 또 타히티와 인도네시아와 일본과....
르노아르와 비견하고 싶을만치 나는 그녀의 그림이 좋다.
투병 중이라는 그녀의 쾌유를 빌어 보며 아쉬운 마음을 거기 두고 나왔다.

 

< 2009. 9.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