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9년

'체링크로스 84 번지'를 아시나요?

수행화 2012. 12. 3. 22:33

가을에 잘 맞는 간결한 책을 한 권 읽었다.
오직 편지만으로 이어진 20년의 인연, 아주 특별한 만남,

체링크로스 84번지는 런던의 마크스 & 코’라는 한 헌 책방의 주소이다.
1949년에서 1960년까지 20년간 한 도서 구매자와 서점 직원이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특이한 소재의 책이다.
뉴욕의 헬렌 한프라는 작가는 고서적에 취미가 많은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체링크로스 84번지 서점으로 작은 주문의 편지를 띄운다.
서점 직원은 주문에 정중하게 답장을 띄웠고, 그 사연은 이후 20년 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일에 충실할 뿐인, 퍽 평범한 사연으로 자칫 싱거워 보이나 정겹고 따스하다.

짧은 인사와 함께 보내는 도서 주문서.
청구서와 함께 잔액을 일러 주는 성의 있는 상업적 문서.
오고 가는 거래임에 건조할 수밖에 없는 편지는 소소한 일상의 느낌을 정겹게 얹으면서 즐거운 사연이 되어버린다.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무명 작가는 희귀한 책을 간절히 구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책을 받은 기쁨과 고마움을 전하기도 하며 편지를 보내고 ,
런던의 체링크로스 84번지 고서점 직원은 성실하게 주문에 답해 주고, 또 주문자의 취향을 읽어 좋은 책을 준비하고 권해 주는 진지한 편지를 쓰고.....
신뢰와 정중함은 아름다움으로 아주 좁은 행간에도 보인다.

오가는 편지로 미루어 당시의 영국은 전후의 어지러운 상황으로 경제 사정이 나빴던 모양이고, 미국 사회는 물자가 풍부했던 모양으로, 책을 사랑하는 그녀는 퍽이나 인간적이고 정다운 여인이 아니었나 싶다.
책 주문과 함께 통조림, 생필품 등 작은 선물을 보내기도 하여, 서점 직원과 가족이 나누어 먹었다는 정겨운 풍경이 있고, 또 서점 직원이며 가족이 고마움의 답장도 띄웠으니 말이다.  

“금박 찍은 가죽 장정에 금테 두른 책 마구리, 단박에 제 장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혔습니다.”
감사의 편지도 이렇게 해 주는 그녀는 진정 사랑스런 고객이다
그녀는 헌 책방의 서가를 몹시 궁금해 했고 편지를 읽어 가는 나는 책을 사랑하는 그녀의 서가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앞으로의 애서가를 위해 연필로 살짝 줄을 긋겠다는 등등...

세월과 함께 정겨운 사연들도 오롯이 쌓여 가던  어느날  
헬렌 한프는 마크스 서점의 직원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으며 20년 편지의 사연은 끝이 난다.

도엘씨가 복막염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담담하고 잔잔하게 활자를 훑어가던 독자, 나 자신도 도엘씨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는 느닷 없고 충격적인데 하물며 당시의 본인들이야...
  
"혹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 주시겠어요?
제가 큰 신세를 졌답니다.“
그 서점에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부탁도 받게 된다.
그 서점은 이미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편지가 출판 되면서 많은 관심이 모아졌고 그 사연은 영화로, 텔레비전 드라마로, 연극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도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앤서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프트가 주연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고 하니 무명의 중년 희곡 작가는 유명세를 톡톡히 탔나보다. 따스함의 보상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 받은 대화가 좋고,
한 번의 만남도 없이도 인연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은 세월의 두께에서 신선하게 보인다.

 

< 2009. 11. 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