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9년

김 병종의 라틴 기행

수행화 2012. 12. 3. 22:35

“카리브해의 흑진주 쿠바, 하고도 하바나. 치명적 중독성을 가진 도시. 불온한 여인처럼 마초 이미지의 사내들을 향해 손짓 하는 곳, 살사 리듬과 혁명의 구호가 타악기와 랩처럼 공존하는 땅. 해풍에 삭아 버린 페인트조차 표현주의 회화의 화폭으로 전이되는 곳. 하루에 열 두 번 바뀌는 카리브의 물빛. 해 저무는 기나긴 방파제 말라콘. 웃통을 벗은 사내 아이들이 마른 등을 보이며 푸른 파도 속으로 몸을 날리는 대양의 끝. 원색 판넬 집과 나부끼는 색색의 남루한 빨래에서조차 치유할 수 없는 낙천성을 내뿜는 곳. 독한 럼과 시가 냄새와 체 게바라의 흑백 사진과 영혼을 움켜쥐는 반도네온 소리가 뒤엉긴 몽환의 도시....그리고 무엇보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붓 자국이 강렬한 화첩 한 폭을 넘기면 싯귀 같은 말이 바로 눈에 들어 온다.
쿠바와의 대면을 이렇게 짧고 강렬하게 전하고 있다.
음악과 춤, 태양과 카리브는 버거운 현실도, 모든 우울했던 과거도 정열과 맞바꿀 수 있는 티켓이 되는 모양이다.
이방인 헤밍웨이는 가고 풍경만 남아, 그걸 관광 상품으로 도배해서 살아갈지라도 비루하지 않고,
차라리 경건하기까지한 빈한한 식탁을 매일 마주할지라도 탐하지 않으며, 음악과 춤이 있는 한 삶은 영원히 즐거울 수 있다는...
진정 낙천적 삶의 모습을 보게한다.

사이 사이 트로피칼한 색채의 그림이 이채로워 바삐 책갈피를 넘기며 본다.

멕시코 여행은 디에고의 벽화를 잠깐 조우하게 하고,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을 구경해보면서 그 푸른색 깊숙한 곳에는 우울이 출렁이고 있음에 집중한다.
물론 자주 접하지 못하던 화가들의 생애와 일화를 알아 보는 덤이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투쿠만 가 840번지, 보르헤스의 생가 주변이 세계적 문화명소라는 것을,
또 에바 페론이 군중을 향해 연설하던 집이 핑크 하우스라는 것도 귀동냥으로 알아 간다.

“라 보카 거리는 우울을 용서하지 않는다. 햇빛 쏟아지는 날에는 화사한 원색의 거리가, 석양의 시간에는 거리의 탱고가 헛된 지식과 우울한 사색을 흔적 없이 날려 버린다.”
춤을 추는 그 순간, 삶의 비루함이 비늘처럼 떨어져나가던 기억만이 영원히 남아 있을 것같다는 화가의 감정에 동의하고 싶다.
탱고를 추어 볼 일은 내 정녕 없겠지만 댄서들의 경건한 몰입의 모습은 보아 알겠기에.

다시 브라질.
“삼바드르모으 카니발은 나흘 동안 눈을 뜨고 꾸는 황홀한 꿈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일상의 누추함을 견디고, 그날을 준비하며 생의 환멸을 잊는다. 그리고 카니발이 끝나면 그 나흘간의 환희와 열정을 반추하며 다시 일상을 버텨가는 것이다. 돌아올 카니발을 기다리며."
현실과는 그렇게 대척점에 있는 데 축제에 열광할 수 있는 것도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려니.
나는 줄곧 화가의 시선을 따라 가다보니 애달픈 마음도 따라 가고 있는 것을 본다.

“왜일까. 햐얀색은 늘 거울처럼 죄를 되비추는가. 나는 희고 거대한 물의 기둥 앞에서 예기치 못하게 왈칵 눈물을 쏟고 만다. 비늘처럼 붙어 있는 마음속 죄가 씻겨나가기를 기도하며 눈을 감는다...나는 물에 잠기듯 나지막한 오보에 소리에 잠겨든다.“
‘엔리오 모리꼬네’가 작곡한 영화 ‘미션’의  오보에 선율은 우연히 들을지라도 가슴 속을 적시는 서정적 아름다움이 있다.
이구아수 폭포의 하얀 포말 앞에서 어찌 한 줄기 눈물이 없었으랴!
우리는 남이 만든 영화, 남이 만든 음악, 남이 쓴 기행문에 감동만 얹으며 어쩌면 무료한 인생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지구의 반대편 , 지구상에서 가장 긴 나라. 안데스의 땅, 칠레를 넘어. 그림은 또 페루. 라틴의 슬픈 성지 ‘마추픽추’로.
잉카제국의 옛수도 쿠스코를 돌며 화가는 말한다.
“사람들이 세계의 끝을 찾아 오는 건, 다시 돌아가기 위한 것....상처 없는 인생은 없다는 그 뻔한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일상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라고.

긴 여정을 짧게, 호소력이 있게, 그리고 청년다운 감성으로 글을 쓴 화가는 시인이려나?
나의 생각은 공연하지 않았으니, 그는 문학청년 이었으며 이미 시인의 반열에 있다는 것. 어쩐지.
신문에 연재한 글이 좋아 책을 사서 다시 보았던 ‘화첩기행’은 수묵화로 그렸으며, 남미의 화첩은 색채도 텃치도 남미스런 강한 유화의 텃치라 대비가 된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리리만치 건조해 버린 가슴에 동경과 연민을 끄집어 내게 하고, 좀 더 일상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 보라고 일러 주는 것 같다.
우리에게 이글거리는 태양이 없고, 탱고나 삼바가 없을지라도...
  
우리 젊은 날 사치처럼 걸고 있던 음악이면 음악, 영화면 영화, 그림이면 그림을 방금 본 듯이 기억하며, 읊으며 다니는 여행길을 쫒아 본 것으로 한 나절이 행복했다.

 

< 2009. 12.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