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8년

아름다운 겨울

수행화 2008. 8. 25. 14:38
겨울의 긴 치마 끝자락에 함박눈이 소복히 내려 겨울의 기억이 아름다우려 하고 있다.
아니 지난 겨울은 내 생애에 또 하나 아름다운 겨울이었다.
눈을 곱게 얹고 그림이 되어 정물처럼 서 있는 창 밖의 나무를 바라보며
작년 이맘 때 영훈이랑 눈 속에서 보낸 날들을 떠 올려 본다
기억에 시간이 차곡차곡 입혀져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마치 눈에 갇혀 외부와 격리라도 된 양, 공연한 상상을 해가며 모처럼 사치한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다

새벽 병원의 흐린 불빛,
지루한 얼굴의 간호사와 두런두런 출산 수속을 밟고 있던 딸 부부의 긴장된 얼굴... 대견하고 애처러웠던 순간들.
나는 체질에 안 맞게도 강심장이 되어 뛰는 가슴으로 영훈이의 출산을 지켜보았고  
아름답고 늠름한 아기 영훈이는 그렇게 세상과 만났다.
아기는 엄마의 눈물과 함께 세상을 보았고, 그엄마는 또 엄마의 눈물 속에서 태어 났으니.
우리는 부모에게 진 빚을 자식에게 갚는 이상한 계산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나 할까?

천지는 눈 이불을 덮었고 달빛은 그렇게 맑은 얼굴로 밤을 푸르게 조명하고, 그소박한 푸르름은 세상을 부드럽게 다독이고 있었다.
그 그림이 된 풍경에 영훈이를 재우며 서성이던 밤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밤과 그리고서 휘뿜하게 밝아 오던 새벽의 보랏빛 서기를 오래 오래 기억할 것이다.  

우리를 설레게 하던 영훈이가 아기 장부(?)가 되어 돌아 와서 살짝 겨울을 나고 갔으니
아름다운 겨울이었노라고 말 할 수 있으리.

지금도 거실 한켠 누나의 빨간 소파를 바라 보면 성실하게 열중하며 온 마루를 밀고 다니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잠시 즐겁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팔을 한껏 들고 통 통 통 걸음마를 하며 달려 오던 모습에서 팔을 내리고서도 익숙하고 세련 되게 퉁퉁 걷기까지...
한팔을 들고 열띈 얼굴로 장황하게 토해 내던 연설에 우리 모두 흥분했던  시간들...

"엄마"를 유도하며 "엄마"를 불러 보면 백발백중 돌아오는 반응 "아빠".
부지런하고도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훌쩍 즐거운 저희 집으로 갔건만 아쉬움은 곧 그리움으로 자리 잡아버렸다.

우리의 삶은 여러 마디의 주기가 있어 변화를 거듭하는데
아이만큼 우리를 단숨에 성숙하게 하고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선물이 또 있을까?
내게 과분한 선물에 나는 언제나 감격하고 감사하며, 아이를 소중히 거두는 나의 아들, 딸을 사랑한다.

2008-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