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2년

"너무 추울 땐 추억에 젖으세요"

수행화 2012. 12. 6. 00:50

폭설이 내려 외출을 마다하고 눈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갇혀 있다는 것이 때로는 아늑한 기분에 젖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 시간이다.

 

신문 기사 한 줄이 눈에 들어 온다.

너무 추울 땐 추억에 젖으세요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이 감정은 실제로 몸도 따뜻하게 하여 추위에 좀 더 잘 견딜 수 있다는 것. 다소 추상적인 개념을 영국의 어느 대학 연구진이 실험을 통하여 입증해 보인 논문이 국제학술지에 실렸다고 한다.

 

그렇다.’

오늘처럼 눈발이 날리는 휘뿜한 날에는 따뜻한 기억을 불러보자.

지난 주에 멀리 저희들 집(?)’으로 떠난 아이들(영훈. 영지)의 지문이 잘 찍혀있는 유리를 닦으니 통통 튀던 목소리들이 분주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눈 비비고 나오면서 던지는 말, “나 자면서도 할머니 보고 싶었떠!”

기분이 좋으면 때때로 던지는 인사말, “나 할머니 너무 좋야 해(좋아해)

감정이 풍부하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기술이 남다른 우리 영지는 이렇게 따뜻한 말도 할 줄 안다.

두통이 나서 힘이 들던 어느 날 밤 굿 나잇하면서 유난히 오래 꼭 끌어 안고 있더니 하는 말.

할머니가 영지 때문에 힘두워서(힘들어서) 아프니까 내가 이렇게 허그(hug)해 주는 거야!”

그래서 그 작은 팔에 힘을 주어 그렇게 끌어 안았나 보다.

불과 3년 전에 울음 소리도 가냘프던 아기가 이렇게 감정이 자란 것일까? 경이롭기만하다.

이 아이는 자라,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될 것이리라 혼자 생각해 본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 딱 서서 친구에게 하듯이 내게 던지는 자기 의견,

할머니 여기 이렇게 문이 있으면 너무 예쁘겠지?”

마치 접시를 운반하듯 양손을 위로 받쳐 들고 딱 서서 하는 양이 여간 어른스러운 것이 아니니  

이게 아기가 할 수 있는 생각인가? 눈썰미 약한 어른이 울고 갈 일이다.

 

여권 관계로 일정이 하루 늦어져 다시 집에 들어 오게 되면서 하는 말은 또,

할머니, 우리는 못 갔떠(못 갔어), 아저씨가 힘드워 해서 못 갔떠. 그런데 나는 할머니가 나갈 때 모자 쓰면 예뻐아니 제법 상황을 아는 듯이 힘든 표정을 짓더니 그 와중에 무슨 모자 얘기, 예쁜 얘기가 따라 붙는지…못 말리는 이 예쁨 사랑.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 너 커서 뭐 될래?" 

    

언니에게서 물려 받은 한복을 치마만 입고 어깨를 드러 내고 있기에 추우니 저고리 입으라고 성화를 대면 참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렇게 해야 두레스(드레스)는 예쁜 거야

!! 진정한 패셔니스타, 영지! 빨간 한복 치마를 파티드레스로 입고 다니는 센스...

 

지적하고 가르치는 걸 조금도 놓치지 않으니, 집안의 사감 선생? 아니면 잔소리꾼?

외출 준비하면서 오빠는 빨리 양말 신고하는 나에게 가만히 다가와 지적한다.

오빠는 영지 오빠니까 할머니는 영훈아 빨리 양말 신고해예지(해야지)”

샤워하고 타올을 감고 나오는 걸 보고 나는 또 엄마는 파쟈마 가져와야지했더니

왜 또 이러실까 하는 표정으로 좀 더 또박 또박하고 찬찬하게,

엄마는 나 엄마니까 할머니는 윤경아, 파쟈마 가져와야지해예지

하면서 내 목소리까지 흉내내며 타이른다.

아이들의 감정은 키보다 더 쑥쑥 자라니 웃을 일이 끝이 없다.

 

집에 들어 서는 아빠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당장 달려가서 한 마디,

아빠는 할아버지테(할아버지한테) ‘다녀왔습니다해예지!”

시야가 넓기를 한이 없어 온 집안 일에 다 참견이고, 거슬리면 단숨에 지적한다.

 

북쩍이던 시간들은 이제 기억 속에 갈무리 되어 이따금 웃게 할 것이다.

눈이 쌓여 오가는 차들이 모두 엉그엉금 기어 가고 더러는 옆으로 뒤로 길게 미끌어지기도 하고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 주기도 하는 바깥 풍경... 나는 또 이광경을 무척 아까워 하며 보고 있다.

아이들이 보면 얼마나 즐거워할까 하는 마음에

 

쉬엄 쉬엄 유리를 닦으며 한 눈을 팔고 있는데 카톡”,”카톡두드리는 소리.

그렇게 예뻤던 세영이, 이제 큰 아기가 된 세영이가 눈사람을 만들어 내게 보내 주고 있다.

저 키만큼 큰 눈 사람을 안고 찍은 사진이다.

세영아, 눈도 크고 눈사람이 둥글둥글 너 닮았다고 답글을 보냈다.

 

촘촘하게 살면 세월이 더디 간다고 한다. 무료할 사이가 없는데 그래도 내 시계는 바삐 돌아 간다.

따뜻한 기억을 모아 보니 몸도 따뜻해진 것일까? 아까 먹은 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진득하던 두통이 조금 잦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