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3년

유 안진 산문집. "상처를 꽃으로"

수행화 2013. 5. 10. 00:28

 

도서관의 서가를 오가며 책 구경을 하다 보면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 그림이 마음에 드는 책, 그리고 새로 출간되어 깨끗한 책에 주로 손이 가게 된다.

유 안진 씨의 책이 유난히 깨끗해서 보니 올 초에 출간된 신간이고, 꽃무늬 보자기가 살푼 놓여 있는 표지 사진도 좋고 책이 예쁜데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니 행운이라도 잡은 듯 선듯 빌려 왔다.

그래서 나는 읽으려고 쌓아 둔 책이 일곱 권이 되어버렸는데, 부담은커녕 오가면서 한번씩 쳐다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소한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다. 

 

돌아와 앉은 고향집 아랫목 같은 정겨움과 편안함으로저자는 산문 집을 묶었다고 했고, 나 또한 저자에 정겨움을 느끼며 편안하게 읽었다.

 

외로운 사람에겐 자기 방이 필수이고, 또 여러 개의 침대도 필수일 것 같다.

잠들지 못할 때 뭔가를 읽고 끄적거리기에 편한 침대와, 엎드려 멍청해질 수 있는 침대와 꿈꾸거나 상상하기에 좋은 침대와, 기다릴 수 있는 침대와, 만나서 더불어 놀 수 있는 침대와, 헤어져 홀가분하고 편안해지는 침대 등등, 외로운 사람에겐 침대가 많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더 외로운 사람에겐 많은 침대보다는 많은 베개가 더 필요할 것 같다.

…….

엎드려 턱 받칠 수 있는 베개, 돌아 누우면 등을 받쳐 줄 베개. 잠이 안 올 때 벌떡 일어나 발길로 몇 번이고 걷어 찰 수 있는 베개.

…….

밥 숟갈락 보다도 훨씬 필수적인 생필품으로서 베개는, 밤이 긴 가을부터 더 외로운 사람에게 특히 많아야 한다.”

 

저녁 뉴스 끝나기가 무섭게 TV를 끄고 내 방에 들어 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 놓고 꼬물거리며 보내는 밤시간을 나는 너무 좋아한다.

내 안에 가두어진 나를 위해 헌신하는 시간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딱히 하는 일도 없이 뭔가를 읽기도 하고 망상을 피우면서 공연히 잠을 설치는 날이 많은 나에게도  

침대와 많은 베개는 필수품이어야 할 것같다. 

 

메밀과 시인은 둥근 세모꼴에서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 잡초처럼 자라고 흉년의 구황작물이라는 점이 시인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특별하다.

시인이 충분히 존중 받지 못하니, 흉년이 들어야만 비로소 제 값을 다 할지 모른다고 시인답게 불만을 표시한다.

커피 한잔 마시기는 쉬우나 시집은 쉬이 사게 되지 않는 현실이니 그 말에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그러나 영원히 청춘에 머무를 것같은 시인을 우리는 존중하고 부러운 마음을 가진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고, 풍부한 상상력과 감수을 가졌으며, 그리고 인생에서 신선함을 샘물처럼 무한히 길어 올리는 자는 영원히 청춘이라고 말하듯이, 

사물을 늘 새롭게 보고,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관찰하며,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는 시인의 날은 언제나 청춘일 것이니  그리 억울할 일은 아닌 듯도 하다.

 

십원자리 동전을 주우면서 다보탑을 주워 횡재한 기쁨을 가지며, 그 무엇을 보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는 미륵 반가사유상의 시선을 꿰뚫어 보는 남다른 통찰력이 시인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조부, 증조모, 외증조모,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고 한다.

그 사랑은 작가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여 큰 시인으로 자라게 했으며 전 생애를 지배하는 정신적 자산이 된 것같다.

 

내공이 깊은 시인이 담백하고 잔잔하게 일상의 감상을 쓴 글이라 친근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