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3년

'기나 긴 하루'

수행화 2013. 5. 25. 14:00

박 완서 소설집 기나 긴 하루'

 

봄은 아지랑이를 만나지 못해도 아련하고 행복한 계절이다. 

꽃이 천지를 흔들어 봄을 깨우더니, 난분분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철쭉이 화려하게 풍경을 싹 바꾸더니, 

이제 순번을 기다렸다는듯이 팝콘처럼 부풀다 하얗게 팍 터지는 꽃이 멋지게 봄을 배웅하고 있다.

이팝나무라고 하는데 이름까지 예쁘다.

 

이 어여쁜 계절은 책 읽는 나를 질책하는 것같다.

가벼운 책을 찾아야 하는 이유라면 이유가 된다.

 

박 완서씨의 글은 언제나 작중 인물에 쉽게 몰입이 된다.

때로 나의 모습이고, 우리네 일상이며 이웃집의 애환이 사진이라도 찍은듯 활자로 선명하기 때문이다.

 

2011년 박 완서씨는 81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사후 작가의 글을 엮어 낸 것이라고 한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빨갱이 바이러스’ ‘갱년기의 기나 긴 하루’, ‘카메라와 워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닮은 방들’ 등.

 

지금은 멀리 나와 버려 긴 그림자가 된 지난 시간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전쟁을 겪으며 마음이 자라고,

남편과 자식을 차례로 잃어야 했던 작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설이고 또 우리가 살아 낸 세월의 반추이기에 역사 페이지같은, 그래서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라는 표현은 바로 가슴에 와 닿는다.

  

전쟁과 이념이 갈라 놓은 가족의 불행이 빨갱이 바이러스에 무섭게 그려져 있으며,

 

'카메라와 워커'에서 조카를 키우는 고모는

그저 휴일에 카메라를 메고 여자 친구와 야외에 나가는 정도로 여유를 즐기며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기를 바라면서

조카를 이과에 진학하게 하였더니 고속도로 현장에 취업이 되어 집을 떠나더니 소식이 없다.

연락 두절 된 조카를 찾아 나선 고모는 검게 그을리고 몰라보게 수척해진 조카에게서 원망의 말을 듣는다.

나는 더 비참해 지고 싶어. 그래서 고모나 할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술이니 정직이니 근면이니 하는 것이 결국엔 어떤 보상이 되어 돌아 오나를 똑똑히 확인하고 싶어….”

 

영동 고속도로 건설 당시 열악한 건설 현장에 투입된 인원은 몇 달씩 소식이 두절되곤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어 버렸고  우리는 수려한 산세를 바라 보며 무심히 달리고만 있지 않은가.

이제는 소설 속에서 한 젊은이의 절규에서 이 땅의 척박했던 삶을 기억해 보는 시절이 되었다.  

 

갱년기의 기나 긴 하루

후식 자리의 화제는 단연 아픈 얘기였다. 고혈압, 당뇨병, 불면증, 건망증, 난청, 퇴행성 관절염, 심지어 요실금까지, 병자랑을 하면 한도 끝도 없고, 거기 맞는 의사나 병원, 민간 요법, 약초, 사기꾼 등 화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모든 증세는 갱년기 현상으로 돌리는…"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버린다.

모습이 그렇고, 의식이 그렇고, 나아가 우리의 관심사, 자랑꺼리마저 변화시킨다.

마치 우리의 대화에 끼어 들어 녹음이라도 해서 틀어대는 것만 같아 탄식하고 키득거리며 책장을 넘기니,

이것은 우리의 자화상이며 현주소이니 송곳으로 찔리는 기분이 들어 방관자적 독자가 되지 못한다.

작가는 타고 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 것이다.

 

하루가 긴 것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이 아니다. 

권태롭고 저으기 우울하고, 내 의지와 달리 시간의 물결에 실려 떠 내려 가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리고 그 물살은 안타깝고 초조하게 한달을 금방 삼켜 버리기 때문이리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이름을 남기라고 했거늘

돌아 가신 분의 글은 영원히 살아 우리에게 읽히는 것이니, 죽음은 물리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