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3년

'그리스인 조르바'

수행화 2013. 7. 10. 17:19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이름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소설.

1942년에 세상에 내 놓은  그리스인 조르바’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굳이 스토리를 쫓지 않고 있는 나를 알아챘다.

스토리 너머 배경에 깔려 있는 깊은 사유의 음성에 깊이 귀 기울이게 되고,

감각적인 표현들, 섬세한 결을 가진 아름다운 표현들에 내 시선이 순간 순간 붙잡히기 때문이다.

 

책벌레인 주인공은 크레타 해안의 폐 탄광을 운영해 보기 위해 길을 떠난다.

자기 내부의 혁명을 위해, 책벌레의 세계에서 노동자, 농부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 위해 크레타를 향한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게 되고 함께 떠난다.

 

붓다의 정신 세계에 깊이 침잠하였으며, 붓다와 하나 되기 위해 씨름을 하던 책벌레인 주인공과

정제되지 않은 야만의 얼굴을 가진 조르바, 원시적 감정을 삶에 꾸밈 없이 적용하는 조르바와는 대비가 극명하다.

 

원초적이며 극단적인 자유인, 조르바와 함께한 시간들, 크레타의 늙고 가련한 여인들, 부조리와 종교적인 모순 속의 교회와 수도자들, 크레타의 나날에서 주인공은 자기 성찰이 깊어 간다. 

 

조르바를 통하여 자기가 갇혀 있던 세계가 생명 없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전에 그토록 자기를 매혹시켰던 시편들까지도 한편의 지적인 광대 놀음이며,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는 진공 속의 언어로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그리스도교의 맹목을 조르바를 통하여 말하고 있기도 한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태초에 이세상에 나타났던 사람들의 경우처럼 조르바에게 우주는 진하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갔고 바다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원초적 감각의 조르바의 곁에서 오히려 작가는 부처의 세계에 빠져 들어 간다. 

 

내 눈은 희미한 햇살 속에서 말렸다가 풀리곤 하는 담배 연기를 쫓았다. 내 마음은 연기와 함께 감겼다가 천천히 푸른 꽃다발 속으로 사라졌다.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나는 논리에 의존하지 않고도 세계의 기원이며 생성이며 사멸을 확연히 확연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기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수, 사라지는 연기의 나선은 푸른 열반의 정토를 찾아 가는 생명이었으리…”

   

부처는 나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상징으로 가득 찬 푸른 댕기가 내 뇌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대기는 빠른 속도로 풀려 나왔다.

나는 따라 잡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썼다, 모든 것은 간단, 극히 간단했다. 쓰는 게 아니라 받아 적었다.

 연민과 거부와 대기로 이루어진 전 세계가 내 앞에 나타났다. 출가, 금욕생활, 포교, 해탈,…

…..영혼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정신이 되었으며, 정신은 무가 되었다…..”

 

조르바와의 사업은 실패로 끝이 나면서 결국 돈과 사람과 그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올려 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면서 뜻밖에도 해방감을 맛 보았다는 것이다.

  

실패를 통하여 마침내  육신을 비우고, 정신을 비우고, 가슴을 비우는, 모든 것을 비우라는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환희의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외부의 파멸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순간일 수 있다는 발견은 실로 엄청난 해탈의 경지일 것이다.

  

부처님의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의 대화 장면의 인용에서부터 연기법의 이치를 알아 가려하는 불교의 깊은 정신세계에 들어 마침내 부처를 만나고 책벌레로서 원고를 완성하게 된다.

 

정신은 자신을 원료로 이루어진 진흙이며, 이 정신에 뿌리 내리고 수액을 빨아 올릴 토양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 자신을 비운 인간 그 자신이 공인 부처가 그 최후의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조르바라는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영혼과, 완성된 자 부처를 만나기 위한 사색의 길에 선 주인공의 영혼이 씨실 날실이 되어 직조한 절묘한 깨달음이 작품을 이루게 된 것이라 생각해 본다.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을 다 품은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물은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진정한 행복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함께 던지는 것에서 우리도 어떤 것이 진정 우리 키에 맞는 행복인가 곰곰히 고민해 보게 한다.

불교적 정신세계에 깊이 몰입한 작가 안의 외침을 다시 새겨 보면서.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조르바는 실존 인물이며, 카잔차스키는 자서전에서 조르바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와의 잘량을 돌이켜 볼 때 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가구가 거추장스럽다고 치우고 나면 우리의 머리는 다시 그 자리에 더 새로운 것을 채우려는 반사적인 관념을 갖게 됨을 안다.

하물며 우리의 정신과 가슴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수행을 거쳐야 하는가 짚어 보는 계기가 된다.

채우려 들지 않는, 삶이 비움으로 점철된 조르바를 통하여 작가는 많은 것을 말하려 한다. 

저속해 보이는 삶에서 지혜를 건지는 작가는 실로 위대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