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8년

박완서의 단편 '그여자네 집'을 읽고

수행화 2008. 8. 25. 14:44
          <그 여자네 집>

                           김용택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고샅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 또는 골목 사이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한컷 한컷이 연결 되어 영화가 되듯이,
멋진 글도 지면을 떠나 우리 머릿속에다 잔잔한 영상을 만든다.
그런데 그 잔상이 오래 간다, 작가의 찬란한 능력이다.
오랜만에 박 완서씨의 단편 한권을 읽었다. “그 여자네 집”

김 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읽고 자기 고향 마을을 시화한 것 같아 깜짝 놀랐고,
거기 아리따웠던 젊은이의 사랑을 떠 올리며 쓴 단편이라고 했다.
그녀의 고향은
개나리로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아래에는 꽈리가 자생하고
행촌리로 불리울만치 살구 나무가 많은 마을.
살구가 꽃을 피울 무렵이면 들판에 자운영과 오랑캐 꽃이 무리지어 피어나고
찔레꽃이 달밤처럼 숨가쁘게 그윽한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묘사 했다.
작가는 섬세한 수채화의 기법으로 살구꽃 피는 마을을 그려 내고
초가지붕을 노랗게 이어 가는 가을을 그려 넣고, 거기 꽈리가 붉게 초롱처럼 매달린 개나리 담장으로 포인트를 주어 가면서...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맑디 맑은 개울에 줄이나 칡넝쿨로 엮어 만든 흙다리의 질박한 풍경까지 더해 가며.

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나지막한 마을의 그림을 정감으로 써 내려가니 이야기의 본질을 떠나 그 애잔한 풍경에 그리움을 불러 보며 짧은 글을 읽게 된다.

시의 배경과 너무 흡사하게 아름답던 고향 마을에 살던 어여쁘던 그여자 곱단이와
문학 청년이던 만득이와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은
시대가 아프면서 만들어 낸 격렬한 회오리에 쓸려 이제는 다만 타인의 가슴에 한 가닥 애절함으로, 회색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노라고 하는 단순한 주제이다.

관옥같고 총명한 만득이랑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어여쁜 곱단이.
양가의 처지도 기울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아 소박하던 마을 사람들이 기특해하고 귀여워 하던 천생연분이던 그들 앞에 버텨 선 운명은.
만학으로 읍내에 유학해 있던 만득이는 졸업 하자마자 일병에 징용을 가고,
곱단이는 정신대 차출을 피하느라 남의 재취로 부랴 부랴 시집을 가면서
자기의 의지와는 터무니 없는 인생을 살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을의 화초요 꿈이던 그들은 모든 이에게 안타까움을 안겼고
이후 곱단이네 마을은 분단으로 인하여 북쪽이 되고 만득이네는 남쪽이 되었으니
역사가 그들에게 안겨 준 시련치고는 너무 가혹한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소박한 우리네 삶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마구 흔들어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신이 아닌 어떤 절대적 힘에 의해 시대를 살아 줘야하는 소모품이라도 된단 말인가?

전쟁을 몸소 겪었기에 작가는 시대적 아픔을 어떤 사명감으로 써 내려 가는듯하다.  

단편 선집의 그 나머지 작품들에서도 우리의 자잘한 일상과 애환은 작가의 손끝을 통하면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것처럼 문제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늙은 엄마의 애인, 치매 엄마의 가출에 얽힌 자식들의 이해, 이민자의 애환과 회귀하고픈 인간의 잠재 의식,,
J-1비자 앞에 한 없이 힘 잃은 우리, 망가진 자기컴퓨터 얘기 하며...
이 시점에 우리가 알고 겪고 있으며 이웃이 겪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조근 조근 듣고 있는 느낌이다.  
곱지 않은 우리의 자화상을 한참 보고 있다 보니 슬프고 부끄럽고 쓸쓸하고 너무 공감이 가기에 실실 웃음이 나는 글들이다.
세상살이의 애환을 딱 오려내기 하여 책갈피에 붙이기 한 글같이 선명하다.
나는 이런 작가를 존경한다.

2008-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