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4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사라져 버린 과거를 찾아서.

수행화 2014. 12. 31. 01:05


201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파트 모디아노 (Patrick Modiano)의 소설.
그의 여섯번째 작품이며 대표작이라고 하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다. 자신의 기억을 송두리채 잃어버린 기억 상실자가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 자신의 과거를 찾아내가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기억이라는 주제를 통하여 붙잡으려야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환기시키고, 나치 점령하의 파리의 생활상을 섬세하게 그렸다" 라고 노벨상의 선정 이유를 말한다. 주인공 '기 롤링'은 탐정이며, 기억의 편린들을 주워 담으며 퍼즐 맞추듯 과거를 재구성해 나간다.
......나를 알았던  그 어떤 사람,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아직도 살아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와 함께 사라졌던 전쟁 이후의 어두웠던 경험들, 악몽의 시간들이 함께 나타 난다.

분량이 많지 않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며, 기억을 찾아 가는 과정이니 더러 스릴도 있고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시작부터 빗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처럼 사라진 과거의 모습이 그렇듯 글도 안개 속을 헤매듯 몽상적이어서 독특한 신비감까지 주고 있다. 

낡은 과자 상자에서 나온 빛 바랜 사진들에서부터, 어떤 명함, 누군가의 거주민증, 장례식 초청장, 사교계의 신사록 한 페이지, 지금은 바뀌어 버린 그 옛날의 전화번호, 출생 증명서 등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연관지어지는 사람과 장소와 어떤 확실한 증언들이 주어지면서 조금씩 기억은 짜 맞추어지고, 전후의 어둡던 프랑스 사회, 이를테면 밀수가 성하고, 가짜 증영서가 등장하는 등 1940년 대의 사회상이 비추어지는데, 혼란 속에서 인간을 속이고 배반하는 이웃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빌드메르의 조각조각난 말들, 루비로사처럼 분홍빛으로 번쩍거리는 이름, 올레그 드 브레테처럼 희끗한 이름, 그리고 그밖에 손에 잡히지 않는 사소항 일들 -― 목 쉬고 거의 들리지 않는 빌드메르의 목소리 같은 ―이다.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 준다"


얻어진 단서, 주어지는 정보로 완벽하게 과거가 구성되어 가는 것에 대한 궁금증보다, 깊은 잠에 들었던 과거의 추억들과, 정들었던 장소와 만나는 순간의 낯설고 몽롱한 기분에 더 마음이 쓰인다. 마치 나 자신도 조도가 낮은 불빛 아래 책을 보듯 휘뿌연 분위기에 빠져 든다. 정녕 알지 못할 미래와 같은 과거라니!!

마침내 '므제브'라는 지명. '페드로 멕케부아'라는 이름. 링컨 호텔의 카드, 기록 사항..........꿈에서 깨고 난 후에 꿈 조각을 모아 보듯 서서이 과거는 모습을 드러 낸다. 그러나 끊임 없이 의문은 따라 다닌다.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해 보이는 자신이, 무엇때문에 이미 끊어진 과거들을 다시 맺고 오래 전부터 막혀버린 통로를 찾으려 애쓴단 말인가? 

"몇개의 조각들......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인 모양이지요.....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 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사라져버린 사람들은 긴 소리의  메아리들을 남긴다. 지나 간 뒤에도 진동하고 있는 그 어떤 울림이 있다. 주인공은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에 귀 기울인다. 그 파동들이 때때로 먼 곳에서 때로는 때로는 세차게 자신을 뚫고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 태어났을 적에 내가 얻은 그 이름을, 내 생애의 가장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불렀던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환기시켜 주었던 그 이름을 스스로 되뇌어 보았다. 페드로."

그리고 자기가 몸을 담고 숨 쉬었을 공간을 찾아, 그 옛날 저녁 나절을 회상해 보려 하나 과거의 모습을 만날 수 없어 헛되이 애를 쓰기도 하고, 어느 순간 마음 더 깊은 곳에서 덜컥 소리를 내며 어떤 불안감이, 이미 경험한 일들이 섬뜩한 기분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자기라고 생각되는 존재를 불러 내어 바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되뇌어 보는 것이 참 애달프다. 

과거는 그저 낯선 현실이 되고, 나에게 돌아와 내 존재의 뿌리가 되어 주지 못한다니............나라는 사람은 실루엣에 불과하다는 것에 깊은 고통이 보인다. 하나의 흔적, 또 하나의 흔적, 그렇게 망각 속에 깊이 빠져 버린 과거를 건져 나가는 것을 바라 보면서, 우리의 과거란 그렇게 하나의 조각들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의식 저 아래 흩뿌려져 불러 주기 전에는 나오지 않는 망각의 강에 빠져 든 채로..... 

아울러 작가의 말에 깊이 깊이 공감한다.
 

"그 어떤 남자는 사십년 동안 바닷가 수영장 가에서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의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만 장의 바캉스 사진을 뒤쪽 한 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왜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 모두는 그'해변의 사나이'들이며, 해변의 모래는 우리의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그 누군가의 사진에서 사라지듯, 우리도 홀연히 사라질 것이며, 세상은 아무도 그 부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변함 없이 영위되는 것임을 곱씹어 본다. 온전한 과거의 기억을 가진 우리는 마치 기억 상실자처럼 어제를 망각했으며,  오늘을 흘려 보내고, 그저 저녁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몹시 정제된 언어를 꼭 필요한민큼만 말하는 화자는 그러나 참 차분하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든다. 절제된 언어로 하여 후다닥 읽어 치울 글이 아니라는 걸 책을 덮고 나서 더욱 알게 된다.
 

" 건물의 전면들, 인적이 없는 거리들, 황혼녘에 보초를 서고 있는 실루엣들이 옛날에 익숙했던 어떤 노래나 향기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같은 시간이면 자주 꼼짝도 하지 않고 여기 가만히 서서 감히 등불도 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엇이가를 노리듯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평행선을 가로막는 그 산들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없다.......나는 전나무 향기가 배어 있는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는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감을, 풍경에서 오는 어떤 정밀한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 충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들 몸짓과 우리들 생명의 메아리가, 우리들 주위의 성당 지붕위에, 스케이트장과 묘지에, 골짜기를 뚫고 뻗어 길이 긋고 있는 더 어두운 윤곽 위에 가벼운 송이로 떨어지는 저 솜 같은 눈에 의하여 질식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주인공의 감정은 절제 되었으며 거리며 집이며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는 곳에서는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스케치 한 자락만을 남기는 듯하여서인지, 내가 몹시 고급한 글을 읽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비단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화자는 아마도 그의 마지막 주소 
부티크 옵스퀴르 가(어둠의 상점들의 거리) 2번지, 로마 (이탈라이)
엘 찾아 가 볼 것이다. 그래서 그 과거의 퍼즐은 완성될 것이다. 

쉬운 글이 아니어서 모처럼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덤으로 이런 저런 연상들을 해 보게도 된다.과거 나는 누구였던가, 누구의 기억에 남아 있으며, 어떤 메아리를 남기며 살아 온 것인가? 시간의 저편과 이편이 분리된 삶은 아닌 것이련만 거기 낯선 나의 모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