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5년

나의 연중 행사.

수행화 2015. 1. 2. 01:01

매일은 똑같은 날이 아니라는 걸 새해 아침에 더욱 알게 된다.
어제는 묵은 달력 속에 담겨 과거로 편입되고 오늘은 신분이 조금 엄격한 또 다른 날의 느낌이다. 새 달력 단정한 칸 속에 든 하루 하루들을 비라보며 그 모양새처럼 반듯하고 일목요연한 나날을 보내야 하리라는 나와의 약속은 잊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달력 여럿에다 공손하게 연중 행사, 그것도 제삿날을 제일 먼저 기입한다. 

기입해 둬야하리만치 횟수가 많기 때문이다. 4대에 8위의 기제사, 설 추석 명절, 그리고 묘사까지 달력마다 써 두는 일도 어지간하다. 얼마전 아들이 어머니 아버지 결혼 기념일을 축하한다며, 그것도 43주년이라고 딱 지적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제사가 연중 행사의 최우선 순위에 있는 세월 40년을 살아왔다는 걸 실감했다. 나의 반생을 넘어 선 참 두꺼운 세월이다. 그래서 제사에 관한 한 나는그렇게 할 말이 많은 사람 중의 한 명 일 수가 있다. 다시 도리켜 보아도 그 많은 제사를 강골도 아닌 내가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일도 어마어마했고, 온갖 설, 설 설들이 설설 끓는 제삿날의 풍경을 무심히 견딘다는 것은 거의 살인적인 인내였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하여 죽은 자가 산 자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젊은 시절 이 의문에 맞닥뜨려  나는 끝 없이 괴로워하고 절망했으나, 그것은 다만 머리가 저 혼자 하는 일일 뿐, 나는 묵언 수행자처럼 묵묵히 봉제사를 했다.


우선 나는 결혼 후 얼마간 생일이 없었다. 며느리 생일이란 시댁 풍습에는 없는 분위기였다. 나의 친정 어머니는 생일을 맞은 자식이 객지에 나가 있어도 잊지 않고 생일을 챙기셨고, 밥을 고봉으로 담은 간소한 생일상을 한쪽에 차려 놓고 손을 비비며 자식의 안녕을 비셨으며, 우리는 주인공 없는 생일상을 잘 얻어 먹었던 터였는데 말이다. 그랬던 나는 결혼 후 졸지에 생일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심정적으로 위축되고 비감한 마음이 들어 홀로 분노하기도 했다. 내가 들먹이지 않으니 남편은 모르는 일이 되고, 어린 아기더러 뭐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은 마음 속에 나를 위해 장미원을 가꾸었는지는 몰라도 꽃 한 송이 사 오는 로맨틱한 일상은 우리 삶에는 없는 장면이 되었다. 제사가 삶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그리고 며느리는 밥을 상 위에 올려 놓고 먹어서도 안된다는 말들을 해대던 참으로 웃기는 분위기였으므로. 


 

어느 해 내 생일날 아침 친정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오늘 너 생일인데 미역국이라도 좀 끓여 먹었나? 나가서라도 국수 먹지 말고 점심 잘 챙겨 먹어라

 “………..”

눈물이 마치 준비라도 했다는듯이 바로 줄줄 흘렀고, 나는 그 눈물을 수화기 너머에 들킬까 봐

시종 “………….”이 되었다. 내 설운 마음에 엄마 근심까지 얹고 싶지 않아 가슴이 찢어지던 날의 기억이다.

 

그 후 아이들이 자라니 생일이라고 내게 귀여운 편지도 쓰고, 고물고물한 선물들을 정성스레 준비해 내밀곤 하면서 나의 생일은 자연히 부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Dear Grandma….Happy birthday to you.....I love you….” 라며 멀~리서 외손자도 손수 쓴 카드를 보내 오고많은 것이 내 재량에 의해 바뀌고 달라질 수 있는 형편이 되어 웃으며 지난 얘기하듯 할 수가 있다.


 

겨울에 접어 들면 제사가 총총히 든다. 아이 둘 다 겨울 방학 중에 생일을 맞는다. 그 와중에도 나는 아이들의 생일을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고, 친구들과 오손도손 어울려 노는 걸 행복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인생의 몇 번 째 생일날이라는 소중한 의미를 새겼고, 나를 오래 지탱했던 생일의 추억, 홀로 찰밥을 둥구스럼하게 올린 고봉밥을 받으며 별난 반찬을 바로 앞에 둔 생일 밥상을 받는 것으로 관심과 사랑을 챙겼던 추억을 불러 보기도 했었다.

 

생일은 가족의 사랑을 확인 해 보아 정겹고, 일상이 된 제사는 또 제사로서의 순기능이 있다는 나의 자의적 해석으로 어떤 투정이나 타박도 아예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응당의 내 소임이기에 내 힘이 닿는한, 하루의 정성을 바치는 것이다. 도리켜 보면 제사란 조상을 매개로, 혈연을 강조하면서 정신적 결속을 도모하는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고, 일정 부분 그러한 효과는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오래 전에 신문 칼럼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부모의 신념과 조상 숭배는 종교이고, 제사는 그냥 넘어가면 양속이고 따지고 들면 불화가 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명절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율이 높아지고, 주부들은 명절증후군에 시달린다는 기사들이 즐비할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송 호근 교수님의 말씀으로,

경국대전에 명시하기를, 벼슬로 6품 이상은 3대를 봉제사할 것이며, 7품 이하는 2,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라는 지침이 있다고 하였으나 신분 상승을 꾀하고 싶은 서민들이 너나 없이 4대조까지 제사를 모시게 되는 바람에 문제가 야기된 것이라는 말을 나는 메모까지 해 두었던 것이 지금 생각키우는 것이다.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하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라 마련하고,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밥과 국 , 북어포, 냉수로 간소하게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조선이 역사에 묻힌 마당에 통치수단인 제례의 의미는 이미 소멸됐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가문의 위세나 신분 상숭으로서의 제사란 심히 시대 착오적이며 더구나 비하고 따지고 드는 제사는 조상을 숭배한다는 본질을 한참 벗어난 일이 된다. 교수님의 글은 제사의 기능을 잘못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공감할 글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어른의 제사가 들어, 흝어졌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고, 조촐한 나물밥을 먹으며 고인에 대한 추억담이며, 소소한 일상사로 담소를 나누는 것이 싫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제사를 맞은 날은 고인을 추억하는 길고 짧은 일화들을 불어 오는 날로 가족 간의 정이 도타워지면 

 
그럴 때면 나는 나를 마주하면서 물어 본다훗날, 엄마, 시어머니, 장모, 할머니인 나를 두고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할까 하는

싫고 나쁜 기억을 물려 주지 않아야겠는데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을 살아 버렸구나 싶다.

 

제삿 날을 표시한 다음 나머지 연중 행사를 마저 채워 넣는다.

송편 빚을 추석이며, 팥죽 쑬 동짓날이며 등등을..... 

 

나는 칸 정리가 잘 된 2015년 1월 달력 앞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24시간씩 다복 다복 담고 있는 이 달력의 소유자, 내 시간의 소유자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