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5년

국제 시장과 아버지

수행화 2015. 1. 18. 13:18

요즘 영화 '국제 시장'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바야흐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에서 아버지를 추억하고 새삼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지난했던 생애를 반추해 보며 뒤늦은 감사의 념에 젖는 일들이 부쩍 많이 보인다.

 

영화 '국제 시장'의 감독은 이 영화를 "돌아 가신 "아버지께 바치는 헌사(獻辭)"라고 썼는데, 극장을 나서는 대다수의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에 아버지를 추억하고 기리는 마음이 벅차 올랐지 싶다. 일상은 건조해지고, 세상에는 원망과 네 탓이 넘쳐나고, 이기심에 골몰하는 이 시대에 영화 한 편이 아버지의 헌신을 생각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영화는 좋은 일을 한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한국 전쟁과 피난의 시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가지 아버지의 반생을 그려, 혼돈의 시대, 격동의 험난한 파도를 온 몸으로 받아낸 아버지의 역사이고 대한민국현대 역사를 함축하며 반추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을 벗어 나기 위한 일이라면 지옥불에라도 뛰어 들려 했으며, 자신의 소중한 꿈 따위는 차라리 사치로 여겨 벗어 던ㅈ질 정도로 가족 부양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허구가 아니고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우리가 목도했던 현실이어서 가슴이 시렸다    

 

왜냐하면 나의 경우 전쟁과 피난의 기억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 애잔한 기억들이 너무 선명하다. 파독 간호사로 간 친구가 있었고, 월남전에 참전했던 친구가 있었으며, 그리고 전사한 아까운 친구도 있었으니, 영화는 바로 우리가 살아 온 순간들인 것이다. TV를 통해서 바라 보던 이산 가족 찾기의 장면은 지금 다시 발 봐도 또 다시 슬펐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족을 위해, 독일 광부가 되기도 했고, 전장인 베트남도 마다 않고 뛰어 갔으니 생각해 보면 갸륵하나 얼마나 용감했고, 강인했었던가!
그래서 많은 것을 얻어 낸 삶이었으나,
도리켜 보니 그저 애잔하고 눈물 겨웠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들 한편으로, 나는 국제 시장과 함께 떠올리는 잊지 못할 나만의 추억들이 있다.추억은 나와 함께 나이를 먹으며, 숙성해서인지 회상하니 싸한 그리움의 향내가 난다. 

 

내가 처음으로 국제 시장엘 가 본 것은 여고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를 따라 교복을 맞추러 갔을 때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와 단둘이 외출한 몇 안 되는 추억 중의 하나이다.시장 안 지정 교복집에는 가격에 차이가 있는 몇 종의 복지 샘플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 중 제일 비싼 것으로 맞추어 주시오" 하시더니, 
하는 김에 코트까지 맞춰라고 하셔서 나는 당시로는 고급인 모직코트까지 턱 맞춰 입게 되었다. 
그리고 환한 표정으로 "뭐 더 필요한 거 없냐" 고 하시며 두런 두런 시장을 함께 걸었던 참 행복했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훗날 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국제 시장, 소위 깡통 시장이라는 데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작고 다닥 다닥 붙어 있던 가게들에서, 영어며 일본어 상표가 붙은 것이 멋져 보이는 물건들을 들여다 보며 다른 세계의 생활들을 엿보았으며, 거버 이유식이며 색다르게 생긴 아기 턱받이며 장난감을 사고 다녔던 시절은 성실하고도 애잔한 날들이었다.

 

도무지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언제나 괴로웠으며, 조금 유난한 메뉴를 궁리하느라 전전긍긍하던 초짜 엄마 내가 그 유난한 상점들을 종종 들르던 중, 어느 날 나의 눈에 뜨인 것이 마카로니였던 것. 모양이 재미 있어 좀 흥미를 가지려나 하는 마음에서 한 봉지를 사 와서 삶았더니, 아!!! 그 까다로운 14개월의 아기가 구멍 뚫리고 톡톡 잘린 국수를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이 아니던가얼마나 기이하고 놀라웠던지! 그리고 나는 아기의 호기심을 채워 주었다는 것에 그렇게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게 되었으니, 영원히 잊지 못할, 적어도 나로서는 특기할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 둘로 힘들었고 행복했던 세월이 영화 속의 1974년이라는 것에 나는 반가움에다 애틋함까지 더해졌으며,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기억때문에 감정이 냉온탕을 들락거렸다.  우리들의 전 생애가 그렇게 드라마틱했었다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생각해 보리만치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에 몰입했으며, 자신을 희생한 삶에 대하여 그렇게 분노하지 않았으며, 열악한 오늘에 절망하지도 않았다고 회상하고 있다.생각해 보면 그 당시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를 애송하던 것이 우연한 현상은 아니었던지 모르지만.

 

그런데 나는 오히려 우리를 키워 내신 고단했던 나의 부모 세대와 나의 아버지의 삶이 투영되는 것에 숙연해 졌으며, 철 지난 후회가 비구름처럼 몰려 들어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일찌기 크게 일구었던 부(富)를 전쟁으로 잃으셨고, 다시 힘들여 일으켜 세워야 하셨으며, 또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워내야 했던 나의 아버지의 생애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무심했었던가 말이다. 전쟁의 직격탄을 맞았으며, 모든 것을 다 태웠다고 하시던 말씀은 늘 귓전으로만 들었으며,그저 나날의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으니, 시절도 모르고 소견 없이 나이가 들어 갔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고 아버지가 돌아 가시던 그날까지도.아버지를 회상함에는 늘 침묵이 깔려 있으며, 온화한 웃음은 아버지의 뒷배경이다.얼굴을 붉혀 화 내시던 모습은 머리를 쥐어짜도 아니 나오는 기억이다.

 

나의 아버지는 매사에 일희일비 하지 않으셨으며, 아버지 나름의 생활의 질서를 가지고 계셨던 것같다.누구에게나 온유하고 관대하셨으며, 기울지 않는 고른 사랑으로 자식을 대하셨으며,
자식을 그렇게 두루 아끼시듯, 아이를 맡긴 선생님도 극진히 대접하셨던 점 등을 나는 존경해 왔으며 마음에 새기며 살아 왔다.   초등학교 시절 신학기가 되면 연례 행사로, 우리 남매들의 담임 선생님을 한꺼번에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게 하셨으며, 그리고 더하여,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는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과 중학교 선생님을 단체로 초대해서 잔칫날처럼 왁짜하게 하신 일도 잊을 수가 없다.여덟 남매 중의 여섯째인 어린 딸을 위한 배려로 당시로서는 퍽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학원', '만화왕', '만화 학생' 등 월간지 몇 종을 정기 구독으로  받아 보게 해 주셨으니 책벌레 되기 족하였고,책을 안고 뒹굴 뒹굴 누워서 노는 걸 빙그레 웃으시며 바라 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랑,공부며 성적이며 군말이 없으시던 아버지께서 나의 고입 시험에 체력장 시험 걱정을 하시던 일도 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시험 직전까지 체력장 점수는 0점이어서 내심 걱정이셨던지 아침마다 엎드려 팔굽혀 펴기 연습을 해보라 하셨고, 끝내 단 하나도 성공해 보여 드리지 못하여 송구해 하는 내게,  까짖거, 그래도 괜찮다 하시며 무한한 위로를 보내 주시던 아버지, 그 동안(童顔)의 모습을 그립단 말로만 하기에는 참 싱겁고도 밋밋하다.  "원기소" "에비오제" "헤모그로빈"등 아버지께서 사다 들이신 약들은 어떠했던가!  
그러나 나는 아버지에게 알약 하나를 사 드리지 못했으며,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를 드려 본 기억이 없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니 서럽고도 아쉬운 마음에 가슴이 죄어 온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가만 두지를 않고,자식은 부모를 봉양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를 않는다" 라고 읊은 구절을 세기를 넘어서도 공감하게 되니, 어리석은 자는 남의 후회를 듣고 교훈 삼을 줄을 또 모르는 것이다.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잘 날이 없었을 터인데도, 아버지의 나무는 바람이 잦아 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절대적 인내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면서 끝없이 분노하고 좌절할 때에 나는 늘 아버지의 인내를 생각했다.그리고 온화하신 아버지의 딸로서 그렇게 시퍼렇게 살 수는 없노라고 나를 타이르곤 했었다.   혹시 나에게 묵묵히 질서를 따르는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선물이라 생각한다.아버지의 관용과 인내를 나는 한참 더 배워야 한다.

 

영화 한편에 나는 영화 한편 이상의 추억을 잦아 올렸다. '장 영희' 교수 번역의 이 시를 다시 찾아 읽었다.

 

 <아버지의 조건>

                                                                                                       - 작자 미상 -

   산처럼 힘세고,
나무처럼 멋있고,
여름 햇살처럼 따뜻하고,
고요한 바다처럼 침착하고,
자연처럼 관대한 영혼을 지녔고,
밤처럼 다독일 줄 알고,
역사의 지혜를 깨닫고,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강하고,
봄날 아침처럼 기쁘고,
영원한 인내 가진 사람,
하느님은 이 모든 걸 주시고,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을 때
그의 걸작품이 완성 되었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