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앨범/2015앨범

겨울 신륵사의 고요

수행화 2015. 1. 31. 02:05

<신륵사>

 

 

 

강물을 바라 보고 싶을 때, 씻어 내리고 싶은 그 무엇이 안에 응어리져 있을 때,
걸으며 막바람만 훠어이 훠어이 쐬고 돌아 다니려니 어쩐지 속이 달래지지 않을 때,
신륵사로 발길을 돌릴 일이다.
작고 소박한 위안이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고찰이 이렇게 근거리에 있다는 게 참 고맙다.
여주 봉미산 기슭이라 하지만 강을 바라 보는 흔치 않은 절집이라 엇비슷한 산세의 풍수와 확연히 다르다. 

 

 

 

 

 

강월헌

 강월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인 나옹선사의 당호로서 선사는 여강이 휘도는 물가에서 화장되어서,
그 화장터에 석탑과 6각형의 정자를 건립한 것이 강월헌이라 한다.


 

 

 

 

 

관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광장같은 구역을 가로 질러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은 번다한 것들 벗어나 절로 향하는 길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템플 스테이를 위한 요사체가 아주 단정하게 앉아 있다.
마음이 절로 절로 절을 향하게 할 것같다.
절에서 하는 일은 절로절로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신륵사라는 명칭의 유래가
신기한 미륵이 신기한 말의 굴레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물리쳤다는 설화가 그를듯하다. 
그래서 신력과 굴레에서 신륵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찰의 사물은 법고, 목어, 운판, 범종의 순서로 아침 저녁 울린다.
범종은 일체 중생에게, 법고는 축생의 무리에게,
목어는 몰고기 등 수중의 생명에게,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들에게
불법을 듣고 다 함께 깨달음에 이르자는 권유의 소리이다.

 

 

 

 

 

맑은 단청이 눈에 들어 온다.
위엄 있는 오방색이 조금 숨을 죽이니, 유순하고 더 멋스럽게 보인다.
회장 저고리에 끝동 달리듯이 얄상하고 민첩한 단청이 자수처럼 곱다.
불현듯 한 폭 오려 수실로 새기고 싶어진다.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은 풍경화 한편을 걸어 놓은 모양새다.

 

 

 

건너 풍광이 호흡이라도 멈춘듯, 정물이 되어 겨울 한 낮의 시간을 정밀하게 나누고 있다.
촘촘하고 느린 고요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그 느린 시간 속에 갇히면 자리 뜨기가 쉽지가 않다. 신륵사 만의 멋이고 위안이다.

 

 

 

 

극락 보전

극락 보전은 크지 않고 정갈하다. 곡선을 그리는 추녀 선이 곱고, 그 추녀를 지지하는 곧은 기둥이 미덥다.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3년) 대규모의 중창 불사를 시작할 때 중건되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용주사의 말사이다.
이 극락 보전은 임진왜란에 불타 버린 것을 1800년 정조 24년에 중창한 것이라 한다.

능을 지키고, 왕실의 안녕을 빌어 주는 것이 조선시대 사찰에 주어진 임무였으니,
억불숭유를 하면서 그 무슨 이기적인 모순이었는지 참 알 수가 없는 일이긴 하다. 

 

 

 

 

 

다층석탑

15세기 후반쯤으로 추측되는 8층 대리석제 탑으로 보물 225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안내 한다.

탑신에 용무늬가 이채로운데 강을 끼고 있어, 강물이 편하기를 염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래 연꽃잎 문양이 퍽 어여쁘다.

 

 

 

 

 

조선 철종 때의 세도가 '심병기 송덕비'가 앙중맞은 지붕을 이고 있다.
너무 작아서 크기를 탖아 보니 총 높이가 136.5cm.,  비신 높이가 1136.5cm라고 한다.
법당과 구룡루를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후세에 이름 알리려 돌에 이름 새기지 말라.
사거리에 오가는 사람의 입이 비석이다"
고 하신 스님 말씀이 문득 생각난다.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230호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 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경을 인출하여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내력을 기록한 비문이라고 한다,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우고 전각을 올렸나보다.

 

 

 

 

 

다층전탑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려 시대 전탑이라고 하니 소중해 보인다. 보물 226호로 지정 되어 있다.
기단부는 화강석이고 탑신부 6층은 반듯 반둣한 벽돌을 쌓은 모양이 현대적인 조형물 같다.
문화재를 볼 줄 모르는 나의 안목이 민망할 때가 많다.

 

 

 

 

 

탑은 본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 되는 것이며, 또 장경이나 가르침을 안고 있기에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전탑은 절집에서 떨어져 홀로 바로 아래 강을 바라 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강물을 수호하고 다독이겠다는 염원이 있는 듯하다.

 

 

 

 

 

 


넓은 얼굴에 굵게 주름이 진 바위에 앉아 추위를 모르고 겨울 강에 노니는 오리떼를 바라 보다가,
정물처럼 고즈넉한 정자와 탑을 바라 보면서, 강물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여여하나 순간 순간 새로움으로 흐르는, 그러한 흐름을 따르고 싶다.

 

여주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린 여주 8경은 그윽한 그림이다.

<여주 8경>

          1.  神勒暮鍾 (신륵모종)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2.  馬巖漁燈 (마암어등)       마암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3.  鶴洞暮煙 (학동모연)       강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4.  燕灘歸帆 (연탄귀범)       강 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5.  洋島落雁 (양도낙안)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6.  八藪長林 (팔수장림)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7.  二陵杜鵑 (이릉두견)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8.  婆娑過雨 (파사과우)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부드러운 산에 여여한 강을 낀 여주에 8경을 노래한다는 것은 퍽 어울리는 일이다.

     

     

     

     

     

     

    <명성 황후 생가>

     

    신륵사에서 명성황후의 생가는 자동차로 15분 남짓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명성황후는 영주군수 등을 지낸 민치록의 딸로 16세에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비가 되었으며,
    조선말 격변기에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걱정하며 일제의 침략야욕에 맞섰으나,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어 4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사후 1897년 대한 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존되었고 장례도 국장으로 다시 치루어 청량리에 안치되었다가 
    고종 사후 홍릉에 합장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숲이 병풍처럼 배경이 된 단아한 집으로 경기도 유형 문화재 46호라고 한다.

     

     

     

     

     

    행랑채 너머 안채가 보이는데,
    1995년에 행랑채,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되어서인지 깔끔한 인상이다.

     

     

     

     

     

    1687년 당시부터 남아 있었다는 안채 마루.

     

     

     

     

     

    안체에 별당으로 통하는 작은 문.
    어린 명성황후가 들락거린 문인가 하여 새롭게 바라 본다.
    아명이 자영(玆映)이었다고 한다.

     

     

     

     

     

     

    남편 고종의 친정을 유도하며 시아버지 대원군과 각을 세우고 물러 나게 했으며,
    개화를 주도 했던 명성황후도 이러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니.

     

     

     

     

     

    담장으로 구분된 민가 사이에도 작은 출입문이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