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5년

'나는 지금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어 있다.'

수행화 2015. 2. 22. 01:38

우리는 일상의 위대함을 간과하고 산다.
세태에 발 맞추어 앞질러 생각하고, 또 누군가와 더부러 바삐 바삐 움직이는 것이 삶에서 진행 방향에 서 있다는 생각에 젖어 산다.
잠깐의 무료함을 못 견뎌하는 것도 체질화해 버렸으며, 바쁜 걸 자랑하는 지경이 되었다.
광속도 중독의 시대라고 해야만 할지!! 어쨌거나 부지런하고 성급한 사람이 앞장 서서 달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느림의 미학'이니, '슬로우 라이프'니 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흘러가고 흘러 오곤 한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 하는 스위스 작가 페터 벡셀의 산문집을 읽었다.
나에게는 철이 한참 늦었고, 분수에 걸맞지 않은 주제이지만 작가의 견해가 조금 궁금해서 펴 보게 되었다.

우선 가지런한 목차에 실린 말들에서 내용을 미루어 보게 한다.
.....기다림을 기다리며..... 작은 세상, 큰 세상.
.....우리가 아직 기다릴 수 있던 시절에..... 편안하고 질서 있는 무질서.
.....소음을 위한 변론. 바람에 쓴 글. 그냥 그러니까...... 단어가 없이도 나눌 수 있는 대화..... 

뭘 좀 생각해야 할 준비를 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는 것같은 제목들은 쉽게 읽어 치우려던 내 바쁜 마음을 식히고 본다.
무심히 스치는 일들, 사람들, 그리고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자신의 일상에서의 소회들...
작가는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난해하거나 심오하지 않게 짧게 쓴 글일 뿐, 굳이 뭘 가르치려 드는 강력한 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묻지 않은 질문에게 넌지시 답을 건네는 매력있는 글이구나 생각하며 읽어 나가게 된다. 

마을의 선술집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바라 보고, 편안한 음식점을 찾아 축구 중계를 보곤하는 일상이 이어지다가,
가끔 뚜렷한 일 없이 그저 기차를 타고, 함부로 내릴 수 없는 그 순간의 감금 상태를 즐기면서, 차창 밖을 내다 보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니,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 보기도 하고, 기차의 운전 소음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며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은 평온하고도 자유로워 보인다.  그리고 생활인의 성실함까지 보인다.  
   
 "아무 목적 없이 정말 아무 목적 없이 기차를 탈때면 나는 도주에 대해 이렇듯 소박하고 각별한 감정을 느낀다. 그냥 떠나기, 일상에서 탈출하기, 기차로 떠나는 많은 도주는 나에게 소시민적인 즐거움을 안겨준다.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아니라 예행연습으로 해보는 자그마한 도주에 불과하니까."

"사치스런 구금생활, 당장 뛰어 나갈 수 없는, 안전한 느낌을 받으며 소음을 즐겨보라" 고 권하는 글을 쓰는 장면이다.

당연해 보이는 익숙하고도 소소한 일들에서 출발한 생각들은 나아가 국가를 생각하기도 하고, 지구를 걱정하는 일들로 확장 되기도 한다.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의 글이라 할 만하다.

큰 성공을 거둔 인생이 아니어도, 자기를 에워 싼 세계가 그저 그렇고, 근사하지가 않아도, 삶은 빛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데 생각이 이르니 일상의 작은 일들에게 애정을 보내야만 할 것같다.
 
나는 나를 정신적, 시간적으로 고문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특별할 것이 없는 나의 일상에 대한 비하이며 체벌인 것이었다.
젊은 시절 남편과 아이들이 시간 맞춰 나가고 나면 나는 마치 누군가 내 뒤를 쫓기라도 하듯이 뛰면서 집안 일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나만의 시간을 좀 더 늘리고 싶은 지독한 강박관념이었다.
그리고 나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신문이라도 들추고 있으면 홀로 웃음이 나올 때가 많았다.
이 시간의 평화를 위해 거의 고문 수준으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부산을 떨었나 하는 마음에서. 
그것도 지금은 사라져 간 시간 속의 일이 되었다. 왜?
나는 지금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시간을 그러 모았으면 나는 지금 '시간 부자'가 되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며,
시간이 거둬다 들인 수확물로 곳간이 가득해야만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나를 강박증에 사로잡히게 한 그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은 내게 어떤 보상도 없었으며,
지금껏, 여전히, 죽 나는 작은 세상을 살고 있다. 적지 않은 시간만 주어진 채로 말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방에서 일어 나는, 나하고만 관계 있는, 나만의 세상과 화해하며 사이 좋게 지내게 되었다.
 
작가가 기차를 타고 도착 시간까지의 구금 상태를 즐긴다고 했던 것이 마음에 와 닿는 이유이다.
나도 내 방에 꼼짝 없이 갇혀 있는 시간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그  물리적인 격리와 구속이 오히려 자유여서 내게는 큰 위안인 것이다.
규격화한 내 삶의 방식을 해체하여 다시 조립할 재간이 없으매, 마음만이 먼 도주를 꿈 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날도 허다하다.
간 밤의 꿈들이 손에 잡힐듯 하나 명확하지 않아 마음을 집중해 보다가, 누군가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아주 많이 굴려 보기도 하고, 그러다 글을 쓰려 하면 마땅한 단어들이랑 적절한 말이 떠 오르지 않아 심란하고 우울한 기분에 빠져 들기도 한다.
그렇게 고단해지면, 십자말 풀이도 하고 스도쿠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꼭 했어야 하는 말들, 지금까지 하지 않아 마음에 멍이 된 말들이 그렇게 명료하게 잘 떠 오르는 이상한 날들도 있는 등, 아무래도 좋다,
시간이 많은 자의 오만한 쓰임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간 밤 꿈에 엄마를 만났다. 친구와 나들이를 가신다며 개울을 건너 가시던 모습이다.
명절 끝이라 그렇게 슬쩍 보이셨나 싶기는 한데 이런 저런 후회스런 지난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지난 생각을 많이 하는 자는 가난하게 산다고 했다.
무슨 근거에서 산출된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지난 날의 후회나 원망을 키우고, 분노로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누구의 말이 아니었을까 싶기는 하다.

부족한 결단력의 저주, 무성의한 선택의 저주, 자신감을 잃어 버린 저주, 지나치게 인내하고 기다림의 저주 ... 
나를 향한 분노는 언제든지 끓을 수 있게 넘치고 또 넘친다.

그러나 나는 내 작은 세상에서 도주의 예행 연습을 하며 희망의 여지를 키우고 또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에 보낸 인내가 나를 배신한다 해도 기다리고 또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림은 이제 굳은 살이 박혀 감각이 없어진 것같기는 하지만.
기다려 보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세상 일이 모두 내 뜻대로 되면 교만해지기 쉬운 법.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나의 스승들이라 여기며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많은 시간을 내 임의로 함부로 쓰는 사치를 누린다.

지적 허영심이 그득했던 불안이나 특별한 일상을 꿈꾸던 어리석음은 지고,  분수 안의  일상을 챙기는 것이 내 몸에 맞는 옷이라는 걸 알아 가는 내 시간들이 단연 소중하다.
그리고 방문을 닫으면 순식간에 내 세상이 되는, 책이 있고, 컴퓨터가 있고, 넓은 책상이 있는 내 방 또한 소중하다. 

나는 참 소소한 사치를 누리는 사람이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서 가지게 된 마음가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