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5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망각의 무서움에 부쳐.

수행화 2015. 5. 24. 11:48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눈부시게 변화한 세상을 향해, 이 태평성대로 보이는 세상을 향해, 박 완서 작가가 던지는 첫 마디 말의 예감은 무겁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이렇게 의심의 과제를 던지며 시작한다.

 

이 자전적 소설의 전편 격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작가의 유년기를 거치는 20년 동안의 성장기를 그린 것이었다면 이 책은 전쟁이 발발된 해로부터 3년에 걸친 기록이다.
이 3년여의 기막힌 격동의 시간은 성장기의 20년 세월과 맞먹을 두께의 고통이요 변화였다는 것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피난민이 드문드문 맹수에 놀란 토끼처럼 화들작 뛰어 내리는 길을 거슬러 우리는 숨 가쁘게 새로운 피난처에 도착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우리가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것을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 냈다. 조금 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작가가 대학을 입학하던 해,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진다. 
입학의 기대와 흥분이 미처 가시지도 전에 삶은 송두리째 뿌리를 드러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피난 보따리를 꾸려 모두들 보금자리를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으나,

총상 당한 오빠, 걸음을 옮길 수 없는 오빠와 피난을 떠날 수 없어 그녀의 가족은 적 치하의 서울에 숨어 지내게 된다.

어린 시절 살았던 현저동을 피난처 삼은 것이다. 

 

이 큰 도시에 자기들만 남고 텅 비어 버렸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이외에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현실은 단순하게 불안이나 공포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것같은 극한 상황일 것이다. 

위험한 침묵에 빠진 도시에 조용히 입성하는 인민군의 행렬을 그녀는 분명 보았다고 한다.

그 공포 앞에서 언젠가 글을 쓸 것이라고 예감하는 것은 비장한 사명감으로 들린다.

 

전쟁은 오직 생존만이 절대 가치 일뿐,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을 차라리 벌레라 비유하는지도 모르겠다.  

낮에는 쥐 죽은듯 지내고, 밤이면 이웃을 돌며 남겨진 양식들을 털어 오고, 땔감을 구하러 다니고 심지어 땔감이 없으면 남의 집 가구도 부셔서 불을 때는 사람도 있었다니.....

비정하고 비루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생명의 위협 앞에 흔들리며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찬마루 위는 다리가 부러진 밥상. 금간 테를 양회로 때운 항아리. 밑이 반쯤 빠진 체. 시루, 바가지. 양철통. 궤짝 등이 꾀죄죄하고 귀살스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부산 대구 피난살이의 고달픔이 유행가 가락에 매달려 천 년을 읊어진대도 어찌 서울살이  서러움에 미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왜 그렇게 억울한지 몰랐다. 부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 남은 자가 살아 남기 위한 고통은 비단 입에 풀칠하는 어려움에 그치지 않았으니, 

세상이 바뀌어 인민군이 반동을 잡아 들이다가, 또 다시 바뀐 세상에서는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들과 빨갱이들을 색출하고 처형하고...... 숙청이 한창일 때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세상이 된 것이다.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고,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다르지 않았으니 벌레보다 나을 게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인민군에게 밥을 해 주었다는 죄목으로 숙모와 숙부는 고초 끝에 처형되었다고 하니 이 어찌 애석하고 억울하지 않았으랴 싶다. 가족의 안위를 그렇게 걱정해 주며 자애가 돈독하던 숙부와 숙모였는데 말이다. 

 

이렇게 텅 빈 마을에서 식량과 땔감을 구하며 숨어 지내던 중 작가는 인민 위원회에 발각되어 인민 위원회 사무실에 나가 일을 도우게 된다.

그러나 몇 달 후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월북을 강요 받아 올캐와 함께 북행길에 올라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다행히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서 빠져 나와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가족과 재회했으니 이산 가족의 운명을 턱 밑에서 밀어낸 것이다.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을 때는 거꾸로 향토 방위대에서 일을 하게 되어 안정을 찾기도 전에 다시 서울 철수령이 내려져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고 한다.

전선이 밀리면서 방위대도 온양까지 내려 갔고, 그 대열을 따라 작가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따라 내려 갔고, 곳에서 방위대는 해산이 되었으니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에 오게 되었다니,

연극도 아닌, 꿈도 아닌, 역사의 증언이라 가슴에 돌을 얹은 채 새겨 들으며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월북과 남하를 바꾸어 가는 기이한 피난의 기록.  

짧은 시간에 적 차하와 국군 치하에서 교대로 일을 하게 되는 롤러코스트보다 더 어지러운 현실 앞에서 떠 안아야 했던 또 다른 의무가 있었으니 무겁고도 무거운 가족 생계의 책임이었다.

 

다행히도 PX에 취직이 되었다. 이 남 다른 경험은 훗날 그녀 최초의 장편 소설 '나목'의 배경이 되었다

전쟁 중에도 삶은 영위되었으니 시장은 바삐 움직이고, PX물품은 시장에 흘러 들어 고급 사치품으로 통하던 시절이 된 것이다.

 

"럭키스트라이크. 카멜 담배, 밀키웨이 쵸코렛, 럭스 비누, 나미스코 비스켓, 참스 캔디, 폰즈 크림, 콜게이트 치약, 그런 물건 들이 좌판에 반짝반짝....구질구질한 시장 속에 나데 없는 꽃밭같은 이 작은 좌판들은 곧 미국의 부와 문화의 상징이었다"

 

양갈보와 양아치와 달러 장수와 PX 걸과 PX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잡역부들과 양키시장 상인들이 유통 구조를 만들며 시장을 이루게 된 것이다.

살아 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온갖 수치스런 일들이 행해졌으니 퇴근하면서 치마나 바지 아래에 물건들을 두르고 나오기도 하고, 또 그것을 묵인해 주기도 하는 등,

그 영악하고 비루한 생존 기술을 지금에 와서 들으니 그렇게 거북하고 민망할 수가 없다. 

 

그 곳에서 박 수근 화백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불필요하게 천재성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며, 오직 사는 일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재주, 그림 그리는 재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관념적인 예술보다 사는 일이 우선이었던 가난한 화가의 삶은 일면 숭고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한 없이 추락한 천재적 작가의 초상이 한마디로 전쟁의 비극을 정의할 수도 있을 것같다.

 

 이 시절 PX에 전기 설비를 맡아 하는 청년을 만나 결혼을 선언하면서 인생에 정착을 꾀힌다.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자신이 흠뻑 뒤집어 쓴 역사의 무게. 삶의 무게를 덜기 위하여, 또 글을 써야할 책무를 이행키 위해 숨을 고를 의지처를 발견했지 않았나 싶어진다.

전후의 혼란기에도 '아서원'에서 성대한 피로연을 했으며, 방석 몇개를 받쳐 앉아도 앞이 안 보이게 괸 첫상도 받으며 결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오빠가 죽은 후 기지촌 장사를 억척스레 다니던 올캐는 1년 남짓만에 동대문 시장에 가게터를 장만했으며, 엄마는 더 큰 집을 사서 옮기고도 돈을 남기게 했던 것이 화폐 개혁의 덕이었다고 하는 이야기 등. 

전쟁과 가난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운명이 가혹하게 죽음과 이별을 만들며 정신세계를 마구 흔들어도 삶을 저버리지 않고 적응에 온 몸을 바치는 그러한 몸짓들을 보며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진다. 

나는 진실로 그 시대를 살아 낸 세대에게 존경의 념을 가지게 있다.

 

책을 덮은 후 산란해진 기분에다 며칠 전 읽은 신문 기사는 생각을 더 부풀려 준다.

"해방과 분단으로 한국 경제는 큰 혼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의 파괴로 인해 한국 결제는 최악의 상태에 놓였다. 195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1990년 가격 기준으로 볼 때 787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대륙 53개국의 평균 912 달러에도 못 미쳣다. 이런 견제를 재건하고 1960년대의 고도 성장으로 이끈 것이 미국과 유엔의 원조였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총 31억 달러의 경제원조가 이뤄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견제를 재건하고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세계각국에 원조를 제공했다"

 

원조 밀가루가 우리 식탁을 바꾸었다고도 말한다.

동네 빵집이 급증하고 짜장면이 일상적 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 1950년 후반의 일이라고 하는데, 원조 받은 밀가루가 쏟아져 나온 결과라고 하니 지금은 우리가 이만 우리 시대를 향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때인 것같다.

 

박 완서씨의 굴곡진 인생이 어디 자기만의 개인사, 가족사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전선이 밀려 나고 밀려 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남으로 북으로 가고 오고 하였겠는가 말이다.

시대의 증언같은 현실은 내 기억의 한계점 전후에서 엄연한 현실이었으니,

나에게도 구호 물자의 기억, 가루 우유 배급의 기억, 군복에 물감 들여 입던 사람들의 기억은 또렷하다. 

조그만 곽에 든(8색 정도)크레용은 얼마나 매끄럽고 찬란하게 예뻤던가!

바람개비를 품은 영롱한 구슬들이 부딪치며 내는 맑은 소리는 또 어떠했으며. 공책을 찢지 않고도 글이 써지던 연필은 얼마나 귀했던가!

-지금도 crayola crayons을 보면 정답고 애잔하다.

 

"할로 할로 쵸콜렛을 주세요~~. 할로 로 츄잉검을 주세요~~" 

그러나 그것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깨알같이 자잘한 무지개 너머의 추억인 것이다. 나에게는.

뜻도 모르고 부르고 놀았던 노래들이 비감을 자아 내게 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으니.

 

전쟁은 성난 역사의 파도라서 바람은 파괴를 향해 미치듯이 덤비고 춤을 추는 것이리라.
허약한 생명의 촛불 하나를 들고 그 바람 앞에 서 본 사람의 내공과 현실에 불만만 그득한 오늘의 세대와는 어쩔 수 없이 정서가 다를 것이다.

전쟁 얘기는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의 뿌연 역사, 역사책에 언급되는 피상적인 과거일 뿐으로 여긴다면 어찌 슬프고 슬쓸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그 많고 깊은 상처들이 어떻게 봉합되어 지금 새 살을 돋우며 살고 있는지,

어찌하여 우리가 잿더미 위에서 구호 물자를 받던 나라에서 가난한 지구촌에 원조를 보내는 나라로 격상되었는지.

생각을 간추려 보는 것은 어렵지가 않으며 정답을 다들 알고는 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기에 우리도 앞만 보며 달리는 것이라 위로는 해보지만 가끔 지난 세월을 살피며 앞 길을 살피는 것이 더 없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 앞에 사명감과 책무를 느낀 작가가 가족사의 아픔과 고뇌를 통하여 전하고 싶어한 멧세지는 분명하고 우리 가슴에 파문 하나를 던지고 잇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글이 분노에 이글거리거나 적대적이지 않으며 아름답기조차 하니 감동이 더 서늘하다. 

 

그렇다. 우리는 산허리 하나가 뚝 잘려 나가 길이 되고, 자그마한 동산쯤은 어느 날 뭉개어져 이리 저리 재단되어 시멘트로 도배가 되어도, 이내 그 산이며 동산의 존재를 잊고 만다.

정말이지 망각의 힘은 불도저보다 강하고 무섭다.

우리가 살아 온 모진 세월도 "정말 그때는 그랬던가?" 라고 기억을 의심케 하리만치 새까맣게 잊혀져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같은 진실에 대해 썼을 것이며 또 자문해 보는 것일 터이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