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5년

'에피소드 이삭 줍기' - 여름의 어떤 일들

수행화 2015. 9. 1. 03:40

 

거짓말처럼 더위가 물러 가고 햇살은 찬물 세수를 한 것처럼 맑으니 가을을 예감한다.

그 무성하던 수목들이 어느새 찬 기운을 감지하고, 바삐 옷 갈아 입을 채비에 들었다.

무더위는 땅으로? 하늘로? 우주로?, 어디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일까?

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여름 방학 두 달여를 무더위 속에서 지내다 갔으니 자연의 조화라지만 더위에게

조금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조금 늦게 와 주던지 조금 빨리 가 주지 않고..., 

 

매일은 감동이며 흥분이라 못 견디게 행복해 하는 그 사랑스런 모습을 바라 보매 세월을 까 먹었던지

벌써 9월이란다.

웃음 소리에, 피아노 소리까지 일시에 사라지니 집은 썰물이 쓸고 간 갯벌보다 더 먹먹하다.

팔에 시커먼 멍이 든 것도 모른 채, 온 집을 뒤집어 정리하며 기력을 소진하다가 이제야 뒤늦게

여름 나기모드에 들어가 본다.

장편 소설이나 되도록 두꺼운 책을 골라 들고, 방바닥에 길게 누워 뒹굴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는것이

나만의 피서요 여름나기인데, 이게 웬일인가?

내 습관적인 여름 모드에 적응이 안되고 벌떡 일어나 자꾸만 서성이게 되는 등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피부만 탄력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일상의 변화에도 탄력이 떨어져 on, off 작동이 잘 안 되나 보구나 하며 탄식이 새어 나온다.

 

아이들이 놀며 남긴 작은 흔적이며 에피소드들을 잊지 않으려 사진도 찍어 보고,

정한 곳에 이삭 주워 담듯 이것 저것 모아 보기도 한다.

창문에 그린 벽화 수준의 대형 그림도 없애기 아까워 매일 매일 야금 야금 지워 나가고, 수수깡 작품들, 찰흙 작품들도 부서질 때까지 바라 보려 한다. 손수 그은 오선지에 그려 둔 악보들, 하트와 무지개가 만발한 숱한 그림들....

이렇게 읊어 보니,

단숨에 뒷정리를 안 하면서 머릿 속이 말끔하기를 바라는 것이 말이 안 되기는 한 것 같다..

 

“If you know all of these songs you can come this train”

베토벤, 모짜라트를 낙서라고 하며 놀던 칠판에 기차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위에 지정된 곡목들을 티켓처럼 오려 붙여 알림판을 만들어 둔 것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것도 아직 지우지 않고 있다..

 

아침에 잠을 깨 눈을 비비고 나오면 영훈이는 잠도 덜 깬 채 현란하게 피아노를 두드려 이웃에 민망할 지경이고, 영지는 고무줄 공예 할 시간을 벌고 싶어 잠을 줄이며 엄마보다 더 일찍 일어 나려 드니...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가 읊었던 국민 교육헌장이 떠 오르는 장면이다.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데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 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이 시기의 아이들이 모두들 어느 정도 거쳐 가는 과정인 것임을 모르지 않으나 우리 아이들 취향은 조금 독특해 보이는 건 사실일 것이다.

공작의 고수인 언니, 누나들이 아이들 눈 높이에서 그렇게 잘 놀아 주어, 아이들 행복감이 하늘을 찌를

기세니 그런 정경이 여간 즐겁지가 않은 것이다.

 

환상의 복식조를 이루며, 온갖 것을, 세상의 모든 것들을 손으로 만들며 노는 것이다.

찰흙으로 화장실, 변기들을 만들고, 수수깡으로 차단기, 그네, 통나무 집을 만드는가 하면, 급기야 낚시 도구까지 만들어 주니 재미가 끝 없이 이어진다.

물고기 그림에 자석을 붙이고 막대기 끝에는 갈고리(커튼 걸이)를 달아 낚싯대를 삼으니 이 어찌 참신하고 재미 있지 않겠는가.

집은 좋은 미술 학원이요, 잘 돌아 가는 공작소인 것이다. .

왜 이렇게 나를 재밌게 해 주지?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영훈이가 내지르는 소리에 모두들 한바탕 웃어 젖힌다.

 

음악을 지극히 사랑하는 영훈이는 늦은 밤, 낮은 조명 아래서도 피아노를 잘 놓지 못하니 형설지공(?)의 경지가 아닐까 하며 웃어 본다..혼자 심취하여 이렇게도 저렇게도 쳐 보면서 스스로 듣기 좋은 방식으로 익히는 것같다.

어쨌거나 대견하기도 하여 피아노 소리를 잘 들어 주고 줄곧 반응을 해주니 곡이 근사하게 마무리 됐다 싶으면은근히 칭찬을 유도하는 눈길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부분을 쳐 보여 주면서,

 나는 여기가 예뻐. 할머니는 어때?”

할머니, Eine kleine Nachtmusik 알아?”

또 포르테 포르테시모, 피아노 피아노시모.... 악보 해설에, 부연 설명에 그렇게 신을 내는 것이다.

음악이 아이에게 행복을 주고, 삶에 멋진 위안이 될 것이라는 게 이미 다 보인다.

 

우리말에 자신감이 붙은 영지는 한마디 씩 촌철살인의 멘트를 던져 우리를 웃게 하니, 규영 언니를 닮아 언어 구사를 잘 하는 재간이 있을 모양이다.

고무줄 공작을 할라 치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고 마는,

근성은 좋으나 너무 힘을 쏟는지라 마침내는 하루에 작품 하나로 제한을 해야만 했더랬다.

한편으로 손 재간의 고수 언니들이 이 여름 동생의 그 좁고도 좁은 손톱에 아이스크림, 케잌, 곰이며

온갖 캐릭터를 예쁘고 완벽하게 그리고들 있으니 어찌 복합 공작소가 아니더란 말인가?.

 

아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나지만 그걸 유지하지는 못한다

는 누군가의 말에 무릎을 치고 공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모습을 이 여름 내내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할아버지가 나무로 차단기를 만들어 주지를 않나, 외삼촌이 불이 들어 오는 차단기에다, 불을 반짝이며 움직이는 경고등까지,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 주며 뜻하지 않은 재미까지 더 하니, 흥분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정 다채롭고 행복하게 여름을 보내다 떠났다.

공항의 작별은 늘 슬프다.

언니와 헤어지기 싫어 눈물 흘리는 손녀의 작은 얼굴, 네분 할머니 할아버지를 차례로 허그해 주고 눈물을 참더니 돌아서 출입구에 들어 서며 마침내 눈물을 훔치던 손자의 모습.

잔상이 이렇게 선명하고, 가슴이 뜨겁고 무겁다.

그리고 긴 비행 시간을 잠도 자지 않더라고 하니 어린 마음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어 그렇게 마음이 짠했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가졌던 소소했으나 소중했던 즐거움들이 그땐 그랬었지하고 어째 두루뭉수리가 되어버려 몹시 슬프더니, 이제 손주들 자라는 모습에서 오랜 기억들이 재구성 되는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

잊혀지는 게 슬픈 탓에 나는 가능한 많은 것들이 기억 창고에서 좀 더 오래 섬세하게 저장되어 주기를 소망해 본다.

 

그 재잘거리던 공작소에 고요가 다시 온 것이 벌써 보름이 넘었다.

그리고 일상에 탄성이 떨어진 나는 두꺼운 책도 몹시 무겁게 느끼며 그 고요에 적응을 못하는 날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이 과연 몇 번의 방학을 우리와 함께 보내려나 하는 쓸쓸한 생각을 해 가면서.

 

오늘도 아파트 뜰을 걷다가 아이 얼굴 보듯 감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감송이가 푸르게 영글어 예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밝은 날 사진 찍어 보낼 생각이다.

꼭지 채로 떨어진 아주 어린 감송이들을 고이 주워 와서 할머니 선물이야하면서 꽃인 양 접시물에 띄워 두던 손녀 생각에,

그 예쁜 마음이 자라 거기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오래 바라 보았다.

들꽃 한줌도 따 와서 할머니 선물, 어깨 아파 힘든 할머니가 안쓰러워 손수 만든 고무줄 팔지도 선물...

할머니 어깨 아파 힘 들어서 내가 할머니 선물 할려고 만들었어. 할머니 줄꺼야
어떤 날 빨래를 널고 있는 내게 와서 하는 말.

나 할머니한테 할 말이 있는데.” “

나 할머니 도와 주고 싶은데.”  어떻게?”

내가 빨래를 이렇게 집어 주면 할머니는 받아서 널고, 그럼 할머니가 엎드리지 않으니까 덜 힘들잖아

그 작은 목소리에 어찌나 크게 감동을 받았던지!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또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아이는 어른의 스승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끼리 부대끼면서 서로 아끼는 마음, 따르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들이

향기롭게 어우러져 익어가는 것을 바라 본 이 여름은 진정 행복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딸 아이가 카톡을 보냈다.

손가락 두마디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미니어쳐 같은 사과를 찍은 사진이 왔다.

영지가 주웠는데 할머니 준다고 며칠을 가지고 있는 중이라니,

왜 준비한 듯이 눈물이 날까?

예쁜 것만 있으면 할머니, 살찌는 이야기만 나오면 "할머니 좋아 하는 chubby”...

할머니 소원이 더 잘 먹고 얼굴이 chubby해지는 거라고 했더니 그 말을 아주 달고 사나 보다.

 

재치 꾸러기, 순수한 작은 예술가들은 이제 저희들 생활 속으로 들어 갔다.

'아기'라 부르는 걸 아주 싫어 하는, 그러나 아기같은 막내 영지도 어엿이 초등학교에 들어 갔고, 

다들 저 앞가림에 바쁜 날들을 보낼 것이다.

마음껏 꿈 꿀 수 있는 세상이 아이들 앞에 펼쳐질 것을 기원하고 또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달빛 아래 누워 보고, 풀벌레 소리 듣고, 별을 헤어 보고, 호박꽃을 따 초롱 만들고, 아침 이슬을 밟아 보는,

나는 그런 외갓집의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니면 어떤가!

사랑이 넘치고 배려를 더 배우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주는 것으로 부족하나마 만족을 해 봐야할 것같다.

이 여름의 추억으로 시야는 더 넓어지고 생각이 성큼 자랄 것을 믿어 보며, 앞으로 펼쳐질 역동적인 삶에 동력을 보태 줄 수 있으려나 위안하면서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정박해 있는 배는 늘 안전하다. 그러나 배를 만든 이유는 아닌 것이다

파올료 코엘료의 글이었던가?

 

아이들이 떠나도 슬프지 않은 이유를 내게 일러 주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