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5년

엄마 생각을 섞어 버무린 김장

수행화 2015. 12. 17. 00:55

배추 열 포기로 올 김장을 마무리했다.

김장의 고수가 되어도 한참 되어 있을 이 나이에 열 포기 김장을 담는 사이 소파에 널부러지기를 두어번 해 가며 마쳤다. 에너지 주머니가 간당 간당하다가 툭하고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으니 힘이 들었었나보다.

마늘도 미리 까 두고 나름 쉬엄 쉬엄 준비를 해 뒀건만 배추를 절이고 수 차례 씻어 건지는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같다.

그렇지만 이런 저런 생각, 특히 김장철이면 어김 없이 따라 오는 친정 엄마를 기억해 보며 혼자 뒤적 뒤적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 어린 시절 김장하는 날은 차일만 치면 잔칫날이 될 성싶게 사람이 북적거리는 연중행사였다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였던 배추는 모두 김치가 되어 가는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김장에 동참은 커녕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도무지 내가 일이라고 뭐 하는 꼴을 못 봐 내시던 분이셨다. 바느질이며 뭐며 그렇게 못하는 일이 없이 모든 걸 가르쳐 시집 보낸 언니가 시집살이를 호되게 했다는 걸 아시면서 아래 두 딸은 맹세코 일을 가르치지 않으리라 마음으로 굳게 다짐을 하셨단다그래서 늘 하시던 말씀이 남의 머리 속에 있는 글 배우는 게 어렵지 일이 뭐가 어려우냐하시면서 자기의 철학을 은연 중 우리에게 주입 시키려 하셨고, 자주 아프고 허약한 딸, 나에게 심하게 그 원칙을 적용 하셨다.

 

그런 세월을 살던 중에 나는 결혼을 했고, 엄마는 머릿 속에 우리 살림 걱정만 있는 사람처럼 비쳤으니, 그 부담은 전적으로 나의 몫으로 일상에서 적잖이 고단한 부분이었다. 

 

심약한데다 일이라고는 시키지 않은 채 시집을 보냈으니 그 근심이 오죽했으랴 싶은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훗날의 이야기이고 당시에는 내 나름 살림을 잘 꾸리고 있는데 뭣 때문에 과잉 걱정을 하시나 하며 언잖은 반응을 내 보이곤 했었다. 내 각오와 생각과는 달리 엄마는 티나게 마음을 쓰셨으며, 특히 한꺼번에 많은 노동을 해야 하는 김장 걱정을 무척 하셨다.

'김장은 언제 할 텐가, 내가 가겠다,...'

그런데 막상 오시면 배추를 어떻게 절이며, 양념 준비는 어떻게 하는 게 맛있고, 등등 필요한 사항을 가르쳐 줄 기색은 도무지 없이 혼자 일만 하신다. 아주 영원히 김장은 자기가 해 주실 듯이 하시고, 물론 나는 잔심부름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딸네 집에 가서 일하시고 집에 가서 몸져 누우신다면 올캐 언니 보기가 적이 민망할 것같으니, 그저 잠시 딸네 집에 다니러 가노라 하시면서 몰래 일 바지 하나를 챙겨 오시는 센스까지 발휘 하시는 그런 분이셨그렇게 들입다 일만 하시고 바로 부리나케 가시는 것이 나는 너무 싫었다. 

엄마는 몸놀림이 가볍고 부지런함이 체화하신 분이시지만 빨래니 설거지니 따위 궂은 일은 일생 하시질 않으셨는데 우리 집에 오셔서 유독 찬물 일을 하시는 것이 나는 싫었다.

더구나 자기 사위나 손주들만 먹일 김치도 아닌 것을, 또 다른 우리 시집 식구들까지 먹어야 하는 김장을 엄마가 거들어야 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딸이 힘드는 것 덜어 주면 그만이지 뭐 이지가지 이유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라 서로 계산법이 달랐던 것이다.

 

생각다 못해 어느 해 엄마 전화 오기 전에 미리 김장을 해 보겠다고 배추를 사서 현관에 쌓아두고 저녁 준비를 하는데 전화를 하셨었다.

언제 김장 할려고? 춥기 전에 해 넣지.”

아이쿠! 하는 수 없이 오늘 샀노라고 했더니 애들 번거롭게 지금 만지지 말고 현관에 가만히 그대로 두라 하신다. 내가 내일 일찍 갈테니.....물론 엄마는 아침 일찍 오셨고 그 잽싼 손으로 나는 수월한 김장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드디어 나 혼자 김장을 감행하는 기회를 가졌다엄마 전화를 받기 전에 김장을 해 치우기로 작심하고 배추를 아주 일찍 사버린 것이다그런데 각오와는 달리, 이게 웬 일인가.

김치 양념 준비라는 것이 녹녹한 일이 아닌 것으로, 재료를 모두 다듬고, 맑은 물이 나게 씻고(엄마가 자주 쓰시던 문자), 다지고, 썰고, 채 쳐야 하는 등 하나 하나 손을 거쳐야 함은 물론, 소금 간해 둔 배추는 한번씩 뒤집어 주어야 하였으니....... 준비를 하다 보니 밤을 꼬박 새우게 된 것이다. ― 나는 젊은 시절에 일하다 밤을 잘 새웠다  ―

배추를 씻어 채반에 받쳐 두고, 양념을 잘 준비를 모두 해 둔 것까지는 좋은데 허리가 굴신이 되지 않으면서 끊어지게 아픈 것이다.

 

식구들이 다들 나가고, 아침 난방이 들어 오는 시간, 따뜻한 방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엎드리니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것이다. 공연히 서러운 마음이 들어 훌쩍거리고 있는데,

 띵동

이른 아침에 누군가 하고 겨우 일어나서 나가니 이게 웬일인가 엄마가 오신 것이다.

“너가 왜 이렇게 김장을 안 하나 싶어 와 봤는데하신다.

예리한 촉수를 가지신 엄마만이 가질 수 있는 선견지명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다 준비를 해 뒀고, 김치 속만 넣으면 된다고 하였더니

얘가 지금 뭐를 했나. 이걸 너 혼자 했다고? 참 얄궂다. 어째 이리 깔끔하게 마련해 놨나. 기가 찬다. 정말 미구다 미구.” (미구는 아주 야무지다는 표현으로 엄마가 자주 쓰시던 방언?)

 

가르치지 않아도 어깨 넘어 배운 서당개 풍월이라는 게 있는데도, 나 홀로 완전히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부엌으로 또 배추를 씻어 둔 목욕탕으로 오가시면서 하시는 말씀

 별 일이다. 별일.” “미구다. 미구

'아이가 초등학교엘 다니는 엄마인 나를 이렇게 과소평가 하시다니!'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었다고 기억한다.

 

남들이 들으면 싱겁고 웃기는 상황이지만 엄마에게 또 나에게는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일 안 시켜 팔자에 일이 없이 살게 하려 했던 소망이 보기 좋게 빗나 갔으니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 주겠다는 엄마의 열망과는 달리 나는 엄마의 도움을 간섭으로 여기며 홀로 서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내 힘든 모습을 엄마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으며, 나에게 보내는 지나친 관심을 끊어 주시기만을 고대했다.

 

그날 그렇게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가셨던 일은 내 김장 역사의 기억할만한 한 변화였으니 적어도 일년에 하루 김장 하는 날이면 잠 자던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되살아 난다. 참 따듯한 기억이다.

 

돌이켜 보면 딸네 집이라고 오셔서 딸이 차린 밥상을 받고 편히 쉬면서 커피나 마시고 잡담을 늘어 놓고 하는 평온하고 느긋한 장면이 나와 엄마 사이에는 아예 없었던 것 같다젊은 시절 많은 식구들과 살아야 했던 나에게 그건 호사였고, 그걸 아시는 엄마는 일이 없으면 오시지 않으셨으며나 스스로 엄마는 시답잖게 시간 보내는 걸 그다지 좋게 보시지 않는이시다 라고 아전인수로 생각을 굳혀 갔고 나를 쇠뇌해 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결론은 참 무심한 딸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얼마 전 신 달자 시인의 수필집 엄마와 딸을 읽었었다시인은 글로서 엄마에게 용서와 사랑을 바치고, 엄마에게 진 빚을 갚아 내는 것 같았다내생에 엄마가 자기 딸로 태어나 흠뻑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소망해 보는 걸 보면.....딸이 부족해 하고, 절망에 빠져 드는 걸 바라 보는 엄마의 가슴은 타고 또 타들어 가 마치내 숯검뎅이가 된다는 걸 딸은 미처 모른다. 자기가 엄마가 되어 가슴에 숯을 구워 보지 않은 세월에는. 

 

 글 속에서 신 달자 시인과 엄마는 서로 큰 소리를 내며 다투기도 하고 싫은 소리를 거침 없이 하는 민낯의 인간적인 관계를 보여 주었고, 그것은 훈훈하고 끈끈한 애증의 관계로 비춰졌다.

 

나와 엄마와의 모녀 관계에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부분이라 살짝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함부로 반항하지도 않았으며, 또 우리 엄마는 많은 남매를 키우시면서도 아이를 때리고 소리 지르고 욕을 퍼붓거나 하며 키우시지를 않으셨다.그렇다고 뭐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흐리멍덩하게 대충 보아 넘기시는 일은 절대로 없으셨다. 오히려 반대이다. 꼭 집어 나무라시고 잔소리를 하시고 넘어 가는 성품이셨다그래서 우리는 엄마에게 버릇 없이 굴거나 쓰잘머리 없는 신소리나 농담을 터 놓고 해가는 그런 허물 없는 관계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흔히 세상의 많은 딸들은 마음을 다치거나 몸이 힘들면 친정엘 가곤 한다가서 시댁 흉도 보고 분이 풀리도록 울고 웃다 온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내 고통을 엄마에게 호소해 보려 하지 않았다고통은 늘 나 혼자 감당했고, 한 없이 외로웠고, 홀로 고독을 키우며 살았다고 해야겠다.

 

금지옥엽 맏딸이 상상 밖의 시집살이를 한다고 하는 소문에 사위에게 한마디 하셨다지 않았던가!.

내 딸은 절대 누릉지를 먹이지 않고 키웠다네” 

여기서 누룽지는 단순한 누룽지가 아니며 그 함의는 큰 것이다. 이후 형부는 자기 어머니가 언니에게 누릉지를 먹일까봐 노심초사, 늘 자기가 먹어 버렸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데 내 어찌 힘든 현실을 말로 다 하여 엄마에게 괴로움을 안긴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늘 행복을 가장했으니, 마음이 아플 때 나의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중첩되는 형국에 처했다. 내 분심은 혼자 삭여야 하고, 엄마 걱정도 안 듣게 해야 하는, 그야말로 이중고인 것이다.

 

당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의 처방이어야 하는데, 자존심을 다친 엄마가 나를 보호하고 옹호하고 나서면서 남편 이하 내 가족을 성토하고 공격하고 미움을 갖게 만든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효과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적극적으로 한 나머지, 어느새 내게는 양보하고 인내하는 습관만 남아, 얼간이와 진배 없는 고독한 허수아비의 세월을 살아내야만 했던 것 같다.

그 알량한 판단력은 내 고통의 세월을 아주 오래 지속 시켜 주는 부작용을 낳고야 말았다는 걸 이제 와서 깨닫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엄마를 절망 시키지 않은 일은 잘한 일일 것이다.

저승에 계신 엄마에게 지금은 말할 수 있고, 내 얘기를 듣고 계신다면 일단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도
'어린 것이 그런 맘을 가졌다니, 참 장하다..."고 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 생전 엄마에게서 칭찬을 들을 만치 들으며 살아 온 나로서 엄마에게 더한 칭찬을 바랄 수는 없다. 다만 그 칭찬이 공허해진 것이 슬퍼질 뿐이다. 나에게 해 주시던 칭찬의 말은 훗날 우리 아이들에게로 몽땅 옮겨져, 착하다느니 예쁘다느니 등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고, 칭찬을 찾다 찾다 못해 외손자가 학교에서 실과 시간에 물김치를 담아서 들고 온 것을 두고, 그렇게 맛있게 담을 수가 없다 하시며 두고 두고 동네방네 광고를 하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 칭찬과 자랑은 우리 아이들 무의식의 강 저변으로 흘러 들어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맑은 기운으로 도도히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애잔해마지 않던 엄마의 딸 나는 지금 시집 보낸 딸, 그것도 달려 가 김장을 척척 해줄 수도 없는 미국에 가서 살게 된 딸로 하여 마음이 아프면서 뒤늦게 엄마의 마음을 십이분 이해하고 있다.

절인 배추잎에 양념을 싸서 아이들에게 한 입 넣어 주고 싶은 작은 일이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그 시절 엄마에게 우리 집 김장은 행복의 일부분일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해 본다.

  

갓 담은 김치를 굴과 곁들여 남편과 점심을 먹었다.

'김치가 아주 맛있는데!"

사실 내가 만들었어도 맛 있다는  생각을 은근히 하고 있던 중이면서 나는 겸양을 섞어 대답했다.

"배추가 맛 있어서 그런가봐요"

남편은 불쑥 제안을 한다.

"아이들 좀 갖다 주지. 지금 맛 있을 때 먹으면 좋잖아"

김치를 받고 놀랄 며느리를 생각하며 남편에게 김치를 들려 보냈다.

아이들 입에 들어 갈 꺼라는 즐거움에 김치통을 들고 성큼 나서는 남편 모습을 보니 문득 드는 생각,

가족을 몹시 사랑하던 저 자상함을 장모님은 그렇게 칭찬하고 사랑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