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6년

'채식주의자' - 경계 바깥의 삶

수행화 2016. 7. 14. 23:37

 

 

 

 

작가 '한 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더부러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 작업도 수준 높다고들 하였다.

2016년은 그래서 '채식주의'를 읽고 넘겨야 할 것 같았다.

 

소설은 3부로 나뉘어 있고, 1부는 남편이 화자이고, 2부는 형부가 화자, 그리고 3부는 언니가 화자가 되어 줄거리를 엮어 가는 연작 형식의 소설이다.

 

남편이 보기에 아내 영혜는 특별한 매력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한 단점도 없어 사랑한다기 보다 함께 살기 편안한 정도의 아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아내는 스스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남편에게까지 나물만 먹이고 꿈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않으며, 잠자리를 거부하며, 가죽 구두를 모두 버리는 등 홀로 변해 가고 있었으나 남편은 그 고집을 말리지 못한다. 몸 상한다며 어르고 달래고 하는 친정 식구 누구의 말도 먹히지 않는 상태로 치닫고, 급기야 아버지는 고기를 영혜의 입에 강제로 쳐 넣으며 비극 1막은 절정에 이른다.

이 일로 영혜는 칼로 자기 팔을 그었고 병원에 실려 가는 소동을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상의를 벗고 앉아 있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상, 그래서 누구도 이해가 안되는 세계에 들어간 사람처럼 지낸다. 남편은 더 이상 함정에 빠질 수 없다며 아내 곁을 떠나 버린다.

 

그렇게 그녀는 꿈이 시키는대로 몸이 시키는대로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점점 더 여위어만 간다.

 

한편 영혜의 형부는 미대를 나온 작가라고 하면서 생계에 보탬은 되지 않고, 영혜 언니의 화장품 가게 수입으로 어려움은 없이 살아간다. 나신에 바디 페인팅을 한 남녀로 비디오 작업을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그는 이상하게도 몽고반점에 몹시 집착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에게서 영혜는 아직도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처제에게 딴 마음을 품는다.

   

"....이제는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 다는 것, 곡식과 나물과 날야채만 먹는다는 것마저 그 푸른 꽃잎같은 반점의 이미지와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어울리게 느꼈으며, ....그의 운명에 대한 해독할 수 없는 , 충격적인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 저 너머에 살고 있는 듯한 처제의 모습, 모든 욕망이 거둬진 듯한 모습에 미친듯이 이끌리며 그는 마침내 돌아 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된다. 자기 중심적이고 무책임한 형부는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얻겠다며 욕망의 불길에 뛰어 들었고, 결과적으로 진정 유일한 작품인 아들과 가족과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바디 페인팅의 남녀, 그 기묘한 영상에 과연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했는지, 자신의 전부를 잃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인지, 일탈이 예술로 승화될 일인지 평범 속에 사는 우리 독자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규범이나 약속을 내던지고, 아전인수의 이기심과 욕망을 택한 남편은 무언의 폭력으로 가족에게 거대한 고통의 폭풍을 안겨 준다. 

 

일상 생활에 서투른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아들을 키우며 선량하고 침착하게 살아가던 언니 앞에게 형벌같은 세월이 가로 버티고 있다. 사건 이후 남편은 잠적했으며, 동생은 정신 병원에 격리되어 버렸다.

 

동생이 채식주의자가 되면서부터 허물어진 모든 것에서 비롯된 고통은 온전히 언니의 몫이 된 것이다. 진창이 된 삶을 언니 자기에게 던지고 혼자서 정상의 경계 저편에 건너 가 있는 동생의 정신을 원망하고, 그 용서할 수 없는 무책임에 분노한다. 하지만 언니는 동생을 이해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연민하고 보호자가 되어 돌보는 길을 선택하였고 불면의 밤은 길어져만 간다. 그렇게 삶은 이어져야 했고, 언니는 규칙적으로 동생을 만나러 가고 동생은 신경성 거식증에 들어 점점 더 도리킬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언제나처럼 고개를 돌려 병원 안뜰의 느티나무를 내다 본다. 수령이 사백년은 되어 보이는 고목이다.
맑은 날에 수많은 가지들을 펼치고 햇빛을 반사하던 저 나무는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같았는데, 비에 잠긴 오늘은 할말을 안으로 감춘 과묵한 사람 같다. 늙은 밑동의 껍질은 흠뻑 젖어 저녁처럼 어둡고, 가지의 잎사귀들은 말없이 떨며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주제를 받쳐 주는 무심하고 아름다운 표현들이 있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읽어 나가지만 시름이 밀려 오는 건 사실이다. 그렇게 마음 아프다. 
"영혜야-" 불러 보고 먹을 것을 권해 보며 동생을 바라 보는 언니를 떠올리면 슬프다. 

"지금 그녀가 남 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 전에 , 보통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달 동안 그녀는 이따금 혼란 속에서 생각해왔다. 지우가 아니라면 그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 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마침내 언니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되고 어느 날 새벽 단단한 밧줄을 찾아 들고 아들, 지우가 깨기 전 집을 나서 산을 헤맨다. 하지만 새벽 박명 속에서 숲이 보내준 것은 따뜻한 위안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서늘하게 퍼붓는 생명의 말이어서, 푸른 불길처럼 강렬한 생명의 말이어서, 언니는 서둘러 산을 내려 오고야 만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도 납득할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ㅡ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다."

      동생은 스스로 동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며, 나무이고 싶어 한다. 꿈에 물구나무를 서고, 땅 속으로 끝 없이 파고 들고.....마침내 다리 사이에서 꽃을 피운다는 망상에 들어 있고, 그래서  음식은 필요 없고 햇빛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은듯이 누워 있는 동생에게 조용히 일러 주는 말이 우리 귀를 공명한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꿈 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꿈이었으면, 거품처럼 홀연히 사라져 다시 일어나지 않을 꿈이었으면 하는 현실은 얼마든지 있다. 도리킬 수 없는 운명에 골몰하면서도 현실에 성실히 헌신하는 언니가 헝클어진 자기 앞의 인생을 받아 들이며 헤쳐 나가는 모습이 전사처럼 굳세다. 그러나 한바탕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의 독백은 애달픈 호소로 들린다. 

     결국 치료는 한계를 보이고 생명에 위협이 온 동생을 구급차에 실어 큰 병원으로 옯기려 데리고 나온다. 가로의 나무들이 뿜어 내는 푸른 빛에다 정답이 나올 수 없을 질문을 던져 보며 앉아 있는 언니의 어두운 얼굴이 오래 남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자기 인내의 함량을 넘어선 거대한 불행 앞에서, 누군들 어찌 이상 행동이 나타내지 않을 것이며,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폭발하고야 말 것같은 광기가 문득 찾아 오지 않을 것인가! 상상은 어렵지 않다.

인내는 인간의 고귀한 품성인지라,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전 이성과 노력을 기울여 고통과 사투를 벌이며 그 시간들을 질기게 살아 내며 균형을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의 자격으로, 어른이라는 책임감으로, 사명감으로.....
 
예술가가 추구하겠다는 자신의 영감과 열정이 가족과 일상과 책임감보다 우월한 가치인가?
왜 고통은 인내하고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양보하는 선량한 사람의 몫이란 말인가?
나는 작가가 건네 주는 사상을 선뜻 받아 들일 수 없어 대략 난감한 기분에 빠져 들고 말았다. 

 

깨면 그만인 꿈과 같은 일을 소설같다고들 흔히 한다.
책 속에 살던 인생은 책갈피 속에서만 존재하건만, 그래서 소설이건만, 불평등한 인과를 보는 것이 편치가 않다. 주제가 독특해서인지, 감정의 움직임을 잘게 잘게 포착해서 보여 주는 글이 소화하기 쉬워서인지, 단숨에 읽어 나가게 된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단조로운 주제에 무게를 주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읽었다.

인생이 존엄을 지키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본다.
빛나는 인생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자기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이성까지는 잃지 말아야 할 일이다.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고 주어진 운명을 공손히 받아 들이는 영혜 언니, 그 여인에게 축복을 빌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