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6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수행화 2016. 8. 26. 16:15

 

자고 일어나니 가을이 방 안까지 찾아 왔다.

밤을 도와 얼마나 잰 걸음으로 달려 온 것일까?

그렇게 맹렬하던 여름의 정령이 후두둑거리던 간 밤 빗줄기를 타고 황망히 가버린 모양이다.

어제와 오늘이 딴 세상이라 가을이 참 낯설기까지 하다. 공연히 가슴이 벅차고 신선한 흥분까지 온다.  

 

100년만의 기록적인 더위는 전기료 폭탄, 쌀 소비 감소, 냉방 잘 되는 극장이나 백화점에서 시간 보내기.......

일상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으며,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남겼던 맹랑한 여름이었다.

 

여름이 더울수록, 피서가 간절할 수록 나는 꼼짝 하지 않는 집순이 모드의 피서에 들어 가곤 한다.

차가운 방바닥이나, 바람이 통하는 북쪽 창문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보는 것, 피서라기 보다 더위를 마주 보며 무시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매미, 베짱이 흉내를 내는 것같아 적이 민망하기도 하지만, 냉방을 싫어하는 나는 그렇게 여름을 난다.

 

김 성동의 '만다라',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신부의 '침묵의 기술', 정 채봉의 '단 하나 뿐인 당신에게', 김 훈의 '라면을 끓이며'....., 책상 위에 쌓였던 책들이다. 크게 주제가 무거워 보이지 않고, 책장이 잘 넘어가게 보이는 것들로 선택하다 보니 가짓수만 물씬 불어 났다.

읽으면서 내심, "그렇기도 하겠군",  "맞아, 그 생각에 공감이 가네"  혹은 "자기의 지극히 사적인 일을 활자화해도 소설이 되는구나", "작가는 정말이지 만물박사야" 이런 저런 감상으로 머릿 속에 정리를 해나갔는데,

 

그 중, 한 권의 책은 책장을 덮으면서 그 극적인 반전에 놀란 나머지,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느라 반전의 힌트를 놓쳐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서둘러 첫 페이지부터 다시 살펴 읽게 되는, 혼란을 안겨 주었다. 

 '줄리언 반스'가 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원제는 는 <Sence Of an Ending>이라는 책이다.

 

그러나 다만 250페이지의 소설이 500페이지로 늘어나 눈만 고생을 했을 뿐, 반전의 낌새를 찾지 못했고, 제목처럼 왜 예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짐작을 못하고 말았다 . 제목이 반전, 그 자체 라 해도 될 듯 싶다.

나는 결말이 손에 잡히는 그런 소설에 길들여져 빈곤한 상상력이 확인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국을 대표한다는 작가 줄리언 반스는 1946년 생으로, 196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연령이니, 소설의 1인칭 화자가 살아 온 시대를 살아 온 사람이다 .

 

주인공 토니 웹스터는 자칭 평균치라는 말이 자기에게 아주 적합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 와 지금 노인이 된 사람이다. 

모든 것에서의 평균,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 뿐, 환희나 절망이라는 말 같은 건, 저 소설에서나 읽어 볼 정도의 삶을 영위하였고, 퇴직 후 여러 봉사 활동을 하며 평균적 노인으로 살아 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뜬금 없게도, 학창 시절 잠시 사귀었던 여자 친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500파운드를 상속하였으니 수령하라는 변호사의 편지를 받게 된다.

물론 상속을 받을 어떤 이유도 없는지라, 40년 세월을 거슬러 옛 여자 친구를 수소문해 보면서 학창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그는 학창 시절에 돈독하게 우정을 나누는 친구 넷이 있었으며, 그 중 에이드리언은 아주 각별한 존재였다.

모범적인 수재로 모든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깊은 철학적 사고를 가진 지성적인 친구인지라 늘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 보았고 함께 추억을 공유하며 성장한다.

이후 기대에 걸맞게 에이드리언은 케임브릿지 대학의 장학생이 되고, 토니 자신과 다른 친구들은 각기 다른 대학으로 진학 하면서 우정을 약속하고 헤어지게 된다.

 

토니와 베로니카는 1년 정도 사귀었고, 여름 방학 기간 중 1주일을 그 친구의 집에서 보낸 적이 있었으며, 당시 가족들로부터 냉랭한 대우를 받았다고 기억을 한다.

그리고 대학 시절 에이드리언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여자 친구 베로니카를 소개 하기도 했는네, 얼마 후 친구 에이드리언으로 부터 자기가 베로니카와 사귀고 싶으니 양해해 달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당시 그 출중한 친구, 에이드리언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의 감정이 끓어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허세를 부려가며, 경멸과 저주를 가득 담은 편지를 띄우게 된다. 그리고 기억은 토니 자기에게 썩 유리하게 포장된 채, 그 편지에 대해 까맣게 잊어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후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듣고 놀랐지만 크게 충격을 받진 않았다.

그 친구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된 결론에 따라 행동했으며, 평소에도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에 그의 자살에 크게 충격 받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인간이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니 무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뭐, 그런 식의 철학적 사고를 펼치던 친구였으니 자기다웁게  인생과 죽음을 정리하였나 보다 하며 단순하게 넘어 간다.

 

그리고 결혼, 이혼을 거쳤으며 지금은 늙어 한 아이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고, 허황한 일을 꿈도 꾸지 않는 아주 무난한 일상을 살고 있던 중, 갑자기 일어난 이 상속 사건으로 과거 기억을 끌어내 보게 되었고, 베로니카와 재회하게 된다.

 

40년 세월 후 베로니카를 다시 만나면서 혹시 지금도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만과 착각에 빠져 행동하는 토니에게 베로니카는 상상 이상으로 냉정하게 군다. 런 어느 날 베로니카는 토니를 교외의 주택가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자택 간호사와 도우미의 보살핌을 받는 마흔 쯤 되어 보이는 성해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을 보게 된다.그 부족해 보이는 청년의 키와 눈과 여러 면에서 놀랍게도 친구 에이드리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 사이의 아이라 직감한다. 예감이 적중하다고 믿게된다.

 

그러나 다시 변호사로부터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쓴 사과의 글과 동봉된 한장의 편지 복사본을 전해 받으면서 예감은 빗나가고, 고통의 폭풍은 몰아친 것이다.

 

".............각자의 인간관계에 독처럼 작용하는 고통이 평생 이어지길, 사실 마음 한켠으론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복수의 과녁은 그 조준이 정확해야 하는 법........."

 

학창 시절에 쓴 치기어린 편지, 토니 자신이 40년 전에 쓴 편지,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쏟아 냈던 저주의 말들, 잊고 있던 편지가 동봉된 것이다. 허세를 부리며 기고만장한 태도로 퍼부은 독설과 저주가 시간의 에너지와 융합하여 정확하게 현실적 불운으로 와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편지가 친구의 자살에 어떤 계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회한은 당연 그 이상일 것이다.

후회한다고 하기에도 어처구니 없을 쓰레기같은 말들을 태연히 쏟아낸 편지를 띄운  후 어떻게 기억에서 완벽하게 몰아 내 버릴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기억이란 또 얼마나 불확실하다는 말인가?  기억은 자기가 가공하고 나름으로 잘 포장하여 기억창고에 잘 저장한다면 얼마든지 진실은 왜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런가?

밀려 드는 후회의 감정에 편지도 쓰고 여러 길을 모색해 보지만 누구도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끔 차를 몰아 청년을 만났던 교외 주택가를 배회하였고, 어느 날 간병인과 그 청년의 그룹을 만나게 된다.

자기, 토니 웹스터는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더부러 학교 친구라 소개를 하는데, 의외로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에이드리언- 그 청년의 이름도 에이드리언 - 이 선생님을 보면 힘들어 하니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달라"는 요지의 부탁을 하면서 잘 못 이해한 점을 일러 준다.

 

'메리(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가 아니고 누나이다, 어머니는 반년 전에 돌아 가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와 달라' 는 말을 간병인으로부터 듣게 된다.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토니도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왜 어머니가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일기나 소지품을 관리했는지, 왜 500파운드를 자기에게 남겼는가 하는 의문과 궁금증은 이 뜻밖의 말을 들으며 풀리고 있다.

40년 전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 어머니가 임신 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택했고, 이후 어머니는 노산과 난산으로 인하여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했으며,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청년, 에이드리언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왜 에이드리언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가하는 어떤 경위는 찾을 수 없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음에 걸렸던 것은 저주에 찬 토니의 편지였던 것 같은데, 그녀의 심경을 예측하고 추정해 보는 것도 토니와 독자의 몫이 되니, 자기 상식선에서 이해 해야할 것이다.

 

누구와도 각을 세우지 않고 살아 누구에게서도 상처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던 자, 토니의 일상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고, 기억에 기반한 전 인생을 다시 살펴 보아야 할 처지가 된다. 500파운드의 상속과 함께 허리케인보다 더 강력한 혼돈이 몰려 온 거였다. 도리킬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상처를 남에게 남긴 비정한 사람이라는 굴레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는 일이다.

젊었다고 해서, 당시에는 모든 면에서 무지했던 시절이었노라고 해서 분별 없는 행동이 용서 받을 수는 없다. 이제 인생의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토니는 아마 후회의 감정과 고통으로 내내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란.....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이 없고 슬픈 마음으로 책을 덮으면서 후회와 절망의 감정은 나 자신에게로 전이 되어,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긴 세월을 살아 오면서 함부로 뱉아버린 말은 없는가?

남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말끔히 잊고 살아 왔던 일은 없을까? 

 

기억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감정의 축적이어서 정교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기억을 다듬고 곱씹는 과정에서 혹은 퇴색되고 혹은 윤색된 채로 시간과 함께 흘러 기억의 오류로 고착될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내 기억이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혹은 오류일 수도 있다는 점.

음에 새겨보지 못한 새로운 발견이라 밑줄을 긋고 싶어진다.

40년 전의 편지 한 통이 불러 온 비극은 끝이 안 보여, 슬픈 전설의 한 부분이라고 해야겠다. 

작가가 은유적으로 남긴 단서를 비집어 보면서 예측해 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우리 말 가운데 '말이 씨가 된다.'라는 표현을 나는 늘 무겁게 받아 들이는 편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최후의 한마디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며 저주의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으려 하는 것도 모두 나쁜 말의 씨를 뿌리지 않고 싶은 노력의 일환이라 생각한다.막말은 말 그대로 마지막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이거늘, 온 거리에 막말이 떠돌아 다니는 세상이 두렵기까지 하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말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저주의 말, 상처의 말은 화석이 되어 가슴에 단단히 남아 있다는 걸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의 축적처럼 아우르며 더해지는 일도 많지만 아무래도 뺄 일이 더 많아진다.

일이 적어지고, 친구가 줄어지고, 대화도 줄어지고, 즐거움도 줄어지는 걸 느낀다.

하여 줄어 드는 말은 더욱 줄이고, 더 정제해야 하리라 싶다.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줄리언 반스는 2011년 이 작품으로 부커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문학적인 가치는 잘 모르겠으나, 글이 무척 재치와 위트가 있고, 기억이 얼마나 자기 편의로 형성되는지를 비롯한 인간 심리를 살펴 보고,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대책 없는 욕망의 얼굴도 보여 준다. 

그러나 치졸한 인간의 양면성 등 어두울 수 있는 부분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며 잘 가려주어 글에 품위가 주어지며 담담하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