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6년

'애프터 유' - 뒤를 돌아 보며 앞으로 나아가기

수행화 2016. 10. 5. 23:13

 

 

'자신감을 갖고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 봐요.

이 좁은 시골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예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멋진 인생을 꿈 꾸어 봐요.'

윌 트레이너는 이러한 충고에, 간곡한 당부와 함께 얼마간의 돈을 주인공 루이자에게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고 그 사람, 윌 트레이너가 떠나면서 '미 비포 유'는 막을 내렸다.

 

소설이 허구인줄 알면서도 누군가의 인생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인간을 만났다는 것에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읽은 기억에, 그 후속작, '애프터 유'가 나왔다고 하여 바로 책을 구매했었다. 

 

'미 비포 유'에서 이성적이며, 초월적인 인간애를 보았다면, '애프터 유'에서는 스치고 부대끼며 서로 상처를 입히고 치유해 가는, 치열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같다.     

 

윌 크레이너가 죽은 후 루이자는 윌이 일깨워준 욕구에 사로잡혀 파리로 일단 떠난다. 낯선 거리를 걷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 대화하며 그가 죽은 후 9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마치 피부를 한겹 잃어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강렬하게 느껴졌으며, 집으로 돌아 가고 싶지는 않아졌다. 고향의 모든 것이  낡고 사소해 보였으며, 멀찍이 두고 분석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도시는 그 이상 멋진 곳은 아니었다. 마치 급히 샀더니 도무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처럼 느껴질 뿐이어서, 결국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착한다.

런던에 작은 집을 사고, 직장을 구하며 변화를 꾀해 보지만 여전히 실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도시의 스카이라인, 어둠의 위로와 익명성, 그리고 이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나는 고개를 들고 밤바람을 느끼며 저 아래어서 들려 오는 웃음 소리, 병이 깨지는 소리, 도시로 들어가는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 마치 혈액이 공급되듯 끊임없이 도시로 흘러들어가는 자동차의 미등을 바라 보았다"

 

윌이 죽은 후 혼란은 가시지 않고, 그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무엇보다 그를 사랑했었다는 슬픔에 완벽히 갇혀버린 루이자, 

일터에서 불만이 쌓이고, 불면의 밤이 잦아지면서, 홀로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도시의 밤을 바라 보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버리더니, 급기야 옥상 난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내었고, 골반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기도 한다.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이진 것은 훗날의 일.

옥상에서 고의로 떨어져 내렸다고 염려한 어버지는 '새출발 서클'이라는 모임에 가입을 권유한다. 가족을 잃어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대화하며, 새 생활의 의욕을 갖게하는 카운슬링의 모임으로, 루이자도 참석하며 남은 자들끼리 서로의 슬픔과 고충을 얘기하고 또 듣곤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어느 늦은 밤에 '릴리'라는 의문의 아이가 나타나서 자기가 죽은 윌 트레이너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최고의 지성을 갖춘 완벽한 남자, 윌에게 열 여섯 살에 이르는 딸이 있었다는 것, 더구나 이 소녀는 학교를 자퇴하고 클럽엘 다니고 담배를 피우는 등등, 말하자면 가출 비행 청소년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에 루이지는 심한 충격을 받게된다.

독자, 우리도 물론 믿기지 않는 현실에 놀라며 배신감에 사로 잡힌다. 

 

아빠 얘기를 듣겠다며 불쑥 나타난 아이는 이후 루이자의 일상에 지대한 부담을 주게 된다. 윌은 대학 졸업 전에 릴리의 엄마와 사귀다 헤어졌고, 헤어진 후에 아이 가진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홀로 아이를 낳은 후 부유한 금융인과 결혼하였고, 릴리는 양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혼란에 빠진다.

 

이 대책 없이 무례하고, 엉망으로 행동하는 릴리를 루이자는 이상하게도 거부하지 못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호화로운 엄마의 집을 버리고 루이자의 좁은 집에 와서 함께 지내게 된다. 직장 생활의 피로는 극에 달했고, 여전히 윌의 죽음과는 화해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결국 그 아이를 위해 가구를 사들이고, 식사 준비를 하는 등 생활을 바꾸게 된다.

 

"진짜 부모는 아니지만 부모 노릇을 하면서 배우게 된 것이 있다. 어떤 일을 해도 대체로 틀리게 되어 있다는 것. 잔인하거나 무시하거나 불성실하면 아이이게 상처를 남긴다는 것.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고 격려해 주고 아무리 작은 성과라도, 칭찬을 해주면 또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망친다는 것......."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돌봐 주면 응분의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나, 그런 분위기 조성이 전혀 안되는 억울할 상황이건만, 윌에 대한 애정으로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여간 답답한 짓이 아니다.

직장에 휴가를 내가며 가출한 아이를 미친듯이 찾아 다니지를 않나, 꿈에도 그리던 뉴욕에서의 일자리 제의를 쉽게 거절해 버리질 않나 해가며, 릴리가 야기한 많은 문제들을 발벗고 해결해 내고서 마침내 윌 가족의 품에 안기게 해 주는 등....

루이자가 마치 '착한 여자 신드롬'에 걸린 것처럼 아이 걱정에 온통 매달려 있는 사이, 성실하고 멋진 남자,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도 좋아할 수 있는 남자, 샘은 루이자에게서 떠나려 하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기 자신을 불쏘시개 삼으려 하는 여자,

죽은 자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 하는 여자,

배경에 유령을 거느리고 사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여자의 마음에 자신이 깃들일 자리는 없는 것으로 판단한 그 남자는 이별이라는 어려운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우리네 표현으로 하자면,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을 모른다'는 식으로, 윌의 아이와 그 가족의 일에 몰두하면서 막상 자기가 쥐고 있던 진정 소중한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을 넋 놓고 바라 봐야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순간 루이자의 의식이 번쩍 깨어 난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지만, 그 세상에 남아줄만큼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던 남자를 나는 사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사랑할지도 모르는 남자를 두려워서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안전하던 사랑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루이자는 적극적 해명으로 관계를 만회해 보려는데 어려워지고 있던 순간 운명은 루이자의 손을 들어 준다(?)

구조대원으로 일하는 샘이 사고 현장에서 총상을 입었고, 또 한번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이자는 절규한다. 다행히도 사경을 헤매다 극적으로 살아난 샘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끼면서, 허공을 맴돌던 루이자의 시선이 비로소 현실에 굳게 고정되게 된다.

사랑은 스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용기로 쟁취하고 가꾸어 가야 한다는 걸 또 보게 된다.

 

"가끔은 주위 사람들이 살아 가는 것을 보면 누구나 살면서 피해를 끼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 닦은 안경을 쓴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면 거의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든 빼앗긴 것이든 그저 무덤으로 사라진 것이든, 사랑의 무자비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릴리는 할머니 댁으로 가서 적응하며 안정을 찾아 학업을 계속하게 되고, 샘도 부상 치료를 잘 마쳤으며, 루이자와 샘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소설은 차분한 결말에 이른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팔 다리를 휘젓듯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남의 인생에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 걸어 온다는 것은 실로 굉장한 일이다. 어마 어마한 에너지로 마음의 문을 밀어야 가능한 일이다. 혼란과 불안의 시간을 거치며 정제된 에너지만으로 작동이 가능한, 그 문을 밀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가족에 헌신하고, 남을 배려하는 루이자에게 들이 닥친 가혹한 현실이 이 에너지를 분산 시킬 때의 낭패감은 나를 잠시 우울하게도 했다. 하지만 인연에 감사하고 사랑에 보답해 가는 모습이 고맙고 지혜로워 다시 사랑스러워진다.   

 

새출발 서클은 종강 파티를 통하여 죽은 사람을 진정으로 보내는 의식을 가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 주는, 명실공히 새출발을 위한 결의를  다져보자는 격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아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항상 잃어버린 이들을 함께 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이 작은 모임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그들을 짊어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짐이 아니라는 것,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를 선물로 느끼고 싶습니다.그리고 추억과 슬픔, 작은 승리를 서로 나누면서 배운 것은 슬퍼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

모두 자신만의 여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루이자는 샘의 적극적인 배려로 뉴욕의 일자리로 향한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윌이 루이자에게 펼쳐 주고 싶어 했던 멋진 인생을 향한 첫 무대가 되어주기를 기대해 보게 된다.

푸른 하늘을 향해 뜨는 비행기는 새로움과 변화의 세상으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아 우리도 늘 설레는 마음으로 올려다 보곤하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의 이별에 미래의 행복과 비상의 예감이 있어 좋았다. 잠깐의 이별은 사랑의 숙성 시간인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전편에서는 떠나는 사람이 보내는 의연한 사랑의 감정과, 남겨진 사람이 감당하는 가슴을 파고드는 사랑의 슬픔이 교차했다면, 후편, '애프터 유' 에서는 인연에 보답하는 사랑과, 슬픔을 딛고 건강한 사랑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보게 된다.

유치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해피엔딩의 소설이 주는 훈훈함이 좋다.

 

인간은 많은 관계 속에서 산다.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기도 하고 운명이 되기도 하는,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역학 관계 속에 살아 간다. 인간과 관계의 고통에 대해 몹시 가슴이 아팠던 나의 9월,

나는 나에게 벌을 주듯 하루에 몇 시간씩 책을 후벼 파기라도 하듯 읽었고, 실로 눈에 진물이 나게 읽어 내려갔다. 철학 서적도 아니고 박사 논문도 아닌 것에 눈에 웬 진물까지? 

벌 받으며 웃고 있는 내가 우습고도 장하다 싶었다.

영문판을 읽으니 철학 서적 보듯 집중을 해야 했고, 한글 번역본을 참고하니 논문 보는 경험같기도 하고.......

 

결론에 이른다.

나는 누구에게 진실로 필요하고 소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책임 강박증에 갇혀, 정작 나 자신에게 함부로 굴며 바보가 되어가던 시간들에게 화해를 구하며 나는 늦더위에 벌을 자청한 것이다.  

 눈을 아프게 하면서 화해를 구하면 영혼은 너그러워진다고 아무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설 속의 사연들로 머릿속를 채우면서 책과 더부러 흘러가는 시간에 내 영혼의 세척을 꾀해 보는 것이다.

 

태풍이 남쪽 지방에 물폭탄을 퍼부으며 쓸고 가더니 청명한 가을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차분히 와 있다.

슬픔을 이기는 것도, 불안을 걷어 내는 노력도 단숨에 될 수는 없는 일.

오늘 슬프고, 내일 슬퍼도 그런 시간들을 가로질러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나에게 긴 인생이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

나홀로 벌 주고 상 주고, 백만가지 생각을 잠 재우며 책을 넘기며 보낸 시간에 감사한다.

 

오늘의 어둠이 내일의 빛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살아 봐서 안다.

그래서 영원한 어둠이란 없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