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6년

시월을 무망하게 보내면서.

수행화 2016. 10. 28. 20:02

맑은 바람이 몇번 스치는 사이로 더위가 빠져 나가고 맹렬했던 지난 여름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예정된 순환이라지만 기적을 바라보듯 신비롭기만 하다.

산에서 시작되던 고운 단풍이 마을에 내려와 곱게 깔리며 가을은 정점을 알린다. 뙤약볕을 온 몸으로 받아내던 강직했던 나뭇잎들은 푸른 빛을 거두어 들이며 소멸의 시간이 가까웠음을 또 알린다. 자연의 시계는 헛도는 일이 절대로 없다. 

며칠 쓴 기운이 마음 한 바닥을 훑고 지나가더니, 일도 싫고 책도 싫고, 먹는 일도 지겹고, 매사에 집중이 안되는 무기력증에 빠져 버린 것 같다. 종일 맥 없이 TV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 보거나, 방으로 거실로 어슬렁거려 보기도 하고, 창 밖을 멍하니 내려다 보기도 하며 갈피 없는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게으름을 피며 시린 눈도 좀 편히 해 주려 했더니, 내 안에서 요란하게 복딱 복딱 끓는 소리를 내며 내 빈둥거리는 꼴을 못 보아 내고 있다.

 

마지 못해 대기가 쩔쩔 끓던 지난 여름에 마구잡이로 읽었던 여러 책들을 새삼 이리 저리 들추다, 김 훈 작가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다시 겅중겅중 넘겨 보았다.  

여름에 읽을 때는 매일 먹어줘야 하는 밥,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부분에 강하게 공감이 가더니, 지금은 여행을 다니는 일이나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 달리며 바라 보는 풍경들에 마음이 더 간다.

우리 몸이 받아 들이는 관심과 느낌도 이렇게 늘 달라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김 훈 작가의 자연과 물질에 대한 섬세한 통찰, 깊은 사색의 말들이 가슴에 선뜻하게 담기는 걸 느낀다. 같은 책, 다른 느낌인 것은 주제가 자유로은 산문집이라서인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책도 계절을 퍽 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이 비애가 가족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노동을 하고, 숨 가쁘게 바쁘게 살아가는 일이 궁극에 밥을 벌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금 서글퍼지는 일이다.  

 작가는 동해의 울진, 서해의 강진,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연방 등지를 여행하며, 서로 다른 질감으로 살아가는 삶의 표정들을 읽어 보았다고 했다.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의 한 자락 같다는 느낌이 설핏 들었으니, 우리의 무심한 일상에는 알게 모르게 무수한 사람들의 수고와 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우리의 하루를 완성시켜 주는 것이라는 걸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좀 더 일상을 공손하게 대하리라 생각도 해 본다.

 

라면 한 젓가락을 무심히 후루룩 넘기지 않고, 익어가는 라면을 향해, 파와 계란의 힘으로 순해지는 맛을 향해 생각하고 말하고, 식재료와 재료 사이의 교감으로 태어 나는 요리의 원리를 따져 보고, 재료와 재료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재료끼리 서로 밀고 당겨 맛을 만드는 불의 역할을 따져 보는 등의 윗트가 미소짓게 하는, 그런 작가의 관찰력과 내공이 글에 맛을 한참 더한다.

 

"나는  불과 물과 제료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내밀한 작용들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찌개가 저 혼자서 끓고 있다."

 

똑 같은 사물을 봐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 헛헛하고 답답한 내 마음, 내 가을 정서를 건드리는 글귀들이 유독 눈에 들어 온다. 

작가는 속에서 들끓는 말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아 답답하다고 하나 우리는 그 들끓는 작가의 속에서  푹 익혀져 새어 나온 말들을 눈으로 짚어가며 읽기 좋아한다.

쉽게 읽히는 글이지만 치밀하고 때로 화려하다고 까지 느껴지는 건 나만의 감상인지 모르지만  그런 공력이 든 글을 아름답게 느낀다.

 

"만경강, 김제 갯벌에 이르러 바다와 합쳐지는 풍경은 소멸이다. 강의 음악은 하구에 이르러 들리지 않는다. 강의 음역은 넓어져서 인간의 청력 범위를 넘어선다. 강과 바다와 갯벌이 저희들끼리만 듣는 소리가 따로 있지 싶다. 들리지 않는 넓은 음역을 거느린 강이, 갯벌 너머의 바다와 합쳐진다."

 

"그 사소하게 바스락거리던 것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가,

 11월에는 이런 하잖고 가벼운 것들의 무거움에 마음을 다치기 쉽다. 봄의 어린 벌레들은 가볍고 명랑하다. 봄의 벌레들은 연두색이다. 봄의 어린 벌레들은 풀잎에서 풀잎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여름의 벌레들은 초록색이다. 가을에 벌레들은 햇빛에 그을려 누레진다. 가을 벌레들의 머리통에는 숲 속에서 이리저리 긁힌 생채기가 나 있다, 가을이 더 깊어져서 11월이 끝나갈 때, 벌레들은 힘이 빠져서 양지쪽에 몰려 있다. 그것들에게도 생애가 있다. 그 사소한 것들도 생로병사와 산전수전을 통과한다. 11월에는 모두 사라진다.

11월에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길을 잃기 쉽다. 11월에는 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진다." - <11>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강물은 바다의 이끌림으로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봄부터 쉬임 없이 햇빛과 광합성을 하던 나뭇잎의 구체적인 노력들도 계절의 흐름에 실려 마침내 찬란하게 붉어지며 소멸의 길에 들어섰다.

태어난 모든 것들은 소멸하면서 완성을 이룬다고 해야 할 것이니, 소멸의 채비에 든 자연은 진실로 성실하다.

 

흐르는 강의 마음, 한 그루 생각하는 나무의 마음에서 자유로움을 전해 받는다. 무념의 마음으로 나를 떠나 보내는 일, 그렇게 모든 것은 흐르고 지나 간다는 생각을 꾸어다 해 본다. 그리고 페이지를 시나부로 넘기면서 집중의 실마리를 찾아 본다. 거기에 떠나간 자와 남은 자의 서글픈 현실과 애잔한 농촌 풍경, 어촌 풍경이 있다. 서글픔이 내 마음에 작은 위로로 오는 걸 느낀다.

 

 "old and wise'.

늙어 현명해지기를. 현명하게 늙기를 누구나 소망한다. 그러나 현명해지는 일이 잠꼬대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나의 노력에 보답이 없을 때,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없을 때, 아무 것에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때, 나의 진정이 허공으로 날아가 놓쳐버린 풍선처럼 허망함만 가득할 때, 괴로움은 외로움이 된다.

 

외로우면 외로운대로,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다만 살아가야 할 일일까, 그게 현명한 얼굴일까? 젊은 날의 외로움과 포개지면서 적이 심란해진다. 

 바깥은 가을색이 신중한 유화 한 폭처럼 깊어져만 가는데 나를 가로 지르는 생각들에 꼼짝 없이 붙잡혀 있는 것같다. 그렇게 보낸 나의 시월에게 송구한 마음이 든다.

 

이제 한뼘의 햇살을 소중히 여길 것이며, 여름 날 그렇게 찾아 다니던 바람을 이제는 피하고자 문들을 꽁공 닫아 걸 계절이 걸어 오고 있다.

화려하게 늙은 나뭇잎은 가을 마른 바람에 잎맥을 실어 떨군다. 공원에는 성급하게 떨어진 잎새들이 벌써 자기들끼리 스치우며 바스락거리고 있다. 그 사소한 소리가 가볍고 맑게 들린다.

이제 곧 맨 몸으로 서 있는 나무 발치의 흙에 햇살이 좀 더 오래 머무는 것으로 위안를 삼아야 할 것이다.

 

찬바람이 송곳처럼 옷깃을 파고 들면 모두들 잰 걸음으로 밥이 있고 불을 밝힌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보상 받지 못하는 내 노고에 애면글면하던 마음을 접기로 한다. 그리고 등불에 촉수를 올려 마음을 밝혀 짧게 남은 가을을 보듬어야겠다. 또 밥을 하고 불을 지피며 일상에 온기를 불어 넣으며  11월의 시간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길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지혜롭지는 못해도 어리석지는 않아야겠다고 또 흰 다짐을 해본다.

내가 내게 보내는 위로는 늘 허약해서 아주 힘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