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6년

'딸에게 주는 레시피'- 엄마의 내력.

수행화 2016. 12. 2. 11:57

따뜻한 것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해가 저무는 시간,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은 서로 닮았다..

외로움이 좀 더 가깝고, 불현듯 초조해지고, 온기 있는 집을 생각하고, 가족을 챙겨야 할 것같은,

그러한 정서가 서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이 그런 계절이다.

 

'딸에게 주는 레시피'.

제목이 일단 따뜻하고 정다워 읽고 싶게 하는 공 지영 작가의 글이다. 

작가가 독립해 있는 딸에게 손 쉬운 레시피를 일러주며 심중에 있는 말들을 함께 얹은 형식이니, 엄마의 철학을 녹인 언어들이 잔잔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레시피가 완성된 셈이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이 언니' 등 내가 읽은 공 작가 소설은, 가물거리는 내 기억 속에 대체로 자전적 이야기를 썼다는 느낌으로 남아 있고, 어쩌면 작가 자신의 삶과 체험이 지나치게 진솔하게 그려지지 않았나 하는 놀라움이 있었던 것같다.

 

딸이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건사하게 되면 엄마는 딸이 만들어 내야 하는 매 끼니 걱정을 덩달아 하게 된다. 요즘은 인터넷이 요리 선생이라 잘들 좇아서 한다고 하지만 엄마는 적잖이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공 작가 레시피는 짧은 시간에 내 놓을 수 있는 초간단 요리인 게 특징이다.

'자존심이 깎이는 날 먹는 안심 스테이크' '모든 게 잘못된 것같이 느껴지는 날 꿀 바나나 먹기'.....등

인생의 구비구비 길목에서 만나게되는 즐겁거나 언잖은 일들을 두런 두런 털어내 놓는 사이 요리 하나 뚝딱 나오고,  딸 인생에 소망이나 바람을 실어 보면서 또 다른 레시피 하나 끼워 넣는 것같은 재미가 있다. 레시피에 딸려 나오는 말들은 마치 인생 요리의 팁처럼 짧으나 진한 멧세지가 있다. 

 

딸로서 자랐고, 엄마가 되고, 출산을 하고, 또 아이를 키우며 늙어가는, 운명적으로 같은 길을 엄마와 딸은 서로 의지하고 위로를 주고 받으며 함께 걷게 된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양상은 크게 다를지라도, 엄마의 경험을 공유하며 서투르게 뒤따라 오고 있는 딸을 향한 엄마의 연민심은 눈물겹다고 해야겠다.

 

딸이 엄마에 의존하는 정도는 또 어떤가!

몸이 아플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엄마, 아이가 아파 답답해도 엄마, 그리고 레시피라도 궁금해지면 어김 없이 엄마를 찾게되는, 조건만 주어지면 반사적으로 엄마를 부르는 것이 딸이다. 그러기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는 늘 그 자리에서 질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성성을 버리는 것만이 남녀평등인양 하는 작금의 시류가 맘에 들지 않은 나로서는, 작가가 요리를 해 내고, 딸에게 레시피를 전하는 일련의 일들이 신선하고 고무적이라 좋아 보인다. 지극히 사적이고 평범한 일이건만 무슨 모범을 본 것처럼 매겨지고 선입견을 부수는 의외의 일같아 반갑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나, 독특한 삶을 살아온 아픔은 있으리라 짐작하는데, 어쨌거나 새롭고 즐거운 발견이라고 해야겠다.

 

글 중에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아끼라는 말에 울림이 온다.

예를 들면 때 맞춰 옷을 입어 주어 몸을 위해 주고, 정갈한 접시에 음식을 담아 품위 있는 식사를 하게 하라는 기본적인 일들이 자기를 잘 대접해 주는 것이며, 자기 존중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소중한 가치이다. 

레시피 갈피에 양념처럼 뿌려진 말들에서 힘든 시간을 살아 낸 노력과 용기를 찾을 수 있고, 특히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성실함이 보여, 특별한 사람은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떤 일에든 하지 못할 이유는 9999가지, 그러나 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하면 되니까"

 

"정말로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사회적 규범을 이탈하는 일이 거의 없어ㅡ 그런 사람이 이웃을 돕는단다."


"사람은 절대 가지고 있을 때 , 편안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지 않아, 그래서 소통은 늘 새로운 길의 모퉁이를 돌게해 주는지도 몰라.

 

"외롭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면 네 자신과 함께 있어봐라, 어차피 네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하면 누구와 있어도 외로워."

   

레시피에 얽힌 얘기를 듣다 책을 덮으니 변변한 요리도 못 시켜 보고 결혼을 했고, 엄마가 뒤를 봐 줄 사이도 없이 미국으로 가버린 딸과 나와의 10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좍 펼쳐지며 대비가 된다. 

인내를 배워 가던 딸에게 보낸 숱한 위로와 격려, 먹어 본 감각만으로 요리를 해내며 가족을 당차게 지키던 세월들에 보낸 고마운 마음, 그 애잔한 정과 시간들을 구비구비 펼치면 작가의 책보다 더 방대할 것만 같다.

 

나, 엄마는 철저히 올빼미가 되어야 했고, 의자에 몇 시간이고 붙박이가 되어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보행기에 매달린 아이를 지켜 보기도 하고, 화상에서 김치를 담고, 반찬 얘기는 부수적이지 않나 싶게 살림 얘기 아기 얘기로 시간을 쓰던 애환의 시간들이 있었다. 

딸에게 일상이 된 외로움과 두려움을 덜어 주려 분투했던 시절들을 말이다. 하지만 엄마란 그런 것이다. 힘 들기는 커녕 화상으로 거의 매일 보게되니 안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다니! 하며 문명에 감사에 또 감사를 표하기만 했다.

 

나의 경험으로, 음식 맛은 입으로 보는게 아니라 머리로 본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먹어 본 맛은 기억으로 분별하고 어림짐작으로 레시피를 궁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원리로 세상의 딸들은 맘만 먹으면 기억 속에서 엄마표 레시피를 환하게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엄마표 레시피는 세월이 얹어 준 내공과 엄마 인생의 내력을 담은 채 딸에게로 가서 더욱 깊어지지 않나 싶다.

 

지금의 엄마 나는 지난 세월 우리 엄마의 부지런함과 내공에 한참 못 미치는 걸 안다. 엄마가 연중행사로 해대던 일들의 많은 부분을 솎아 내고 건너 뛰며 간편 살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절 무렵 한과들에 들이던 공력, 떡 벌어지게 많은 갖은 떡들, 가을 볕에 말리는 각종 부각들, 가외의 마른 반찬들은 이제 전설이 되고, 우리는 인스탄트, 마트 입맛이 되어 가는 중, 사라져 간 것의 비애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빈 곳 일정 부분을 거꾸로 아이들, 딸과 며느리가 채워 주고 있어 위안이 되고 참으로 뿌듯하다. 아이들이 보여 주는 맵짠 솜씨들, 젊은 애들이 추구하는 재치가 돋보이는 레시피들을 보고 듣는 것이 이만 저만 즐거운 일이 아니다. 공부하기도 바쁜 손녀들이 한 입 먹기도 아깝게 예쁘게 송편을 빚질 않나, 엄마를 도와 멋진 케잌을 만들어 오질 않나, 게다가 미국의 어린 손녀까지 엄마 김치 담그는 일을 거들겠다고 팔 걷고 나서곤 하니......이제 아이들에게서 배울 일만 소복히 남았지 싶다.

 

'향 싼 종이에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 비린내 난다' 고 했듯이, 솔선하는 엄마 모습을 보고 자라 은연 중 훈습이 된 우리 손녀들은 남에게 국수 한 그릇을 대접하고, 벗을 불러 차 한잔 나누는 걸 별반 껄끄러워 하지 않을, 그 떡잎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타인을 존중하는 곧고 따뜻한 마음도 더부러 자랄 것이며 레시피가 풍부해지는 것은 덤이 될 것이라 또 믿는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깊어진다.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며 눈썰미를 중시하시던 나의 엄마 말에 나는 하나 더 추가해 둔다. 센스가 보배라고!

계절이 바뀌면 식탁보를 바꿀 줄 알고, 피크닠을 가더라도 보자기 하나쯤 가져가 펼쳐 놓을 줄도 아는 재치와 센스를 갖춘다면, 보기 좋은 밥상을 내 놓는 것은 식은 죽먹기일 것이다. 차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나오고, 그런 울림이 타인의 가슴에 따뜻하게 오래 남기 마련이다.

 

밥상 머리에서 정이 나고, 음식 끝에 비위 상한다는 옛말이 또 생각 난다. 밥상을 마주하면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어 정이 한결 도타워지니 우리도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인삿말로 쓰며 사는 게 아니겠는가!

밥을 먹거나 음식을 나누는 일은 단순히 먹는 행위가 아닌 보다 섬세한 일이라, 누구와 뭐를 먹고, 누구와는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 차별로 여겨질 법하니 꼼꼼히 배려해야 할 일이다. 지나고 보면 다 세월이 가르쳤고, 옛말에 영원한 지혜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새 커피잔 하나 마련했을 때의 만족감, 간단하게 테이블 셋팅을 해두고 이웃을 불러 짧은 커피 타임을 가질 때의 그 소박한 행복감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커피잔이 그대로 있고, 시간도 고스란히 주어졌는데 행복의 느낌만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젊음이 간다고 하여 그 작은 행복마저 온전히 오려다 내 버려야 했을까? 나이듦이란 이래 저래 온당치 못한 변화들을 안겨 주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얼기 설기 하다가 동네 한바퀴 걷겠다고 낙엽 뒹구는 가로수 길에 나서니 햇빛이 너무 곱다. 이 깊은 가을이 곱고, 환한 햇살이 고와 한 올 한 올을 헤아리듯 아끼며 걸었다. 

12월을 이렇게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