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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

수행화 2017. 1. 17. 15:32

'바베트의 만찬'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데 어떻게 내 관심 도서 리스트에 들어 와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리스트에서 오래 묵었던 탓에 책이 내게 오니 아주 반가웠다.

작가, 이자크 디네센(본명: 카렌 블릭센)은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에서 아주 부유하고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왕립 예술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첫 작품은 '일곱개의 고딕 이야기'라는 책으로 미국에서 출간했는데, '전미 이달의 책 클럽'에 선정되어 불티나게 팔려 나가면서 '신비한 덴마크의 작가'로 크게 관심을 받아, 당시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비록 헤밍웨이에게 상은 돌아 갔지만 주목 받은 작가임은 틀림 없는 것같다.

 

작가의 프로필을 살펴 보면서 그녀 자신이 인생을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 아프리카 케냐의 커피농장주이자 남작 부인이었고, 작가이고 여성탐험가였으며, 훗날 자신이 쓴 회고록(1937, 1938)을 영화화 한 것이 저 아름다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라고 하여 아주 놀라웠다. 1914년 케냐 나이로비 근처에서 1,500 에이커에 이르는 커피농장을 경영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연인 핀티 헤튼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덴마크로 돌아 왔다고 한다.

"노르웨이, 높은 산 사이로 길고 좁은 바다의 지류가 흐르는 피오르 지역에 베를레보그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에는 회색, 노란색, 분홍색 등 갖가지 색깔의 목조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마치 장난감 마을을 보는 듯했다."

소설은 북유럽의 아름다운 산골 마을을 그리며 서정적으로 시작된다. 이 마을에는 신앙심이 두터운 목사와 아름다운 두 딸, 마르티네와 필라파가 살았다. 이 지고지순하고 아름다운 자매는 아버지의 신앙적 신념에 충실했으며, 따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남녀 간의 사랑도 세속적이라 거부하며 살아 간다.

이 청교도적 분위기의 마을에 한 신도의 조카인 젊은 장교가 방문하게 되었고, 그는 언니, 마르티네에게 깊이 매료되지만 세속적인 사랑은 꿈도 꾸지 못하게 교육을 받은지라 장교는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게된다. 이후 15년 세월이 흘렀고 장교는 열심히 살아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동생 필리파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아가씨이다. 어느 날 교회를 찾은 파리의 유명 가수, 아실파팽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재능을 확신한다. 그녀를 파리로 데려가 고금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디바로 키우고 싶다고 같청하했으나 필리파 역시 아버지의 신념을 따르겠다고 하여 역시 연인과 헤어지게 된다. 젊은 장교 로렌스 로벤히엘름도, 아실 파팽도 그들의 가망 없는 사랑을 버리고 떠나버려 자매에게는 단조롭고 검박한 이 산골 마을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평생 회색이나 검은 색의 단정한 옷만 입으며 세속의 쾌락을 거부한 채 살아 가던 자매는 프랑스 내전이 한창이었던 1871년 6월 어느 날, 마을을 떠난지 15년이 지난 아실파팽의 편지를 지닌 한 여인을 맞아 들이게 된다. 내전 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자신도 쫒기는 몸이 되어 프랑스를 탈출할 수 밖에 없는 이 불행한 여인을 자비로 받아들여 달라는 아실파팽의 간곡한 편지를 가지고 마을로 들어 온 여인이 바베트이다.  

노르웨이 산골에 프랑스인 가정부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으나 바베트는 성실히 자매를 도왔다. 바베트는 시련 속에서도 침착하며, 용모에 엄숙함이 배어 있는 부인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인 특유의 사치와 화려함을 내심 걱정하였으나 적은 비용으로도 이웃을 위해 신비한 요리를 선보이며 자매를 도와가며 이 노란 집에서 12년을 함께 살게 되었다. 마을은 평화로웠고, 묵상하고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꽤 많은 신도들이 기도 속에 바베트의 이름을 올렸으며, 아리따운 두 마리아의 집에 사는 까무잡잡한 마르타, 말이 없는 이 이방인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렸으며,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릴 뻔한 돌이 주춧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운명에 당당하고 엄정한 바베트에게 행운이 찾아 왔다. 자기가 가졌던 복권이 만 프랑에 당첨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바베트가 만 프랑을 수령한 후 이 마을에 이상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떠오르고, 이웃 간에 가정부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자매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가려지려고 했다. 만 프랑이 바베트를 부자로 만든 만큼, 그녀가 모시는 자매의 집은 더더욱 가난해 보이게 됐다. 마을에 더부러 오래 살아 오던 늙은 형제 자매들 사이에 불만이 싹 트고 다툼이 잦아지면서  서로 상처를 입히고 원한이 맺혀가기도 했다. 복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오래 잊고 살았던 갖은 근심 걱정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일상에 불행의 그림자다 커져갔다. 한편 가정부 바베트는 자신의 복권 당첨이 행복보다 차라리 재앙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

신도들의 집안에 냉기가 돌고 갈등이 나타나는 것을 느낀 자매는 아버지의 훌륭한 가르침이 물거품이 돼버릴 위기가 온 것같아 슬퍼졌다. 그래서 이웃의 마음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아버지의 100번째 생일 기념 만찬을 계획해 본다. 이에 바베트는 자기 돈으로 만찬을 준비라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것도 프랑스 요리로 준비하겠다고 하여 자매는 기겁하며 반대한다. 지금껏 커피 한 잔 이상으로 신도들을 대접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검소하게 지낸 자매가 그녀의 귀한 돈을 먹고 마시는 일에 쓰도록 허락 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결국 자매는 동의했고, 바베트는 휴가를 내 떠났고, 열흘 뒤 만찬 때 쓸 요리 재료를 구입해 돌아 왔는데 그 규모가 놀라운 것이었다. 한 수레의 술병, "그건 1846년산 클로 부조예요. "몽토르게유 가의 필립이 만든 거죠!" 가정부의 소원을 들어 주려 했는데 자기 집이 마녀의 잔칫집이 되는 것같아 자매는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자매는 고민 끝에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사실을 털어 놓고 잘못을 고백한다. 결국 만찬에 초대된 신도들은 자매를 위해 음식에 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기로 약속을 하면서 파티에 참석한다. 

"어쨋든 혀란 신체에서 작은 부분이지만, 큰 자랑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혀는 아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그 악함이 제 멋대로이며, 치명적인 독이 가득한 것도 혀예요. 우리 스승님의 생신 날, 우리 혀에서 모든 맛을 씻어내고 모든 쾌감과 불쾌감을 없앱시다. 오로지 고결한 찬양과 감사만 하도록 혀를 지킵시다."

마을의 신심 깊은 신도 로벤히헬름 부인은 마침 자기 집을 방문한 장교인 조카, 언니 마르티네의 첫사랑을 초대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12명이 초대된다. 겨울 궁전에서 지내던 로벤히헬름 장교는 30년만에 찾은 마을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감상에 젖는다. 만찬은 어려웠던 시절 서로 의지하며 견뎠던 얘기, 목사님이 보여주신 깊은 신앙심, 딸들이 베푸는 자선과 헌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졌다. 만찬은 서로의 마음을 정화하기에 더 없이 좋은 도구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 바베트가 마련한 만찬에 장교는 라움을 금치 못하고 최고의 프랑스 음식을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아몽티야도 아닌가?! 그것도 마셔 본 것중 최상품 아몽티야도야!"  "이건 거북 수프야, 맛도 기가 막힌 걸!"  "이건 블리니 드미도프 잖아!"
 "이것은 1860년산 뵈브 클리코가 틀림없어요!"
"'카유 엉 사르코파주!" "이 요리는 레스토랑의 유명한 여자 주방장이 개발한 것!...."
"카페 앙글레에서는 12인분 저녁식사 재료비가 만 프랑이에요"

"에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날 내버려 달라는 외침뿐. 에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박수를 받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일은 없다"고.

그런데 환상적인 만찬을 준비하던 바베트가 실은 자신이 이 곳에 오기 전 '카페 앙글레'의 최고 요리사였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한 끼의 만찬을 위해 복권 당첨금 만 프랑을 모두 써버렸다고'해 자매를 경악케 한다. 자칫 재앙이 될 수도 있었던 만 프랑을 다 써버려 자기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여기 남아 자기 손길을 기다리는 병 든 노인들을 돌보겠다고 말한다. 산골 마을에서 성녀처럼 헌신하는 자매들과 진실한 이웃들의 공통점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며 나날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다. 만 프랑을 모두 써 버리면서 마을은 다시 평화로워질 것이고, 자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바베트는 지혜로운 판단을 한 것이다.. 

바베트의 만찬은 검소하고 천사같은 자매의 이타적인 삶과 최고의 미식을 자랑하는 프랑스 요리라는 어쩌면 상반되는 두 편의 주제가 잘 조합된 이야기라 하겠다. 
이 소설의 특이점은 프랑스 요리의 고전이 아닐까 싶게 망라된 요리들이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너무 섬세하여 요리에 대한 빼어난 감각이 있지 않고는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런데 요리에 대한 식견과 안목은 작가 자신의 부유한 환경에서 경험으로 갖추어진 것으로서 한 때  '앙글레'와 같은 최고급 레스토랑 경영을 꿈꾸어 본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해가 됐다.

바베트의 만찬(원제: 운명의 일화)은 1958년 출간 되었다고 하는데, 불과 60년 전의 소설이건만 먼 과거, 중세 시대의 일화처럼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일상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소박하고 경건하게 살고 감정은 늘 절제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매와 바베트와 모든 이웃들의 모습이 성서의 한 쪽같은 초현실적인 순수함을 보이기 때문이라 생각이 된다.  


 '바베트의 만찬'도 영화로 제작되어 1988년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영화를 찾아 보면서 소설을 현실적으로 이해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글 속에 초실적이고 잔잔한 사연들이 마치 어른을 위한 동화를 읽는 느낌, 고전적인 서정시 한편 읽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