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7년

'또 다른 충고'

수행화 2017. 1. 30. 23:14

또 다른 충고들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하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선반 가운데서 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 -장 루슬로 -

 

명절을 보내는 패턴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보던 중 떠 오른 싯귀이다.

프랑스 시인, '장 루슬로'의 시라고 하며 흔히 읽히는 글인데, 울림이 좋아 자주 생각 나는 글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 중에 명절 전에 미리 부모님을 뵙고 와 명절 휴일에는 여행을 떠나던지 자기들 나름으로 유용하게 그 시간을 쓰는 경우가 차츰 늘어간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즉은 친척들 관심이 부담된다는 것이다. "부모님 힘 드신데 왜 취직은 않는냐?" "어쩌려고 결혼 않느냐?, "언제 아이를 가지려 하는냐?" "그래도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 된다" 라는 등등 걱정을 들어야 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너무 괴롭기 때문에 친척들 모두 모이는 명절 날은 피하고, 이전에 부모님만 살짝 뵙고 온다는 말이다,

 

아직도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우리는 역시 오지랖 민족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지, 인사 삼아 충고 한 번 한다지만 듣는 사람은 몇번이나 듣게 될까? 참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충고란 남의 부족하거나 아픈 부분에 대한 견해라서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말은 칼과 같아 잘 쓰면 인생에 지혜과 맛을 주지만 함부로 휘두르면 다시 없을 엄청난 흉기가 된다. 이 시가 가리키는 방향을 다 함께 봤으면 싶다.

 

말을 많이 한 날은 퍽 쓸쓸해진다. 쓸 말 안 쓸 말을 못가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내 영혼이 통채로 빠져 나간 느낌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혹 거슬리는 말이라도 듣게 되면 목에 가시처럼 마음에 가시로 콕 박히기도 한다. 그래서 말이란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 말을 해서 후회하는 일이 더 많다는 진리를 알게 된다. 그런데 남의 인생에 말 거드는 일이 편할 일은 아니다.

 

그믐 날 밤, 올빼미 체질 손녀, 규영이는 또 잠이 적은 할머니를 만난지라, 밤이 늦도록 얘기들을 했다. 나는 아이가 영문으로 만든 연설문이며, TED를 보며 익힌 영어 회화 실력에 어안이 벙벙해졌고, 더 기가 막힌 것은 '과제 체크 노트'(?)라는 거였다. 매일 매일 과제를 쳌크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나가는 목적으로 쓰는 것인데, 그 세밀하고 예쁜 것이 뭐 잘 인쇄된 그림책 같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제는 그보다도, 깨알 박듯이 심어진 글씨에다, 핑크색 그래프까지 그려 가는 공을 들인 그 노트에 있었다.

 

순간 "그 노트 다듬는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 더 풀고,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지..." 하는 현실적인 충고의 말이 목젖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예쁘게 꾸미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같아서였다. 하지만 마치 아기 돌보듯 사랑스럽게 끌어 안고 있는데 찬물 끼얹는 말을 쏟을 수는 없었다.

내 심중을 알리 없는 손녀는,

"할머니도 이거 하나 사 줄까? 이거 매일 매일 채워 가면 재미 있는데......"

"아니, 나는 그렇게 기계적으로 예쁘게 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을 것같아." 사실 계획만 하고 미루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곤 하는 나에게 이 쳌크 노트는 꼭 필요하겠으나, 그 마음보다 아이가 노트에 공들이는 시간이 우선 아깝게 여겨져 그것 적당히 하란 말 하려다가, 할머니는 그렇게 잘하지 못한단 말만 하고 말았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둥, 시간을 아껴 쓰라는 둥, 충고랍시고 말 한다는 것은 잘 놀고 있는 아이 손에서 장난감 뺏는 일이나 무어 다를까 싶은 맘도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의 마당쇠를 끄집어 내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마당쇠' 이론(?)을 자주 써 먹는다.

마당쇠가 마당을 지금 쓸려고 하는데 주인이 나와 "마당쇠, 마당 쓸어라" 하면 갑자기 심사가 틀리고 마당 쓸고자 하던 좋은 기분이 싹 가셔 마당 쓸기가 싫어지는 마당쇠의 마음이 사람의 일반적 심리인 것이다. 내 경험으로 아이들이 공부할 시절에는  "이제 들어 가 공부해라" 하는 말을 습관처럼 썼던 것같다. 엄마는 적당히 눈치 봐 가며 말한다지만 아빠 말은 막무가내로 들리기가 일쑤여서 나는 마당쇠 얘기를 하면서 분위기 수습 하느라 전전긍긍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서 주워 담으며, "마당쇠' 하고 외치면 언잖고 불편한 감정이 다소 수그러 드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 마음을 아니 크게 노여워 말라는 싸인을 보내는 것이다. 이후 딸과 나는 누군가 뻔한  충고를 할라치면 "마당쇠" 한번 불러 주고 상황을 가볍게 웃어 넘기게 되는, 은어가 되어버렸다.

의외로 효과가 좋은 말이다. 말이 보낸 파장을 말로 반사 시켜 상황을 빨리 잊게 해 준다. 

 

설날 차례 모시고 난 다음 규영이는 이불을 폭 뒤집어 쓰고 누워 있어 곤하게 잠 들었나 싶어 살며시 들여다 보니, 노트북을 들고 누워 무슨 외화를 보느라 집중하고 있었다. 저 나름으로 시간을 안배하고 잘 쓰고 있구나 하며 믿음에 또 믿음을 더해 보았다. '그럼 그렇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믿고 바라봐 주는 것', '기다려 주는 것' 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돈을 쏟아 붓고, 현란한 말로 보내는 관심과 사랑보다 백배, 천배 무겁고 어렵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된다.

 

내가 건넨 말이 누군가의 상처로 남아 있을지 모르지 않나 하는 관념은, 누군가의 말에 내가 깊이 상처 받으면서 내 마음을 다스릴 때 가져 보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게 또 이치에 딱 맞는 말이라 납득이 절로 간다. 타인에게 좋은 말을 해 주는 것도 보시 중의 보시라는 걸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남에게 장미꽃을 선물해도 내 손에 잔향이 남아 있거늘, 하물며 진심을 담아 타인을 걱정해 주고 기분 좋은 말을 건넬 수 있다면, 내게 얼마나 행복의 잔향이 남을 것인가 생각해 본다. 

새해에는 더 좋은 말로 향기를 건네 보자.

 

아이들이 미처 못 다 먹고 간 갈비찜을 냉동실에 보관하면서 "논에 물 들어 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 밥 숟갈 들어 가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다'는 말이 생각 나 웃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