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7년

'숫타니파타' 사경하기.

수행화 2017. 4. 6. 01:04

 

 

 

숫타니파타 (Sutta nipata) 는 '부처님의 대화집'으로서 빨리어로 쓰여진 오래된 불교 경전이다. 부처님과 제자들과의 질문과 답, 비유를 사용한 법문 등, 구전되어 오던 것을 제자들이 수집하여 엮은 것으로서 부처님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최초의 경전이라 굉장히 의미가 있다.

 

사품(蛇品)', 소품(小品), 대품(大品), 팔품(八品), 도피안품(到彼岸品) 의 5품으로 분류되어 있고 전체 1148편의 에피소드와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답에 운율이 있어 암송하기 용이한 부분도 있고, 말씀으로 엮어진 경전이라 근본 불교의 정신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불교 조계종의 소이 경전(근본 경전)인 '금강경'도 그렇고, 대부분의 경우 한문으로 된 경전을 독성하다 보니 숫타니파타는  중요성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고 보고있다.

불경이 워낙 방대하고 우리 문화와 일상에 오랜 세월 스며 들었던 관계로 우리가 무심히 읽어 지나치는 말들이 불경에서 유래했거나 인용되어 상용화해 쓰는 일들이 굉장히 많은 걸 알 수 있다. 특히 숫타니파타의 독특한 비유는 공 지영이나 최 인호같은 작가의 글에 널리 인용되었는데 작가의 창작이라 착각하는 일반인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뱀의 독을 약으로 다스리듯이, 마음 속 분노를 억누르는 자는 차안도 피안도 버리리라.
뱀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사품 1장)


"홍수가 연약한 갈대 다리를 무너뜨리듯이, 오만을 완전히 파기한 수행자는 차안도 피안도 버리리라.
뱀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사품 4장)


"무성한 대나무 가지들이 서로 얽혀 있듯이, 처자식 가진 자의 근심도 이와 같다.
그러나 어디에도 얽히지 않는 죽순처럼, 코뿔소처럼 혼자서 가라"    (코뿔소 경 37) 


 "소란을 두려워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 지지 않는 연꽃처럼
코불소처럼 혼자서 가라"    (사품. 3장 코뿔소 경 72. )


"출신때문에 천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신때문에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그들의 행위때문에 천민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    (사품 7장 천민경 135 )

 
"생명은 미미한 것이나 강한 것이거나, 길이가 긴 것이거나 몸집이 거대한 것이거나, 보통이거나 혹은 작거나 크거나 ,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이미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복된 마음이어라"    (사품 8장 자비경 145. 146)



"어리석은 자들과의 교제를 멀리하고 지혜로운 사람과 교제를 돈독히 하며, 공경해야 할 사람을 공경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니라" ( 소품 4장 최고의 축복경 258)


"존경과 겸손의 마음으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때 맞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에
최고의 축복이 있느니라"    (소품 4장 축복경 264 )

"일어나라 앉아 있으라, 잠이 무슨 소용인가?
병들고 번뇌의 화살에 찔린 고통스런 사람이 무슨 잠이 있는 가?"   (소품 10장 천민경 330 )

 
"점 보기, 별점 보기, 해몽, 관상에 대한 관심을 버린 수행자, 사악한 점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린 수행자,
그는 바르게 편력수행하는 것이다."    (소품 13 올바른 수행경 359 )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입에 도끼를 문 채 태어나니
어리석은 사람은 그릇된 말을 하여 도끼로 스스로를 찍는다"     (대품 10장 꼬깔리아 경 657)

 

 

생명을 향한 경외심, 인간에 대한 연민심,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계율, 부모나 처자식에 대한 엄중한 책임감, 오감에서 비롯되는 탐욕의 제어, 생로병사를 바라 보는 자세, 불법승(부처님, 가르침, 스님) 삼보(三寶)의 이해, 팔정도의 윤곽, 12연기와 인과의 법칙, 보시공덕과 무소유의 의지, 열반이라는 불멸의 경지를 향한 명상과 사색 등등 인간이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담고 있다. 

재가 불자라면 매일 기도를 하거나, 일정 시간 참선을 하거나, 혹은 사경(寫經)을 하면서 수행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스님으로부터 늘 받아왔다. 나는 매일 조금씩 사경하는 것으로 수행의 방편을 삼기로 하여 여러 경전들을 사경해 왔다.

금강경, 원효대사 발심 수행장. 초발심 자경문, 달마대사 오성론, 파상론, 영가 스님 증도가, 승천 대사 신심명,.......

어려운 교리를 한문 경전으로 사경했으니, 내 마음에 얼마나 담았나 자문해 보면 조금 우울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반복의 힘을 믿으며 습관적으로 사경을 해 왔다. 깨달음은 지식 이전의 것이어서, 그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거늘, 문자로 알려들고 따지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라 경계하는 가르침도 있다. 하지만 문자 없이 어떻게 뜻이 전해지겠는가? 그래서 쉬이 읽히는 숫타니파타 한글 사경은 의미가 있고, 새삼 문자의 고마움을 알았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숫타니파타 사경을 시작하게 된 데는 내 마음 속의 한 배경이 있다. 수년 전 남편은 스님으로부터 영역본의 숫타니파타를 번역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었다. 스님께서는 영역본의 숫타니파타를 가지고 계셨고 무척 애착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셨다. 빨리어를 영국인 파우스볼( V. Fausboll) 이 영역한 책으로서 얼핏 보아도 오래되고 보기 드문 책으로 보였다. 우리가 흔히 보는 '숫타니파타'는 법정 스님께서 일본어판 수타니파타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고 이것은 영어로 번역된 경전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중복 번역이라 표현이나 해석이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불교 교리에 깊은 조예가 없는 남편은 불교 대사전에 빨리어 사전까지 펼쳐봐 가며 공들여 번역을 했다. 비전문가인 나의 눈으로는 비록 불교 교리적인 표현으로는 조금 어색할 수도 있겠으나 원문의 직역에는 충실했다고 보여졌다.

시간과 공력을 쏟은 숫타니파타 번역을 마치고 완성본을 스님께 보내 드렸고 내 컴퓨터에도 영문판, 한글판, 한문을 섞어  완성한 것까지 저장은 하였으나 오직 보관을 했을 뿐 시간만 벼르고 잘 펼쳐보지 않게 되었다. 아울러 남편의 수고에 대한 치사에 인색했다는 기억이 들어 늦게나마 적극적인 1인 독자가 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작년 2016년 1월 1일부터 사경을 시작한 것이다. 읽으면서 교정도 보고. 독자로서 좀 더 편하게 읽히도록 원문을 다치지 않을 범위에서 작은 부분 수정도 해 가면서 쉬엄 쉬엄 써 보기로 한 것이다. 네 부를 써서 손주 넷에 한부씩 주려는 계획까지 미리 세워 둔 거였다. 

훗날 우리 아이들이 읽으면서 할아버지의 노고를 떠올렸으면, 또 사경 한 줄 한 줄에 아이들을 향한 내 기도의 마음이 실린 것을 느꼈으면 하는 기대와 기원의 마음을 담아 쓰고자 했다. 똑 같이 공들여 쓴다고 해도 역시 한글 사경은 글씨를 괴발개발 쓰게 되는 맹점이 있었다. 그래도 시력이 더 나빠지기 전에 쓰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사이 몸이 아파 며칠을 쓰지 못하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는 날들도 있고 하여, 나름 매일 2 페이지 이상은 썼노라 했는데도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노트 9권에 무려 1년 3개월이라니!! 

2천년 전의 가르침이 오늘의 우리 세태에 바로 부합하는 가르침이 된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놀랍고 한편 씁쓸한 감이 들기도 했다. '파멸경'의 예를 보면, 인간을 파멸 시키는 것이 무엇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꾸벅꾸벅 졸고 활기 없이 사는 자, 남과의 교제에만 몰두하는 자, 부유하면서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는 자, 자신의 출신과 부와 가족 자랑을 일삼으면서 친척을 멸시하는 자, 여자와 술과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자.....그런 자는 파멸에 이를 것이다' 라는 지적은 오늘 우리에게도 어색하지 않은 지적으로 들렸다. 게으름은 수행의 반대말같이 들리는 이러한 소박한 가르침이 진정 진리인가 했다.


말씀 중에 '칭친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 즐거움의 활기를 잘 살리라'
는 가르침이 바로 나에게 와 꽂힌 것은 물론 당연한 과정이었다. 장장 1149편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번역해 낸 남편의 노고에 진정어린 치하를 보낸 기억이 없었기에 칭찬의 기쁨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 즐거움을 에너지로 쓰지도 못했다는 때 늦은 반성이 왔다. 그래서 늘 배우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걸 깊이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
이심전심 염화미소 (以心傳心 拈華微笑)의 이치에 기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