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7년

'죽음에 대한 영혼 없는 관념들'

수행화 2017. 5. 6. 12:20

매화 순이 기품있게 톡 터지며 봄을 알리더니, 벚꽃이 무채색의 대지를 단숨에 화려한 수채화폭으로 바꿔내는 신비한 일을 또 해냈다. 그리고 이내 철쭉꽃이 폭죽 터지듯 강렬하게 쏟아져 내려 눈에 담고 또 담아 본다. 참 눈부시고 찬란한 계절 앞에 서 있다. 은 늘 기다림 끝에 오고,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검은 윤곽만으로 우리의 관심에서 거짓말처럼 잊혔던 저 나무 우듬지들이 긴 겨울 묵묵히 꽃을 준비하며 봄과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것에 비하면, 인간은 참으로 무계획하고 근시안적이며 성정이 얄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속적인 시간의 짧은 한 부분을 아웅다웅 살다가 거역할 수 없는 자연 질서에 따라 홀연히 사라져 가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을, 우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세계를 지배 한다는 착각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오늘 병원에 다녀오다 보니 무리 지어 함빡 피어 절정을 이룬 철쭉이 아름다운 피로에 드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내 이 화려한 날들도 가뭇없이 과거 시간 속으로 빠져 들 것임을 알려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큰 오빠 병세가 며칠 새 몰라 보게 나빠졌다.

죽음이란 경험을 통해 터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코 익숙할 수도 없는 길, 그 낯선 길에 깊이 들어선 오빠의 모습은 내 마음속 사막에 불어닥칠 모래 바람의 광풍을 예감캐 한다.

죽음이란 궁극에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 가겠지만, 우선 얼굴에서 웃음부터 걷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나 웃음기 가득하시던 오빠의 동안(童顔)에서 홀연히 웃음을 걷어 간 고통에 나는 분노했다. 죽음에 저항하려는 어떤 조짐도 없는데, 그 길을 선선히 따라나서겠다는데, 왜 가혹하게 통증으로 인간을 거꾸려뜨려야만 하는지? 죽음의 신에게 묻고 싶다. 생명을 내놓았는데 무엇을 더 앗아 가겠다고 질긴 고통에 내몰아야 하는지? 죽음보다 더한 인간의 존엄을 내놓으라는 것인가?   

 

요즈음 나는 많은 오빠들 사이에서 자라며 가졌던 어린 시절의 풍성하고도 즐거웠던 기억들, 부탁하면 흔쾌히 내 편이 되어 줬을 오빠들에게서 받은 마음의 위안들에 대하여 참으로 준엄한 대가를 요구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슬픔이, 그 트라우마가 어떠한데, 나는 그 한 분 한 분을 차례로 보내면서 내가 받은 관심과 사랑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형벌에 가까운 고통을 안았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응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순환의 길이라느니,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로 늘 존재해 왔으니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길 일이 아니라느니 하는 설, 설들........ 그렇게 설파하는 초월적인 말들이 얼마나 탁상공론이며 관념적 정의인가! 정녕 죽음 앞에서는 언어의 사치이며, 허공을 떠도는 영혼 없는 말의 향연 같기만 하다. 이 모든 관념을 한꺼번에 뒤엎을 정도의 위력으로 죽음은 인간에게 가혹한 현재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나눈다. 작은 물건에서부터, 사랑과 기쁨과 슬픔을, 그러나 죽음의 길이란 누구를 벗 삼아 의지해 나갈 수 없는, 홀로 들어서야 하는 세계로 두려움 자체인 것이다. 찬란한 명성과 재물, 병풍처럼 둘러친 가족도, 그 어느 것 그 누구와도 동반할 수 없는, 철저한 고독의 길이라 애달프다.

 

선하게 쌍꺼풀진 눈에, 단정하고 오뚝한 콧날이랑 5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빠를 한 나절 지켜보면서 별의별 상념들이 드나들었다. 걸어서 병원에 들어 가신 오빠는 어찌하여 행동반경이 침대에 국한된 채 오직 죽음에 집중하고 계신지 어이가 없었으니, 현대 의학이 인간의 고통을 줄이자는 것인지 더욱 가열한 고통의 세계로 밀어붙이자는 것인지 판단이 흐려지려 한다. 마침내 새된 소리로 토해 내시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면서 어찌하여 자애로웁던 오빠의 목소리는 간 곳 없고, 죽음에 이르러 구슬프게 우는 새의 울음처럼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큰 오빠는 우리 집, 우리 고을의 등불 같은 존재였다. 당시로서는 귀한 대학생으로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품으로 반듯하고 예의 바르니 어른 아이 없이 침이 마르게 칭송해 마지않는 존재였다는 내 기억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빠의 방학과 함께 기다리던 어여쁜 핑크나 노란색의 향내 나는 잠자리표 연필이며 품질 좋은 공책들은 내 유년의 추억 속에 반딧불이처럼 지금껏 푸르게 빛나고 있다, 배구공, 축구공, 등 오빠들을 위한 갖가지 공들은 아래 오빠들의 콧대였고........, 바람이 빠지면 불에 구워 통통하게 만들어 가지고 놀던 정구 공의 냄새도 기억 속에서 구수하게 피어있다.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하시던 오빠는 지금 50년 전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누워 계신다. 불현듯 아버지의 임종과 더불어 또 다른 형제들의 죽음과 임종의 기억들이 홍수처럼 밀려와 그때의 슬픔을 완벽하게 재생해 버린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각자 다른 모양으로 절망했었고, 그 잊히지 않는 아픔이 소환되어 눈물이 걷잡을 사이를 주지 않고 흐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인생을 몹시 사랑했던 큰 오빠,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이고 싶어 했던 큰 오빠의 임종을 걱정하는 순간이라니...... 눈물은 가슴에서 나온다는 걸 느낀다.

마음을 비우고 슬픔을 분산시키려 애쓰니 피로와 잡념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