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7년

"이렇게 우리의 한 시대는 가고....."

수행화 2017. 6. 6. 13:26

 

 

5월, 완벽한 봄날,

큰 오빠는 병상에 조금 더 계시리라는 우리의 예상을 살짝 거스르며 가벼이 저 세상으로 가셨다. 통증과 치유의 순간들을 넘나 들면서 죽음을 예비하시더니 마침내 5월 21일 영원한 잠에 드셨다.

예감은 담담하였으나 막상 부음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소리내며 무너져 내렸고, 일시에 세상에 전원이 나가버린듯 눈 앞이 깜깜해졌다.

 

죽음을 배우는 학교가 있고, 교과서가 있다면 오빠의 죽음은 바로 그런 본보기의 장이 되지 않나 하고 정리해 보는 것이 조금도 과장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자기 앞의 온 인생을 성심껏 살아 내신 것을 기본으로, 오래 건강한 일상을 사시다가 죽음에 이르러 가족이 이별을 준비하고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펴 드릴 적절한 시간 말미를 주신 것, 맑고 깨끗한 최후의 모습을 보여 주셔서 남아 있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정결한 모습을 간직하게 해 주신 점, 좋은 계절 좋은 시간을 택해 가시니 장례 절차나 기타 조문객의 불편을 최소화 해 주시려 했던 점 등으로, 말은 쉽고 단조롭지만 죽음의 순간이란 소망하듯 그렇게 녹녹치 않은 것임을 아는 자는 수긍할 것이다. 

 

돌아 가시기 이틀 전 마지막으로 본 오빠의 모습은 조금 수척해진듯하여 더욱 말끔해 보였으며, 신선같이 초연한 표정을 보이시기에 임종이 그렇게 지척에 있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임종에 임하여 내가 본 가장 선하고 단정한 모습이라 해야겠다.

 

지금은 우리가 이미 나이 들어 실감이 퍽 줄었다지만, 나와 16살 나이 차이가 있는 큰 오빠는 우리 남매의 인생 구비 구비에 아웃라인을 그릴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셨다고 할 수 있다.  

한복 저고리에 손수건을 매달고 큰 오빠와 함께 초등학교 입학식엘 갔었고, 오빠 언니와 동반하여 고등 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러 갔었던 일들을 도리켜 보니 가히 학부모 수준이라 할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 후 오빠와 안경점에 가서 생애 처음 안경을 맞춰 끼고 나선 날 세상은 현깃증 나게 눈이 부셨던 기억도 또 새롭다.

 

추억 시계의 태엽을 거꾸로 작동해 본다면 언뜻 언뜻 떠오르는 기억만도 무한하다. 이제 오빠의 기억은 앨범 속 사진처럼 선별된 순간에 국한될 것이고, 그것도 내 기억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인간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이라는 수단도 생겼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이 달리니 고달프게 함께 뛰었고, 이제 세월이 흘러 내가 종심(從心)의 나이가 되어 시간을 내 임의로 쓸 역량이 있었다지만 오빠에게 드리고 싶었던 마음의 보답은 늘 후순위에 있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사바사하지 못한 내 천성이 마음 표현을 잘 못한 것도 문제지만, 좋은 일은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해 버린 결과여서 후회로 남는 일이다.

 

오빠의 장례식에서 나는 장례에 얽혀 오빠에 진 마음의 빚을 떠올리며 눈물 지었다. 

나 스스로 '눈물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순간' 이라는 신파조의 제목을 붙여 선명하게 기억 하고 있는 1974년 7월 시어머니 장례식 때의 일이다.

1974년는 연년생인 둘째의 출생 년도이고 나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가 없는 어린 새댁으로, 생후 5개월 된 아기와 갓 돐이 지난 아기를 키워 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런 나에게 4대 봉제사의 엄청난 부담을 달랑 안기고 시어머님은 가셨고, 나는 나의 운명을 예감하듯 눈물을 쏟고 있었다. 참 가련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살인적인 무더위에다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절차와 형식 투성이의 시골 장례식은 나에게 한 없이 가혹하고 두려운 상황이었다. 거기다 외며느리라며 여자분 조문객은 내가 모조리 응대하게 했으니, 급기야 삼베 치마 안에 받쳐 입은 내 인견 속치마는 세로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그때 큰오빠께서 서울에서 대구, 달성군까지 조문을 오셨고, 나의 남루한 모습에 적이 놀라시는 눈치셨으나 내색 않으시며 외갓집에 온 느낌이 든다시면서 편안하게 하시려 애 쓰시는 모습이 역역했다. 하지만 오빠의 조문을 에상치 못했던 나는 오빠를 보는 순간, 온 몸의 수분을 펌프질하여 눈물로 쏟아 내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낼듯이 눈물꼭지가 잠기질 않았으니 그 날의 기억에는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솟구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 가신 오빠는 아무래도 내 안위가 걱정이 되셨던지, 남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셨다. 나중에 내가 슬쩍 읽어 보니, 아........

"..........그 아이는 몸도 마음도 약한 아이이니 자네가 더 잘 보살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네.........."

'몸도 마음도 약하고!' 이 짧은 한 마디는 내 심장을 파고 들었고 두고 두고 내 삶을 정의하는 한 마디 말이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세파를 헤쳐 나갈 어떤 저력도 용기도 없는 허약하디 허약한 내 모습이 몹시 마음에 걸리신 것이 여실하게 실린 편지였으니, 내 가슴에 한 없는 슬픔의 갈기를 만들었으며, 한편으로 나를 다독여 주기도 했었다. 오빠는 편지에 얽힌 내 감정을 아실리 없으실 터이나 나는 내 마음의 응원군으로 생각하며 추락하는 내 삶을 끌어 올리려 분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빠는 훗날 그 여름 날 조문길을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에피소드로 삼으셨으며, 당시 아기였던 딸, 윤경이에게 늘 똑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시며 즐거워 하셔서 우리도 덩달아 웃곤 했었다.

에피소드인 즉은, 그날 마을에 당도하여 초상집을 물어 찾아 가려던 중, 얼굴이 뽀얗게 예쁜 아기를 업은 아이를 만났고, 등에 업힌 아기를 보는 순간 이 아기는 분명 이 마을 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아기 업은 아이에게 물으시기를 

"이 애기 이름이 뭐냐?"

"윤경인데요."

"그래 됐다. 이 아기 집으로 가자. 앞장 서라"

그렇게 하여 애기 보려 데리고 있던 아이, 남이를 앞장 세워 전화도 없는 시골집을 곧장 찿으셨다는 일화를 그렇게 즐거워 하며 말씀하셨다. 

"딱 보는 순간 얘가 윤경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너가 정말 그렇게 예뻤다" 는 말씀을 딸은 외삼촌을 만날 때마다 들어야 했다. 이제 아흔 여섯번 들으면 백번이야.....이후 횟수를 헤아릴 수가 없어졌으리만치 무한하게 들어야 했던 즐거운 기억을 남겨 주신 것에 지금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반듯한 맏이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오신 것같은 오빠, 그리고 그 점을 또 우리에게 늘 강조하며 깨우쳐 주시니 더러 지루한 일도 많았더랬는데, 이제 다만 웃으며 떠올릴 일이다.

 

내 동생, 혜숙이 어린 시절 넘어져 다리에 심한 찰과상을 입었는데 마침 방학이라 내려 온 오빠는 여자아이에게 흉터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시며 어쩔 줄 몰라 하셨고, 읍내 약국 몇 군데를 다니시다 당시에 이름도 생소한 '파상겔'이란 연고를 구해다 발라 주신 작은 사건이 있었다. 너무 진지했던 오빠 표정과 하염 없이 태평스럽던 어린 동생의 얼굴이 대비되는 한 컷의 장면이 뇌리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많은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가신 작은 오빠에 대하여 우리 남매가 가진 애잔한 마음은 가이 없다. 작은 오빠의 마지막 가시는 길의 기억이 어찌 잊힐리 있으리오만, 돌아 가시는 날 큰 오빠께서 병원엘 데려 가기 위해 작은 오빠를 업고 나오셨다는 말에 나는 오래 슬퍼하고 괴로워 했다.  

작은 오빠 병세가 아주 나빠져 병원으로 옮겨야겠다며 택시를 타기 위해 업으니 등에 느껴지는 솜처럼 가벼운 느낌에 오빠의 죽음을 예감하셨다고 하시던 말씀과, 같은 시기에 투병하던 사촌 오빠가 그 날 오후에 임종 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의료진에게 내 동생이 오늘 밤을 넘길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달라며 애타게 간청하셨다는 말들을 들으며 가슴이 찢어졌던, 참 슬픈 기억이 있다.

한 없이 가벼워진 몸을 형님 등에 의지해 나오게 된 작은 오빠,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시던 작은 오빠와, 그 오빠를 업고 골목을 걸어 나오시는 큰 오빠의 심중을 동시에 헤아리며, 두 오빠를 향한 나의 슬픔은 내 인생의 가장 슬픈 몇 장 몇 절의 사연이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근년에 당한 막내의 죽음, 입관을 마치고 생전의 멋장이 모습으로 잘 차려 단정하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는 막내의 수의 양복 주머니에 여비해서 가라시면서 만원짜리 몇장을 찔러 넣어 주시던 모습. 어린 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보며 슬픔이 차 올라 숨이 멎을 것같던 고통의 순간들이 있었으니, 한 부모를 가진 형제의 사랑이 이다지도 절절하고 애틋한 것일까 하며 참으로 생각이 많아졌던 날들도 잊지 못한다. 

자신이 병상에 누워 계시면서까지 나이 오십이 다 된 조카에게 "내가 곧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을 지켜야지!" 라고 하셨다니 이 무슨 말씀이신가? 이 무슨 착각이실까 했지만, 그 마음이 오빠 스스로의 인생을 올곧게 이끌어 준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고맙고 애잔한 날들을 기억해 본다는 것은 슬픔을 길어 올라는 일이 되고 만다. 심장이 바늘에 찔리듯 쑤시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퍼붓는 자책의 일환이요, 이기적 슬픔인지도 모른다. 멋진 인생을 보여 드리려던 서원은 결코 이루지 못한 채 오늘에 왔고, 마침내 오빠는 가시고 말았으니, 그 깊은 회한은 내 생이 다할 때가지 쓸쓸함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움켜 쥔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을 바라 본다. 삶이 유한한 것을 모르는 이 뉘 있으랴만 우리의 시간은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 지금에 이르렀고 머잖은 날 나의 인생도 그렇고 그렇게 죽음의 결말에 이를 것이리니......
..서산대사께서 일찌기 열반송으로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 라고 읊으셨다. 이제 쓸쓸함은 간단 없는 바람으로, 남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한 시대가 지나감을 지켜 보고 있다. 

 

반세기 전의 장례식과 현재의 상례(喪禮)는 상주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변화가 있다고 보여졌다. 50년 전 아버지 장례 기간 동안 멍석 위에서 그 많은 조문객에 일일이 절로 예를 다하느라, 무릎이 부어 오르고 심하게 통증을 호소하셨던 오빠를 떠올리며 오빠의 영정을 바라 보았다. 

지금의 아들 딸 사위들이 조문객들에 공손히 예를 보이는 것을 또 물끄러미 바라 보며 오빠가 아버지께 보인 효심과 공경의 마음을 이제 사진 속 오빠께서 잘 받으시누나 하는 안도와 고마움이 생겨 슬픔은 조금 눅어지기도 했다는 걸 오빠께서도   아셨으면 했다.

해가 뜨고 달이 지며, 새벽 이슬이 맺히는 끝 없는 순환 속에 드신 오빠를 생각하니 서산대사의 열반송이 아울러 떠오른다."그대의 전생이 알고 싶으면 현재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그대의 내생을 알고 싶으면 그대의 현재 마음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