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7년

내 슬픔의 끝은 어디?

수행화 2017. 7. 9. 14:40

홍수가 나서 강심을 뒤집으면 강 저변 생태계에 작은 순환이 일어난다고 한다. 

나의 일상도 소나기 만나고, 홍수 지나간 듯, 크게 한번 흔들리니 삶에서 부수적인 것들은 떠내려 가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앙상하게 남은 것같은, 그런 날을 지금 보내고 있다. 먹고 자고 짧게 생각하고, 또 먹고 자고 생각하고.......

믿기지도 않는 일들이 지난 한 달 여 사이 일상 한 가운데를 가르며 지나갔다. 큰 오빠 사긴 뒤 어이 없게도 넷째 오빠가 짧은 투병 생활 끝에 생을 마친 것이다. 불행은 인생의 길 모퉁이에서 우리에게 일격을 가할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거푸거푸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오빠, 대책 없이 마음만 좋아 더러 내 잔소리를 들어 내던 오빠, 아픈 손가락처럼 의식, 무의식으로 통증을 느끼게 하던 오빠. 다부지지 못한 천성은 자기 건강도, 하나뿐인 목숨도 잘 건사하지 못했는지 그렇게 맥없이 생명줄을 놓아버렸고, 남은 우리는 마음을 깊게 다쳤다.

두 아들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가족이 늘었고, 손자 손녀를 보며 더 없이 행복해하던 시간들, 그 행복을 지키고 아끼려 나름 노력하던 오빠의 말년을 보는 것이 좋았다. 가족들이 유난히 자주 모였고 어울려 맛있는 밥 사먹고 다닌다는 일상 얘기가 듣기 좋았다. 그런 소소한 행복이 시샘이라도 받았다는 말인가?  참 매정하고 가당치도 않은 사신(死神)의 부름이다.

오빠의 건강 걱정이 네냇달 전 인듯 하다. 실 없는 안부 전화 끝에, "오늘 뭐했어?" "그냥 산에 가서 혼자 앉아 있었어" "왜 친구라도 만나고 오지!"  "그냥 그랬어. 요즘은 나다니기가 싫네!"
시간이 나기가 무섭게 친구 만나러 나가고, 누구랑 어울리기를 그렇게 좋아하던 오빠가 조금 뜨악한 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러려니 했던 것, 결국 우리 모두의 무심함이 그를 황망히 저 세상으로 쫓고 말았다는 결론을 부정할 길은 없다.

보편적으로 환자는 병마가 덮치면 일단 왜 나에게? 하며 하늘에 분노하고, 격하게 저항해 보는 단계를 넘어 강렬하게 삶의 의지를 끌어내 보았다가 마침내는 죽음을 받아 들이게 되는 일련의 감정 기복이 있게 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오빠는 크게 한번 저항해 보지도 못하고, 죽음과 바꾸고 싶은 통증도 그다지 없던 중에 그렇게 쉬이 저 어둠의 세력에 굴복해 버렸으니, 안타깝고 가여운 마음이 내 슬픔의 전부이다.

나는 간절히 기도 했었다.
회생의 가능성이 없다면 오빠의 목숨은 앗아가도 좋으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 오빠의 치료 경과가 좋아져서 짧은 외출도 하고, 가족들 얼굴도 간절하게 새겨 봐가며 좀 더 인간적으로 죽음에 임할 여유를 달라, 남은 우리에게도 오빠에게 보다 많이 집중하고, 이별을 위한 마음의 공간 마련에 짬이 있게 좀 해달라, 그래서 큰 오빠가 가신 올해를 넘겨주기를 소망했었다. 

병세는 빠른 걸음으로 오빠를 점령해 가면서 나의 소망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는 말을 속삭이듯 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빠는 기적과 같은 행운이나 이변의 편에 서기보다는 순응의 원리를 따르려 했던 것같다. 그래서 오빠의 죽음에서 무욕의 어떤 존엄같은 것을 나는 느꼈다. 자기는 죽어 가더라도 자기로하여 전 가족의 일상이 구겨지는 일은 차마 하고 싶지 않다는 오빠만의 결기가 있었는지 물어 보고 싶다. 그게 가족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나고? 

큰 오빠 장례식장에 다녀 오던 날 저녁 일이 마음에 걸린다. 많이 상한 얼굴을 디밀어 거기 모인 모든 가족들을 가슴 아프게 했던 그 저녁. 오후에 병원에서 바로 왔던지라 오래 지체할 수가 없다며 아들이 집으로 모시려고 나섰다. 집으로 가던 길에 동승한 나에게,
"정 서방한테 전화 해 봐 저녁 먹었나!"
 "지금이 몇 신데 저녁을 안 먹어!" 
집에 들어 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역했으나, 어서 집에 들어가 쉬게 해야 한다는 조급한 생각에  오빠 마음은 아랑곳 않고, 짐짓 실 없는 소리 말라는 투의 인정 없는 대답만 보냈었다.

식사를 거의 못하는 걸 아는 나는 밥을 먹자고 하는 오빠에게서 밥이란 핑게일 뿐 그저 병들기 전의 일상을 좀 더 만끽해 보고 싶어서, 큰 형님의 마지막을 보고 착잡해진 심경을 남편에게 좀 털어 놓고 싶어서 일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빨리 가리라 예상했다면 그날 밤 왜 저녁밥을 같이 먹지 않았겠는가! 비가 내리던 그날 밤, 얘기도 들어 주고 좀 더 많은 위로로 마음이라도 따뜻하게 해 줄 것을........배려가 후회로 남는다. 후회는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오빠는 많은 형제 중에서 어린 시절 유독 개구쟁이로 자랐다고 해야할 것이다. 방과 후면 어둡도록 밖에서 놀다 들어 오고, 그것도 모자라 집이 먼 친구들을 집에 데려 와서 같이 먹고 자고 아침이면 함께 학교를 가기도 했으리만치 놀기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했다. 하염 없이 친구들을 불러들였고, 어머니는 싫은 내색 없이 오빠 친구들을 아들처럼 먹이고 재우는 것이 어린 나의 시선에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언젠가 부산에 가서 친구를 만나 어린 시절 원 없이 놀던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친구가 했다는 말에 듣는 나도 조금 놀랐고, 우리는 잠시 어머니의 배려심을 화제 삼아 보기도 했었다. 그 친구와 오빠는 또 늦게까지 놀다 우리 집에서 자고 아침에 학교를 가려는데 뜻밖에도 어머니께서 자기 몫의 도시락까지 싸서 주시더라는 것, 그 날 받아 든 점심 도시락은 굉장한 충격이었고 자기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결코 잊지 못한다는 말을 들려 주었다고 했다.

전쟁 후의 삶은 몹시 팍팍했고, 너도 나도 어려웠던 시기에 어린 아들 친구에게 따뜻한 밥을 싸 주실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에 잠시 숙연해졌고, 그 일화에 우쭐해하는 오빠를 은근 압박해 보기도 했었다.  그게 뭐 오빠가 받을 치사는 아니니 마음에 담지 말고 생활에 열중하라고.......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들어가서 축구화를 신고 유니폼을 입고 의기양양해 하던 모습이 기억에 선연하다. 깎은 밤톨같은 것이 신발 바닥에 붙어 있어서 걸으면 운동장에 동글 동글한 자국을 남기는 그 축구화를 우리는 밤 신발이라 불렀다. 추억의 이름이다. 아버지께서 사다 주신 그 축구화를 신고, 대나무 심같은 것이 만져지는 누빔 무릎 보호대를 다리에 감고 검투사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저벅저벅 걷던 모습 등등, 오빠의 유년시절은 마냥 즐겁기만 했지 싶다.  

유년의 행복했던 순간은 인간의 근본을 따뜻하게 하고, 긍정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을 것이나,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거센 파도를 세찬 의지로 넘어 보려는 뒷심은 부족한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더러 해 보게 된다. 친구만 좋아하고, 용맹이 없는 오빠를 보면서. 

#  병원엘 들러겠다고 약속한 날, 가고 있는 도중 거듭 나를 찾는다. 
"왜 안 와?".
"가고 있는데".  
"어디쯤 와?"
"미금역 지났는
데"
"빨리 와"
마치 급한 볼 일이라도 았다는듯이 그렇게 다급하게 굴더니 그게 바로 자기 가는 길을 재촉하는 거였던가 싶다.

할아버지 병실에 머물다 집에 숙제하러 간다고 나서던 손자 손녀는 갔다 오겠다며 할아버지 이마에 뽀뽀를 해 드리고 나간다. 내 가슴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먹먹해졌는데 정이 남다른 오빠의 심중은 어떠했을 것인가! 크게 한번 가슴을 흔들어 보이는 것은 고체가 된 슬픔 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으로 나는 보았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이마에 입맞춤해 주던 감각이 선명했을테고, 부르고 또 부르는 아들과 아내의 목소리가 가는 길을 막아섰을텐데 오빠는 묵묵부답이었으니.
우리는 호흡에 탄력이 떨어져 가는 순간을 지켜 보며 오로지 오빠의 마지막 순간에 집중했다. 그렇게 오빠는 알게 모르게 순한 잠에 들듯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가련하고 허무하게 호흡을 삼켰다. 

누가 새털처럼 많은 날이라는 표현을 만들었을까? 우리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그렇게 촘촘한 시간들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의 생명이 차라리 새털처럼 가벼운 것이라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병이 되도록 쓰라렸을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주지 못한 지난 세월이 싫어졌고, 나에게 묻기 잘하고, 내 말을 흘려 듣지 않던 오빠에게 마치 남동생 대하듯 충고하고 타박했던 시간들에 대해 깊이 사과하고 싶다. 그리고 오빠에게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 듯하여 똑 부러지지 못하다고 했던 내 생각도 접었어야 했다. 그것은 언제나 변질 없고, 인정스럽고 따뜻한 오빠의 내재된 인간미였다는 것을 걸 인정해야 했다.

조문 온 많은 친구, 지인들은 하나같이 오빠의 넘치는 인간미를 얘기했고, 자기 살점처럼 친구를 좋아하더니, 그 친구들이 한 줌 재로 남은 오빠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지켜 주어 서럽게 간 오빠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오빠를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이 넘치는 사람, 이기심이라고는 모르는 참 선량한 사람, 꾸밈 없이 투명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면 된 인생이 아니겠는가!

전 생애를 통하여 남에게 가졌던 어진 마음은 오빠의 영적 재산으로 영원히 오빠를 지킬 것을 굳게 믿는다.
"신은 인간을 벌하려고 할 때 그의 기도를 들어 준다" 고 하는 말로 좀 더 많은 행운을 누리지 못한 오빠의 인생을 긍정하며 오빠에게 위로를 보내기로 한다.  

멋내기를 좋아하던 영원한 청년의 초상, 넷째 오빠의 영혼을 내 진심을 다해 위로하려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오빠 셋에 남동생 하나, 언니 하나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슬프다는 말이 이렇게 헐거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