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7년

'소소한 송편 퍼레이드'

수행화 2017. 10. 9. 11:00

추석 연휴 중이다.

징검다리 휴일에 임시 공휴일까지 지정되어 올 추석은 무려 열흘을 명절 분위기에 빠져 있다. 공휴일과 별무관한 우리까지 덩달아 어디든 나서야 할 것만같은 기분에 공연히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속도로가 주차장 형국이고, 공항이 북새통를 이룬다는 뉴스를 들어가면서  우리는 여느 해와 다름 없이 집에서 송편 만드는 단조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손녀들이 추석을 기다리는 건 예쁜 송편을 만들어 내는 재미에 있는 것 같다. 남들이 들으면 특이하다고 웃을 일이지만 내 눈에는 그 마음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해마다 기발하고 독특한 송편을 만들며 즐거워 하는 걸 보면서 나는 좀 더 창의적이고 예쁜 색깔을 궁리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올해도 차일 피일, 그냥 추석이 임박하고 말았다.

 

내가 미적거리는 사이 올해는 며느리가 쑥가루와 오미자 가루를 준비해 와서 '컬러플 송편' 시도에 적극 호응해 줬다. 새 재료를 시도해 보니 쑥가루는 반죽도 힘이 있고 빚기도 좋고 무엇보다 쪄 내 놓으니 색깔이 선명하고 예뻐 성공적이라 '우리집 컬러표'에 무난히 들어 온 것같다. 하지만 처음 써 보는 오미자 가루는 색깔도 맛도 실패로 돌아갔다. 어지간한 색깔은 내야겠기에 가루를 조금 낫게 쓴 탓인지 예쁘고 붉은 오미자 빛깔은 간 곳 없고, 히끗하게 물빠진 밤색에 강한 한약 냄새까지 내는 약송편으로 태어나,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붉은 색을 얻으려고 시도해 본 당근즙, 비트즙이 모두 실패로 이어지더니 이번의 오미자 가루까지, 어쨌거나 빨강 색깔 부분에 애로가 있음은 자명해졌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는 것이 우리집 송편의 지향점일듯하니 나는 색깔 연구를 좀더 해 봐야겠다. 스님들이 자주 쓰시는 말씀 중에 "도반이 공부시킨다" 는 표현이 있는데, 아이들 송편 만드는 일에 내가 공부 좀 하게 생겼으니 애들이 내 공부 시킨다고 해야할 것같다. 손녀는 쪽빛이 나는 푸른 색을 원하는데 연구해 봐야할 일이다. 우선 블루베리를 생각해 봤으나 이름이 블루베리이지 쪄 내고 나면 포도빛에 가까울 것 같긴한데 시도해 봐야겠다. 사실 푸른 빛은 식욕을 떨어뜨리는 색깔이라 식탁에 널리 이용은 않지만 예쁜 송편 만드는 것에는 제격일 것같다.

 

우리 집은 추석에 송편 차례를 모시니 송편이 거의 주인공의 지위라 나는 송편을 반드시 빚어야 했었고, 그 세월이 40년이 넘어 있다. 하지만 송편은 기계로 찍듯이 빠르고 숙달되게 빚어지지 않아 아직도 무척 손을 써야만 한다. 지금은 며느리와 손녀까지 원군이 있어 큰 힘이 아니드니 고맙고 대견한 마음에 추석이 즐겁다. 젊은 시절, 음식 장만을 다 마치고 아기들 재운 연후에 나 홀로 송편을 빚어 쪄 내고 나면 날이 뿌옇게 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멋지게 척척 잘도 빚어 내는 며느리에, 독특한 송편을 구상해내느라 전전긍긍하는 손녀들까지, 이런 즐거움이 없다.

 

나는 시어머님 생전에 시댁에서 단 한 번의 추석을 지냈는데 송기와 모싯잎 송편을 만드는 것을 지켜 보았다. 송기라는 건 소나무 속껍질인데 호박오가리처럼 긴 모양을 하고 있었고, 모싯잎은 마치 조금 큰 단풍잎처럼 생긴 푸른 잎이었다. 물론 난생 처음 보는 식재료여서 생소하고 퍽 신기하게 여겨졌다. 곧바로 내가 제사를 모시게 되었고 고지식한 나는 꼭 시어머님 하시던 걸 그대로 고수해야 하는 걸로 알아 송기와 모싯잎을 어렵게 시골에다 부탁까지 해가며 구해서 쓰곤했다.

 

송기라는 것은 소나무 속껍질이라는데 굉장히 질겨 소다를 조금 넣고 뭉근한 불에 오래 오래 섬유질이 늘어질 때까지 삶아서, 꽁꽁 찧어 풀처럼 만들어야 했고, 모싯잎은 데쳐서 물기를 꼭 짜서 방앗간에 가져 가면 되는데 기계에 색깔이 묻느지라 굉장히 싫은 소리를 들어야했고, 적은 양의 가루를 빻아 주지를 않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소나무 속껍질을 벗기자고 나무를 훼손할 것이라는 생각에 싫어졌는데, 알고보니 송기가 구황식으로 가난한 시절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았던 식재료였다고 해서 놀랐다.

 

그러나 솔향이 온 입 가득한 송기송편은 향기로웠고, 모싯잎 송편은 우아하고 고운 녹색으로 내게 눈호사를 선물했었는데, 요즘 시중에 파는 모싯잎 송편은 왜 억세고 검푸른 빛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솔잎을 사서 씻어 켜켜이 얹어 쪄내면 송편이 서로 붙지도 않고 솔향을 머금어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참 좋은 재료들이었다. 지금은 솔잎을 따서도 아니되고, 딴다고 한들 얼마나 매연에 찌든 솔잎인지 통 알 수가 없어 아예 안 쓰게 되었고 우리 기억과 미각에서 사라질 처지에 있다.

 

송편 빚는 일은 재미보다는 지루한 일에 가깝다. 더구나 흰색 송편만 빚고 있으면 너무 지루하고 멋이 없어 궁리한 것이 포도 송편, 치자 송편이다. 포도는 예쁜 색깔에 포도맛까지 더해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귀엽고, 치자는 색깔이 환상적으로 예뻐 사랑해 주는 재료이다. 올해 치자 송편은 색깔이 조금 어둡고 덜 고왔지만 점잖은  분위기가 있어 그만하면 됐다고 평가했다. 시골장에서 산 치자를 다 쓰고 올해는 인터넷으로 샀다고 하니 유통과정상 아무래도 품질이 떨어진듯했다.  

 

지루한 작업을 아이들도 동참해 보라고 시작한 것에 손녀들은 손놀림이 그야말로 매직이라 얼마나 멋진 작품들을 빚어 내는지. 나는 예전에 빚었던 송편 사진들을 찾아 보며 정리를 해 두려 한다. 일취월장이고 점입가경이라....

미리 궁리해 둔 것도 없건만 가루를 만지면 감각적으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규영이는 연꽃 한 송이를 피우려 반죽을 실낱같이 뽑아내더니 꽃심이 다북한 수련 형상을 만들어 냈고, 세영이는 귀염성스런 닭, 쥐를 만드느라 어깨도 아팠을 것이다. 동물 모양 송편은 반질거리는 것이 매끈한 도자기 인형으로 착각하게 생겼다. 참기름 발린 얼굴에 언니가 검정깨 눈을 붙이니 찔끔 미끌어져 내려 짝짝이 눈이 되었고, 그것도 유머러스하고 하여 나는 어디 송편 경연대회 없느냐며 우스개 소리를 날려 보기도 했다. 

 

매년 달라지는 송편 모양을 더듬어 보면 순간 순간의 취향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올해는 저희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이니셜을 송편에 갖다 붙여 나는 그 설명을 들어야 했고, 누군지 몰라도 그 가수는 퍽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글자 다치지 않게 조심 조심 쪄 내고 또 쪄 냈다.

"하멜이 뭐니? 하멜 표류기야?" " 음, 네델란드 사람인 건 맞아."

이런 실 없는 말이 송편 위를 넘나들며 올해의 송편 퍼레이드도 무난히 끝을 맺었다.

 

 추석이라고 미국 사는 딸네 가족들이 화상 전화를 걸어 와서, 상차림을 카메라로 보여 주었더니 솜씨라면 남 뒤쳐지기 싫은 막내 손녀는 부러움에 찬 눈길을 송편에 꽂고 있었다. 애 속 상하게 보여주지 말라시는 할아버지 말씀에 나를 카메라를 걷었고, 언니들도 보고싶고 송편도 만들고 싶었을 애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나는 어린 시절 추석이면 항상 한복 한 벌 새로이 받는 것을 고대했다. 어머니께서 포목점에 가서 마땅한 감을 골라, 바느질을 하시는데 옆에서 지켜 보는 것도 좋았고, 다 만들어진 새 옷을 추석 날 아침에 입을 생각에 잠을 설칠지언정 송편이니 전이니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나로서는, 송편을 빚겠다고 나서는 손녀들이 그렇게 장하고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청출어람 (靑出於藍) 이라고!

마법 쓰듯 손끝을 놀리고, 창의적인 구상까지 자유자재로 해 내는 네 손주들을 보며, 또 거슬러 올라가 손놀림으로 치면 둘째 가기 서러운 나의 아들, 딸들에게 이 말을 적용해도 한 치의 거리낌이 없을 것같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기보다 나은 재주를 가진 자식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을 터, 소망이 현실이 된 나는 행복해야 하는 것이 맞다.

 

연일 공항 입국 인원은 최고치를 경신하고, 고속도로 귀성차량이 몸살이 난다고 해도 그건 누구나 언제나 마음 먹으면 해 볼 수 있는 일인지라 별 부럽지가 않다. 송편 감상하고 보내는 차분한 우리집 추석 풍경이 나름 의미는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긴가민가하며 지나치는 소소한 즐거움들도 지나고 보면 뭣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일 수 있다. 사진을 정리하며 보니 아이들이 송편 만든 세월도 꽤 됐다는 걸 알았다. 송편 빚는 아이들의 손도 커지고 마음도 커져 가는 걸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 2008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진은 2013년부터 선택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