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7년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다시 보며.

수행화 2017. 10. 22. 22:27

 

올해는 윤 5월이 들어 유난히 여름이 무덥고 길었나 했더니 의외로 가을이 곱고 더 길지 않나 싶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입니다.'
(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 - Albert Camus.)

지난 주 들렀던 병원 통로에 크게 나붙은 글을 보고, 마음에 들어 새겨둔 말이다. 잎이 꽃으로 번져 가는 이 가을에게 섭섭치 않게 어제 화담숲을 한나절 쉬엄쉬엄 걸었더니, 미처 나가지 않은 코감기가 자기 존재도 잊지 말라 경고라도 날리듯 종일 후두두둑 콧물을 내 놓고 있다.

마음은 가을 콩밭에 내 보내고 신문만 건성 건성 넘기고 있는데, 멋진 소식들이 연신 스마트폰에 날아든다. 하얀 지붕이 바다와 더부러 그대로 엽서가 된 산토리니, 지중해를 물들이며 붉게 저물어 가는 일몰의 광경을 전해 받아, 나도 뭐라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어제 걸었던 화담숲의 아담한 풍경을 띄워 보내고 돌아 서니, 이번에는 웬!

또 다른 친구가 곱게 물든 단풍 나무를 배경으로 멋진 포즈를 취한 사진이 째깍 도착하며 속초와 월정사에서 제대로 가을 맞이를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충청도 산막이 길을 가는 중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뒤따라 온다. 이런! 핑퐁 게임이 따로 없다. 그들은 지금 인생의 가을을, 두번째 봄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이 화려한 가을 나절을 열정적으로 만끽하는 사람과 그저 따스하게 바라 보는 나와의 사이에 평화로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창을 통해 비 오는 풍경을 바라 보는 일이나, 어두워지는 바깥을 바라 볼 때 느껴지는, 적절한 거리가 주는 편안함이 있는 기분 좋은 오후이다. 빈둥거리며 감기 단속을 좀 하려니 좀이 쑤셔 책상 정리를 해 보다가 혜민 스님의 산문집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을 다시 잡고 앉아 있다.

완벽한 행복, 완벽한 하루, 완벽한 관계......완벽이란 그때 그때 마음 가는대로 매겨질 고무줄 기준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모두들 자기만의 잣대로 완벽한 상태를 좋아한다. 나의 완벽하지 않은 부분에 불편해하고 슬퍼하며 부족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 배경이 '혜민 스님'께서 sns에 연민심을 담은 글들을 띄우게 했을 것같고, 그게 쌓여 책이 된 듯하다. 굳이 목차대로 읽을 필요 없이 아무 페이지나 아무 시간에 그저 읽으면 되는 글이라 부담이 없다. 짧고 순한 언어는 강렬하지가 않아 나는 무심히 책장만 넘겼던지 다시 보니 새삼스럽기만 하다.

"오늘 사랑하는 나하고만 시간을 보내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 들이듯 나에게도 공들여 보세요."

"살면서 가끔은 나를 위한 소박한 사치를 허락하세요. 식탁에 올려 놓을 아름다운 꽃 몇 송이를 사온다든가 커피와 함께 먹을 맛있는 치즈케잌을 한 조각 산다거나........ ( P.42 )

"한정판으로 나온 최고급 명품도 똑같은 것이 수십개씩 만들어져 나옵니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명품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뿐인 개성 있는 나라는 명품을 아껴 주세요."   ( P. 43 )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고 챙겨 주고, 또 그래서 상처를 받습니다. 너무 많은 요구를 하고 너무 많은 요구를 받아 결국에는 서로가 감당이 안 되는 채무관계처럼 돼 버립니다. 그래서 관계는 난로 다루듯 해야 합니다. 너무 뜨겁게 다가오면 한 걸음만 뒷걸음질 하세요 " ( p.65 )

자신을 위해 지갑을 열고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늘 후순위의 일이 되고, 남을 변화시키기는 어려운 일보다 내가 한 발 물러서며 상대에 맞추는 낮은 자세를 마다 않으며 우리는 살아 왔다. 세상에 여자가 없다면, 주부가 없다면 전쟁만 무성해 모두들 멸망할 것이라는 말로 한번 웃어 넘기고 위로 삼았던 시절이 남의 일이었던 양, 멀기만 하다. 스님은 지나치게 주변을 챙기는 일방적 관계의 피로감을 털어내고 사소하나마 현실적인 자기 사랑을 권하시고 있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진실로 사치롭다. 꽃이나 케잌이 없어도 내 즐거움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고맙고도 소중하게 여겨진다. 혼밥, 혼술이라는 말에 쓸쓸함이 묻어 있지만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어 잘만 쓴다면 호사스럽기도 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누군가와 부대끼며 말하고, 비교하고 계산하고 저울질 하느라 분주하던 시간의 끝에는 늘 공허가 있다. 홀로 침묵하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크나 큰 위로가 된다. 

상처 받고 치유하려 골몰하는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보내는 글도 같이 메모해 둔다.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은 치솟는 분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처가 깊을 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한 분노와 마음은 손상된 자아가 그 사람과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고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일으키는 지혜로눈 감정이다. 분노는 일종의 보호 장벽과도 같아서 깨지고 부서진 자아의 상처가 어느 정도 마물고 회복될 때까지 나름의 역할을 한다."  P. 197.

 "구름이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은 울 수 있을 때까지 우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울 수 없게 되면 지금까지 흘린 눈물의 무게만큼 구름은 가벼워져 슬픔을 자기 마음 하늘에서 보낼 수 있어요. 슬플 땐 구름처럼 좀 울어도 괜찮아요." P. 21

무슨 권리인지 알 수 없지만 남에게 마음껏 분노를 끼얹는 사람이 주변에 널려 있다. 반면에 무방비로 공격을 당하고도 되받아 반격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끙끙대며 마음 속 분노 노트에 착착 기입을 한다. 훗날 펼쳐 보며 복수의 일전을 펼 기회조차 잡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갇힌 분노가 쌓이다보면, 공격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만만한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 스스로를 한 없이 힘들게 하는 병을 얻게 되는, 불공평한 결과에 이르게 된다. 

상처와 모욕감으로 고통을 안겨 준 사람과 경계를 두며 자기를 보호하고, 시간의 힘을 빌려 마음의 평정을 구해본다지만, 절대로 없던 일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걸 훗날 알게 된다. 그래도 분노가 연민심이 되기까지 마음에 마법을 걸어야 한다. 

요즘 부쩍 분노 조절 장애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세상살이가 복잡해져 감정 제어가 어려워진 것이 당연하다는 넓은 아량에서인지 모르겠으나, 분노 표출에 대해 원인과 동기를 분석해 가며 다소 온정적으로 이해해 주는 경우들을 보곤 하는데 나는 그 견해에 반대하고 싶다. 어떤 경우라도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흉기처럼 휘두르는 사람을 정당화해 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인들 알게 모르게 남에게 함부로 분노하고 뒷감당을 하지 않은 일은 없었나 짚어볼 때가 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싫어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싫어하는 것은 엄격히 말하자면 그 사람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 잠시 머물다 그냥 떠나지만 어떤 사람은 잠시 머무는 동안 우리 삶 크게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발자국을 가슴 속에 남겨 놓고 떠난다. 플라비아 위즈  P.171 

 

자주 만나는 사람이 자기 인생의 내용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 나는 날이다. 딱히 절교한 것도 아니건만, 우루룩 분노를 끓여 아무렇게나 퍼부어 대는 사람이 슬그머니 내 인생의 장에서 지워져 가는 것이 문득 상기된다.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에서 빠져나가기도 할 것이나 서러워 말자며 마음을 한가로이 가지려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인생에 풍부한 내용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꺼려지는 어두운 배경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변함은 없다. 그런 마음에 조심성만 늘어가니 점점 소극적인 나날을 보내는 것같다. 이 가을을 그렇게 보낸다. 

 

여름 내내 열정적으로 일을 하던 나뭇잎들은 소슬 바람 한 줄기에서 급한 기별을 읽었는지 저마다의 노랗고 붉은 투명한 차림으로 떠날 채비에 들어 있다. 들고 날 때를 확실히 아는 성숙을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장렬한 이별의 의식에는 무심한 채 넋 놓고 단풍잎 화려함에 온 마음을 바치며 가을을 보내고 있다.

나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매운 콧잔등을 다스려 가며 나에게 게으른 하루를 선물하고 있다. 스님 말씀하신 소박한 사치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