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8년

'타샤튜더' - 'still water'

수행화 2018. 10. 8. 00:14

나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여름이 남긴 자투리 더위까지 안고 가려는 가을비는 차분하고 반가운 손님이다. 비가 내린다는 건 늘 장면의 변화를 예고하고 지금 우리는 가을 길목에 있다. 나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비 오는 날은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 간단 없는 빗소리를 듣거나 빗줄기가 뿌옇게 장막을 드리우는 대기를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도 우중에 차를 몰고 영화를 보러 나섰다. 

'타샤 튜더'

 

몇년 전 '타샤튜더의 정원'이라는 책을 읽고,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에 깊이 매료 되었고, 얼마간 그녀의 일상을 따라잡아보고 싶은 막연한 소망을 가져 보기도 했었다. 그녀의 스토리가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하니 미처 못 본채 넘어 갈까봐 마음이 초조해진 건 당연하다 해야겠다. 영화는 일본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였고, 2008년 작가가 죽기 전 10년에 걸친 대화와 기록이라고 했다.

 

많은 대화나 사건이 없는 영화는 그림같은 정원의 사계와 자기만의 정원을 가진 행복한 타샤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 감명을 자아내는 것이 참신해 보였다. 구순에 이르렀는데도 얼굴에 순수함이 가득하고, 방금 동화 속에서 톡 튀어 나온 듯한 자태를 간직한 것에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황무지나 다름 없던 3만평의 땅을 일구어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요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에게서 나는 어떤 경지에 이른 성녀의 모습을 분명 보았다. 

 

타샤의 정원은 자연친화적이고 퍽 인간적이다. 영화나 그림을 통하여 우리가 접해 보던 유럽의 왕궁이나 대저택의 잘 관리된 정원이 계획된 훌륭한 작품이라면 이 정원은 한 땀 한 땀 땀으로 이룬 소박한 수제품을 바라보는 감상이라 말하고 싶다. 초원처럼 펼쳐진 야생화 물결, 함박꽃 화려한 뜰에 과일나무나 자연식을 제공할 텃밭은 기본이다.

 

타샤 튜더는 1915년 보스톤의 명문가에서 수학자인 아버지, 초상 화가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헨리 소로, 마크 트웨인, 아인슈타인, 에머슨 등 저명인사와 친분을 가질 정도의 지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곁에서 그림을 그리고 배워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은 좋으나 생활력이 없었던 남편을 만났고, 이후 그녀는 네 남매의 양육을 책임져야 했으며, 23살에 직접 삽화를 그려 넣고 쓴 첫 동화책을 들고 여러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거절 당했고 마침내 옥스포드 출판사에서 받아 주어 처음 출판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름도 어여쁜 'pumpkin moonshine'이라고 한다. 이후 70년 간 그녀는 100권이 넘는 동화책을 출판했으니 미국의 웬만한 아이들은 그 책을 읽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성공으로 받은 인세로 그녀는 버몬트에 3만평의 땅을 마련하여 꿈의 실현에 착수한 것이다. 56세의 나이에 남은 인생을 담보로 모험에 들어간 것으로, 용기 있는 자만이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도전인 것이다. 그녀는 1915년 생으로, 2008년, 93세의 나이에 이 곳에서 생을 마쳤으니 30년 이상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며 이 곳에서 살아 이제 곧 전설이 될 것이다.

 

껑충한 키에 깡마른 그녀는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놀라운 에너지를 가진 강인한 여인이라 봐야할 것이다. .꽃을 피우는 일이지만 가드닝은 노동이 집약되어야 하는 일종의 농사로 천부적인 재능과 타고난 부지런함을 갖춘 자라고 해도 엄청나게 힘든 작업일 터인데 하물며 여자의 힘으로 해 냈으니 어땠으랴 싶다.

정원을 가꾸는 일이 15년은 걸렸다고 말한다. 나무나 꽃의 마음을 읽어 주고, 불편을 느끼면 옮겨 주고 어떤 환경을 원하나 궁리해 주고, 끊임없이 보살펴 주면서 기다리면 마침내 꽃은 아름답게 태어나 노력에 보답해 준다는 것. 꽃을 향한 믿음이요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눈이 많이 내려 예쁜 꽃이 필 수 있게 도와 주기를 소망하는 백발 여인의 심상이 꽃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자기에게 행복의 비결을 묻는다면 내면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이라 말한다. 현대인은 너무 바쁘게 살아 지나쳐 버리는 것이 많으며, 많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을 모르니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말이 충고로 들린다. 정원을 바라보는 것, 예쁜 찻잔에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것, 애완견이며 동물을 사랑하는 것, 손에 잡히는 이 모든 것이 행복인 것이다. 여기서 지내는 걸 좋아할 것이라며 계란만한 병아리를 품에 넣고 다니는 타샤튜더는 섬세한 행복을 만드는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행복을 행복으로 선택하는 눈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이다.

 'still water' , 자기가 지어 낸 말로서 '고요한 물이라는 뜻이며, 자기의 인생관이라고 한다. 인생관은 담담하나 열정적인 삶을 보았고, 인생은 짧아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귀에 담았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 좋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남을 만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고 생활에 도움을 주어  좋았으며, 그래서 자기는 행복했고 지금도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카드나 돈만 들고 나가면 집도 사고 속성으로 떠르르하게 살림을 마련할 수도 있는 세상에 산다. 19세기풍의 농가를 지어 구식 철제 스토브를 쓰고, 양초를 만들고, 손수 재배한 농산물로 가공식품을 만들고, 뜨게질 하는 불편한 삶을 고집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신속한 것, 빛나는 것에 단단히 중독된 삶을 살며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산다. 바삐 움직여서 남겨진 시간은 뭐에 썼었나 생각해 보니 허무한 마음이 든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찿아 자기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일관되게 고집하며 살 수 있었던 타샤튜더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사람인 것이 맞다. 나는 땀과 인내를 동력으로 행복을 경작했을 그녀의 인내와 부지런함에 무한한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여름의 격한 노동에 가을은 감미롭고, 겨울은 축복처럼 위안을 줄 것인데 영화를 보고 난 지금도 아름다운 정원의 영상만 머리에 가득하다 원,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우(憂)를 나는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꿈을 버렸고 자책했고, 길을 잃었다. 자기를 내몰아도 좋을 일 하나 찾기보다 안되는 조건, 불편한 조건 백 가지 찾는 일에 더 열중했던 것같다. 요즘 나는 눈이 불편한 것에 신경이 몹시 쓰여 책 보는 일 하나도 떠듬거리고 있다. 할 수 없어 동네 안과에 갔더니 심한 안구 건조증으로 망막에 염증이 있다고 안약을 줘 넣어 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불편한 건 어쩌지 못하니 심란하기만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한 톨 낭비도 없이 오롯이 자신을 사랑하고 정원을 사랑하는 데 바친 여인을 생각하니 나는 더욱 작아지고 있다. 일어났다 앉았다를 거듭하며 시리고 진물나는 눈을 씻고 또 씻어 본다. 태풍 '콩레이'가 일본을 관통한다고 하더니 남해안에 영향이 있어서인지 빗줄기에 배인 바람이 실히 분다. 머어언 곳을 바라 보고 싶은데 어쩌지 못해 아파트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산을 궁색하게 바라 봐가며 글을 썼다.

혼자 있기에 익숙하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가까운 곳에서 행복찾기......
복으로의 초대요 키워드라 해도 좋을 것같다. 영화 한편에 참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