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8년

가을 낮의 단상

수행화 2018. 10. 13. 23:21

 가을이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매의 눈을 하고 시간의 길목을 지켜본들 그 종종걸음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산천을 태우려 들던 뜨거운 열기는 어디로 빠져 버린 것일까?
가로수가 가을물을 들이는 것도 하룻밤 사이로, 계절도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자꾸 닮아가는 것만 같다. 어제는 하늘이 너무 높아 가만히 집에 있으면 손해 보는 기분이고, 어물쩡 하는 사이 가을 하나를 또 잃을 것같아 남편과 목적 없이 그저 나서기로 했다. 

집을 나서며 며칠 전 친구가 가볼만한 카페를 일러 주어 거길 가보자고 해가며 일단 내비에게 길안내를 맡겼다. 올해 들어 양평 쪽으로 나들이 간 기억이 없어 강 바라볼 생각에 미리 머릿 속이 시원해졌고, 먼 산마루에 구름이 폭죽처럼 터저 나와 길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했다.

그런데 웬일? 내비가 최적의, 최단의 길을 알려 주는 바람에 기분이 살짝 나빠진 것이다. 강일 IC 에서 우회전하여 바로 서울 양양고속도로에 진입하라는 내비 말을 엉겁결에 따르다보니 북한강 길은 삽시간에 물 건너 갔고 산이며 터널을 보며 달려야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 아니라지만 가슴이 답답한 건 답답한 거였다. 열심히 일하는 내비를 원망하면 무엇하리! 내비에게만 맡기고 미리 머릿 속에 지도를 그리지 않은 나의 실수였고, 무엇보다 지금은 우리가 매사에 치밀하지 못하고, 일사분란하게 손발을 척척 맞추는 일에 등한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내비 없던 시절의 우리 부부는 드라이브에 있어서 환상의 콤비라 해도 좋았었는데 말이다. 나는 무릎에 커다란 지도를 펴고 앉아 톨 게이트 들고 나기, 다음 블록 우회전 좌회전 하기 등, 지도 봐가며 길 안내를 해주면 남편은 여유 있게 운전만 하면 됐었고, 가끔 애매할 때는 맘 편히 길을 물어 가면서 어디든 다녔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공부하던 시절, 주말의 여유 시간은 짧았지만 요모조모 시간을 재가며 잘도 다녔었다. 지금처럼 정보가 쏟아지는 시절이 아니어서 신문이나 지도를 봐가며 나름의 정보를 만들어 서울 근교의 절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 다니기도 하고, 가끔 길이 새롭게 개통되었다고 하면 바로 달려가 보곤 했었다. 

30년이나 됐을 것 같은 어느 해, 토요일 조간신문에 양평군 수입리 길 어느 구간의 도로포장이 마저 완성되어 개통되었으니 강변 드라이브 길이 더 연장되었다는 기사를 읽어 남편이 퇴근하기 무섭게 길을 나섰던 기억이 났다. 양수교를 지나 좌회전하여 강변길을 어지간히 달려 그 길을 만났고, 아직 차들이 따문 따문 보여 마치 우리가 새 길이라도 개척한 듯 기분이 우쭐했었다. 강변에서 시간을 보내다 되짚어 돌아 오니, 그 날 신문 기사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차를 몰고 나온 모양으로 그 길을 향해 들어 가는 차량 행렬이 줄을 이었고, 차창을 열고 이 길로 가면 새길이 연결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몇몇이라 잊히지 않는다. 한 발 먼저 발도장 찍어 길도 막히지 않았다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연히도 우리가 가려는 카페는 에전의 그 수입리 길을 지나게 되어 일없이 반가웠고, 이 길을 지나칠 때면 언제나 떠올라 주는 그 기억이 기특하기만 했다. 망중한의 여유에 감사하며 나다니던 그 시절이 도리켜 보니 금쪽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고불고불 들어가 앉은 카페에 당도했다.


카페는 듣던대로 넓은 정원에 아담한 레스토랑과 커피숍이 정감 있고, 뜰에 따문 따문 테이블도 많아 계절을 느끼기 좋은 곳이었다. 몇 걸음 내딛으니 품이 넉넉한 개울이 산자락에 의지해 굽이져 흐르며 자갈밭도 소담스레 거느리고 있었다. 산 그림자가 푸르게 잠긴 물빛을 꼼짝 없이 바라 보는 사치가 좋아 나는 시간을 잠시 잊기로 했다. 사람 멀미를 안해서 좋고,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아도 돼 더욱 좋았다.

사실 나는 가만히 앉아 애들 쓰는 말로 멍 때리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 한다. 몸이 아프지 않으면 뭐라도 꼬물거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똑 부러지게 구축하는 것도 없으면서 그저 나를 힘들게 하는 습관이다. 결을 이루며 소리 없이 가만 가만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그런 나의 시간 사용법이 진정 합리적인가, 나에게 헌신하는 일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자문해 보는 망상을 피웠다. 참선하노라 앉으면 그렇듯이 몸이 가만 있으니 머리만 일을 한 것이다. 


멍 때리고 물빛에 빠져 있다 고개를 드니 저만치 햇빛을 등지고 걸어 오는 남편의 새하얀 머리칼에 가을 햇빛이 따라오며 반짝였고, 나는 공상에서 화들짝 깨 불현듯, 습관처럼 시계부터 본다. 시간밥 먹일 아이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빨리 집에 가야겠다며 털고 일어난다. 그 사이 뜰에 사람들도 조금 줄었고, 미련은 거기다 두고 밖으로 나오니, 매표소 아주머니가 "멋지고 보기 좋습니다" 하며 함박 웃음을 건넨다. 보기 좋다니 나도 좋아서 고맙다는 답례를 보내며 나왔다.


오는 길은 남편을 쉬게 해주기도 하고, 강변길을 찾아가려고 내가 운전을 했다. 내비는 예외 없이 고속도로로 안내하려 들었고, 나는 애써 무시하고 달려 예전에 자주 다녔던 양수교를 건너 좌회전하며 대로를 피해갔다. 팔당댐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달리니 지금은 호젓해진 구 길에 제대로 들어 선 걸 알았다. 곧 페점이 된다는 세시봉 간판도 봐가며 강변을 따라 오니 이제 가을이 깊어져도 유감이 없을 것 같았다. 


강물에는 늘 애달픈 파장이 있다. 그 파장에 내 안의 슬픔은 어김 없이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가슴에서 한껏 부풀어진 슬픔 주머니는 목까지 차 올라, 마침내 '휴-우우우' 긴 호흡으로 터지면서 슬픔이 기체가 되어 흝어지던 순간들이 거기 있었다. 그러므로 강이 불러 오는 슬픔은 진정 슬픔이 아닌 어떤 정화의 기운이라는 마음을 간직할 수가 있어 강변길은 늘 좋았다. 말 없이 흐르는 강물에 슬픔을 적셨다 건졌다 하던 날들이 나의 젊은 시절이었구나 생각하며 달렸다. 


일본인 누군가의 책에서 읽은 기억으로, 기억력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이틀 전의 일기를 쓰고, 외출에서 돌아 오면 자기의 하루 동선을 머리에 한번 상기시켜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저녁에 네이버 지도를 들여다 보고 우리가 다녔던 길들을 지도에 그려 보며 다음 목적지 하나를 만들어 보려니 강산이 변한만큼 지도의 변화는 더욱 섬세했다. 자주 가던 옛길은 이제 곧고 굵은 실선으로 그어져, 모두들 고속의 길이 되어버렸고, 길찾기는 자꾸 그 길을 가르쳐 주어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운치 있던 한계령 길이며, 춘천, 속초 간의 라면땅처럼 고불거리던 산길이며, 이화령 숨가쁜 고갯길이며........

잊혀진 길들을 찾아 메모해 두려니 이제는 찾아 다니기도 힘든 길이 된 것같아 의욕이 떨어진다. 맥이 빠진다고 해도 나는 더디 다닐 길을 궁리해 보는 이 가을이 좋다.


폭염에 안부가 걱정되던 과일들이 살지고 단맛이 가득한 얼굴을 내밀어 놀랍고 반갑다. 지난 여름 농부와 곡식과 과일들이 보낸 의지의 날들에 나는 뭘했나 싶어 저절로 겸허해진다. 무거운 감송이는 까딱 없이 달고 있던 감나무가 가볍게 이는 산들바람에도 잎새를 겨워하며 떨궈내고 있다. 채울 줄 알고 비울 줄 아는, 때를 아는 나무의 지혜를 가을이면 본다. 

아름다운 카페 정보를 주어 가을 한 나절을 따뜻하게 해 준 친구에게 고맙단 인사는 꼭 보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