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앨범/2018년

태안반도에서. 1박 2일

수행화 2018. 11. 8. 11:11


더위를 힘들게 업어 넘긴 연유일까, 이 가을 산천이 유난히 곱고 찬란하다. 
옷을 껴 입으면 따스한데 나이는 껴 입을수록 오스스하다. 서글픈 증세에는 여행 처방이 묘방이지 싶어,
청춘의 기억이 가물거리는 70년지기 벗들끼리, 사부작 사부작 가을 가운데를 가르며 걸었다.
태안반도 주변 발길 수월한 곳,   

천리포 수목원, 신두리 해안 사구, 수덕사, 해미읍성... 으로.




< 천리포 수목원>






천리포 수목원의 숲은 소슬하고 유순했다.
 매표소 지나 솔 숲 오솔길을 들어서면 탄성 이외의 말을 잠시 잊게 된다.
곧 초가인듯 초가가 아닌 오두막 집이 연못 건너 아련하다.
진정 소박해서 아름다운 정경이다.
해질녘이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를 것만 같다.
천리포 수목원 안내판이 낙관 찍어주는 포토죤이다.


이 곳이 푸른 눈의 한국인 민 병갈 원장님이 40여년 일궈낸 우리나라 1세대 수목원으로, 
국제 수목학회가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한 곳이란다. 

머~얼고 아련한 이름을 달고 있는 천리포 수목원 여행은 이 가을에 받은 선물같고 예감이 좋다.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어 우리는 목적을 갖고 길을 걷는다.
하지만 솔내음 은은하고 햇빛 보슬한 이 오솔길에 빤한 목적지는 달갑지 않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안 보였으면 하는 맘 뿐으로 걸으니 싸한 것은 공기가 아니라 내 마음 속이다.





나무에게 안녕을 물어 주고, 걱정해 주는 곳이라 해야겠다.
이 땅의 산천초목을 우리보다 더 사랑한 민병걸 이사장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그의 한옥 사랑이 이 아담하고 귀여운 초가 지붕을 고안해 냈나 싶다.




생을 마친 풀과 열매와 꽃들이 액자 안에서 마지막 헌신의 날을 보내고 있다.
의자에 앉아 꽃과 씨앗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생각해 보라 이르는 것같다. 


 

 건물 한 켠에 지금 도예전이 열리고 있었다. 
도예전을 보면 늘 조심스럽다. 만드는 이의 인내가 선의 경지였으리라는 짐작에 그저 엄숙해지고 있다. 

오랜 세월 풍화된 흙으로 그릇을 빗고,
사과나무 콩깍지, 볏집을 태워 재를 만들어 도자기 유약을 입힌다.
그리고 잘 마른 소나무로 그릇을 굽는다.
.....................

하나의 그릇에는 자연의 조화와
정성과 염원이 담겨 있다. 물 한 모금....밥 한 술.....

모든 열매는 자연의 소중한 선물이다.

작가의 글을 읽고 앙증스레 걸려 있는 등잔을 마음에 담고 나온다. 






그를 민병갈 이름으로 알 뿐, 본명 Carl Ferris Miller  아주 생소하게 들린다.
민병갈 원장님의 서거 소식을 들은 게 벌써 16년 전이라니.....
2층 한 켠에 준비된 영상을 보면서, 결혼을 했었다면 이 일을 열심히 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는 부분에서 진정 나무를 사랑한 한 성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1962년 부지를 매입하고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으며 수목원을 조성하였고,
당시에는 교육 및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목적으로 관련분야 전문가, 후원회원 등으로 입장을 제한 했으며, 2009년에 일부지역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강동 씨앗 도서관, 광명 씨앗 도서관, 안양 씨앗 도서관, 수원 씨앗 도서관, 예산, 홍성.........
씨앗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전국에 걸쳐 있다는 사실이 참 놀랍고 가상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일에 열중하는 누군가가 있어 세상은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식물의 씨앗을 보존하고, 해외의 식물과 비교 연구하며 한국의 식물을 세계에 알리고
또 국민들에게도 식물을 더 알리려는 교육의 장이라는 본연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숲은 그저 왁짜하게 즐기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온다. 





우리나라 토종 식물, '완도 호랑가시 나무'와 외국산 목련의 잡종, '라스베리 펀'이 민병걸의 나무라는 설명이 있다. 1978년에 발견하여 전 세계에 퍼뜨린 완도 호랑가시 나무와 파종 실험으로 얻은 라스베리펀도 세계 목련도감에 오른 식물로서 그의 40년 나무 인생을 대변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설명하고 있다.

면적이 17만 평이고, 7000여 종의 식물이 있으며, 200만 그루의 나무로 이 숲을 조성하였다 한다.
자신의 전 재산을 나무 사랑에 쏟으며 집념의 생애를 보낸 그에게 산림 분야 최초로 금탑 산업 훈장이 주어졌고, 숲의 명예 전당에 헌정되었다고 한다. 





씨앗이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나무가 숲이 되는 평범한 생태계가 기적처럼 느껴진다.
무궁화 꽃 그림으로 썬팅된 창들이 예쁜 이곳이 민 병갈 원장의 집무실이었나 싶다. 







해외에서 들여 온 식물들이 우리 식물들과 낯 가리지 않고 군데 군데 어우러져 살고 있다. 
나는 실로 나무맹(?)이라 꽃이름 나무 이름을 거의 모른다고 해야겠다. 
나무 이름도 꽃 이름도 잘 알지 못하면서, 뽀족 뽀족한 초록색 나뭇잎에 앵두처럼 빨간 열매를 그려 넣으며,
상상력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대던 어린 시절 생각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그 상상 속의 초록 잎 붉은 열매가 눈 앞에 아름드리 나무로 서 있는 호랑가시나무였다니......
소설 속에서 가문비 나무는 왜 그렇게 서정적으로 자주 묘사되던지.....
그걸 캐서 알아 볼 요량도 없이 지금껏 잘도 살았었네.




 해송집, 베롱나무집, 다정큼나무집, 등 수목원 안에 따문 따문 정갈한 집들이 있다. 한옥을 사랑한 민 선생님께서 짓기도 하고 옮겨 오기도 한 집들에다 멋진 이름까지 붙어 줬다고 한다.. 


'다정큼 나무'라는 몹시 정다운 문패가 새겨진 집 앞을 지난다. 알고 보니 가까이 있는 나무 이름을 따 이름 지어줬다는데, 다정하게 지내면 잘 자라는 나무가 있는 모양이지! 얼마나 어여쁜 이름인가!





소나무 숲 길은 곧 해변가 산책로로 연결된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것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소나무는 소나무로서, 바람은 바닷 바람으로서 제 자리 제 소임을 다 하는 것에 우리는 깊은 위안을 받는다.

지금은 묵언 수행 중인 숲에 함부로 말을 걸지 말아야 할 일이다, 가만 가만 숨 죽여 움직이는 바다를 경이롭게 바라 볼 일이다. 나무 의자의 온기를 느껴가며 느린 호흡을 즐기며 오래 오래 앉아 있을 일이다.
안과(眼科) 출입께나 하며 고단한 내 눈에 이런 호사가 없다.


 







'낭새섬'이 낭새섬이 된 내력이 오붓하게 떠 있는 섬만큼 아름답다.
물이 빠지면 섬까지 걸어서 건널 수 있고, 갯벌 체험이랑 뭐 재밌는 일들이 많다고 한다.
밟으면서 지구의 맨살을 발로 느껴 보고 싶다. 






서녘을 향하느라 해는 몸을 낮추며 잘게 부서진다. 눈이 부시는 눈부신 산책길이다.  
데크 길은 언제나 우리를 실망 시키지 않는다. 그래도 이 길만큼 고즈넉한 길이 또 있으랴 싶다.
내 마음에 서해의 아름다운 가을 오후를 꾹꾹 쟁여 담아 본다. 




< 신두리 해안 사구>



사구란 바닷가 모래가 파랑에 밀려 내륙 쪽으로 이동하여 낮은 구릉을 형성하면서 아름다운 퇴적층을 만든,
모래 언덕이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국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이며
사구의 원형이 잘 보존된 북쪽 지역 일부가 
2011년 천연기념물 제 43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갔다 동백은 못 보고 막걸리집 아낙의 육자배기만 듣고 시를 쓴 서 정주 시인이 생각난다.
왜냐면 사구를 보겠다고 신두리 사구 주차장에 갔다가 사구는 못 보고 물 빠진 긴 해변만 걷고 왔기 때문이다.
발 아래 펼쳐진 해변을 들어 섰더니 모래 언덕은 안 보이고, 아기 게들의 대이동만 보고 왔으니.....
발 아래 꼬물거리는 물체를 자세히 보니 이제 막 깨었는지 손톱보다 작은 게들이 일제히 잰 걸음으로 일사분란하게 바다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살 곳을 향해 천리 만리 여행길 나선게 아니겠는가!


파라다이스에 대한 영감이 그들을 인도하는 것일까? 우리 시선에도 먼 길인 것을, 천리 만리 여정인 걸 알고나 떠난 것일까? 수억도 넘을 아기게들의 대이동은 생명체의 신비한 본능을 보는 것같고,
 서해는 말을 줄이며 생명을 품어주는 어머니같은 바다라 여겨진다.
우리 발길에 밟히면 영락 없이 죽는 이 험한 행로를 불원천리하고 달리는 게들을 도와 주지는 못하고,
장도를 응원해 주는 마음으로 최대한 까치발 걸음으로 해변을 걸었다. 


사구는 못 봤어도 장대한 생명의 에너지와 지혜를 보았으니 족하다.
저녁 바베큐 준비로 숙소로 향하며, 바다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붉은 가을해를 아까워 하며 바라 보았다.  





< 수덕사>


수덕사는 충남 에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조계종 제 7교구 본사로서,
백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한국 선불교를 일으킨 경허 스님과 제자 만공 스님은 이 곳에서 많은 후학을 길렀으며, 근대 불교의 선풍을 일으킨 터라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으로 인정된 절이다.   






요즘 절이 고고하게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지만 수덕사 입구는 먹거리 골목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일주문 가까이 오르면 여느 절보다 깔끔하고 모던한 느낌이 들어 좋아한다.

꽃무릇이 자유롭게 피어있던 여름도 좋더니 단풍에 흠뻑 젖은 가을 수덕사는 더욱 좋다.



  


절로 들어가는 길은 그림 속으로 들어 가는 가벼운 흥분이 있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입니다"
는 싯귀가 문득 떠오르는 길, 아름다운 색채에 빠져 마음이 두둥 뜨며 머릿 속이 단순해진다.





대웅전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가 정확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의 하나라고 한다.  
절집에 올때면 늘 조상의 지혜와 혜안에 감탄한다. 세운지 700년이 넘은 건물의 이 단아함도 그렇다.
건축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건물과 지붕의 비율이나 분할이 간결하고 멋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큰 절의 일반적인 대웅전보다 폭이 조금 좁고 지붕이 넓어 보이는 건 나의 착시현상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게 멋져 보인다.


속살이 드러난 저 묵은 빛깔은 좌우에 있는 범종각과 법고각의 화려한 단청과 단호한 대비를 이루며 위엄을 보인다. 배흘림 기둥이 받쳐 든 지붕이랑, 내가 사랑하는 부석사의 목조 건물과 많이 닮았다.





 뒷산은 대웅전을 품에 보듬은듯 바싹 붙어 있다. 바위산 단풍과 풍화된 서까래의 색채  조화는 환상이다. 

관음전(↖), 명부전(↑). 단청이 고운 건물은 고운대로 보기가 좋다. 고루 갖춘 절이라 텀플스테이하면 퍽 유익하겠다 싶다.



목조 골격이 드러난 대웅전 옆면이 예술이다. 지붕이 사람 인(人)자 모양이라, 맞배 지붕이라 한다고 하는 데 우리는 실로 우리 문화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살아왔지 싶다.  

지붕 아래 목재 우산 꽂이가 내 눈에 그렇게 멋져 보인다. 얼뜨기 시멘트 불사를 해대며 절 도량을 훼손하는 일을 많이 본 탓에 이 사소한 소품도 좋아 보이는지 모르겠다. 깔끔하고 감각이 남다른 스님이 여기 계신 모양이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 

지하 1층으로 내려 가면 성보 박물관이 모양을 갖추고 있다.

 많은 후학을 길러 내시고 선불교의 선풍을 일으키신 스님들의 수행 자취를 느껴 보는 좋은 기회였다. 만공, 경허 스님은 이미 전설이 되어 아득해진 스님들이시다.





만공 스님의 누비 옷인가 한다.
기운 입을 입고 구름가듯 물 가듯 흐르는 대로 떠도는 스님을 흔히 운수납자(雲水衲子)라 칭한다.
연륜이 오랜 스님이 옷 한벌로 지내시노라 기워 입고 덧대어 입은 것을 이제는 패치웤처럼 누벼서 가사를 만들기도 한다. 
경허 스님에 관한, 만공 스님에 관한, 많은 선문답들이 회자해 오고
특히 최인호 작가의 소설, '길 없는 길'은 선사들의 대화나 화두를 크게 인용해 써서 한 때 카톨릭 신도들로부터 항의를 받아 자신이 카톨릭 신자가 확실하다고 발표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스님의 일상과 화두 법문은 형이상학적이다.





만공 스님이 조선 고종의 둘째 아들 이강 공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공민왕의 거문고.
 공민왕금이라는 글씨와 만공 스님의 시가 새겨져 있어 보물같아 보인다.

선승들께서 불도를 깨달은 후 시로 남기신 오도송 (悟道頌,),
또 흔히 열반에 드시기 전 아직은 성성한 정신으로 남기신 열반송 (涅槃頌) 들도 읽어 보니 새롭다.


붉은 가사를 두른 만공 스님, 경허 스님의 초상이며 정교하게 수 놓인 금란 가사, 홍가사,
이외 많은 불화, 조각, 복장 유물, 대웅전 나무 조각 등등이 전시된 간결한 규모의 박물관인 것같다




사찰의 연륜은 곱게 물든 나무등걸이 말해 준다. 사진은 그 위용에 크게 못 미친다.



기와 지붕의 정연한 아름다움에 찬사가 궁해진다. 
절집의 기와는 몇년에 한번 꼴로 교체해 줘야 한다는데,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같아 소중하게 바라본다.




누운채 아득한 그림이 되는 먼 산의 능선을 나는그렇게 좋아한다.
눈 앞에 유화 한 폭같은 고운 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천왕문을 지나 들어 갔다가 옆 오솔길을 따라 나오니 뜻밖에도 예쁜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설치 작품보다 더 감각적인 돌담과 돌무지가 너무 보기 좋아서이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무심히 앉아 있는 돌들이 아기부처 같고,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올라 갈때 보지 못했던 석탑을 내려 올 때 보았다.
올 때마다 처음처럼 내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이 있다는 건 뭔지 모르겠다, 





일엽스님은 선구적 지식인이다. 일본 유학을 마친 신여성으로서 역동적이나 힘든 삶을 사시다가
불가에 귀의하여 1933년 만공 스님의 상좌가 되면서 이 곳에서 수행 했다고 들었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유행가가 스님의 품위를 해한다고 항의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 일엽 스님이 이 곳에 계셨으니 그럴만도 했지 싶다. 
일엽 스님이 1971년에 입적하셨으니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다.



32세에 속세의 인연을 끊었으나 훗날 아들, 김 태신이 일본에서 돌아와 스님이 됐으나 오래 지내지 못하고 돌아 갔던 일도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준수하게 생기신 그분의 인터뷰에 상당히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있다.
 늦은 나이에 처자식을 일본에 두고 와, 이곳 사찰의 규율에 맞춰 행자 생활하는 것이 어찌 쉬웠을 것인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일엽 스님과, 나 혜석의 우정이며......수덕사는 사연 많은 절이 맞긴 맞는가 싶다.
불꽃보다 더 붉은 가을길을 걸어 내려 오며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간 선구자들을 생각해 본다. 



< 수덕 여관>





일주문 아래에 돌다리 개울을 건너면 얌전한 집 하나, 수덕 여관이 보인다. 
오래 전 읽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 수덕 여관 주인 할머니에 얽힌 사연이 있었다는 기억 뿐으로 내용이 아득해서 이제 다시 찾아 읽었다.
1945년 이응로 화백이 이 여관을 매입하여 부인 박 귀희 여사가 운영하였고, 화가는 1958년 부인을 두고 파리로 떠나 화가로서 큰 뜻을 이루면서 끝내 남이 되고 말았다는 사연을 들려주었고, 남도 답사 때 언제나 이 여관에 묵으며 이 응로 화백에 대한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을 동시에 가지기도 했다는 그런 글들이었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책을 읽고 얼마나 재미 있고 참신했던지 책을 끼고 남편이랑 수덕사로, 개심사로,
서산 마애불로 답사 코스를 뒤쫓아 다녀 보던 시절이 먼 과거같지 않은데, 1993년도 출판본이라 깜짝 놀란다. 25년 전의 일들이니 내 기억이 흐릿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 여기며 조금 덜 슬퍼하기로 한다.


부인은 이 곳을 지키며 일생을 살다 2001년에 돌아가셨다고 하고, 이 집은 현재 충남 기념물 103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일엽 스님, 나 혜석을 비롯한 많은 문인 예술가들과 깊은 인연으로 기념물이 되었나 싶다.






마당 가운데 초가 지붕을 인 게시판도 센스 있고 보기 좋은데, 한 켠에 번듯한 평상도 있다.
크게 마음 내어 한번 누워 보니 저 아름드리 소나무에 하늘 배경이라니! 생각할 수록 멋진 그림이다.
절집 발치에 있는 이런 여관에 객이되는 낭만을 잠시 느껴본 시간이다.
나즈막한 굴뚝과 손바닥만한 꽃밭도 귀엽다. 해사한 들국화가 가을볕에 애잔해 만져 주고 나온다.







<수덕 여관 옆, 선 미술관>





수덕사는 입구에 번다한 장터같은 음식점이 거슬리지만 올라오며 미술관을 보면 기분이 싹 좋아진다.
나직한 미술관 건물도 멋 있고, 소소하게 설치된 조각 작품들도 보기 좋아 수덕사에 예술적 향기를 더하는 것같아 좋다.



 최초의 불교 미술관으로, 2010년 에 개관 하였다고 한다. 이 응로 화가의 전시실도 있고, 불교 미술을 전시하기도 한단다.


지금도 '자작나무 아티스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그저 휘이이 한바퀴 하고 나왔다. 아랫동네에서 친구들이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까봐.....

 이 곳은 뜰에 산재한 조각들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해 조각 공원이라 부르고 싶다.






오줌싸개 조각은 일주문 가는 길 옆, 눈에 잘 띄는 곳에 서 있다. 귀엽기도 하고 조금 언짢기도 하다. 오줌싸개 어린 애에게 키를 씌워 동네에 내 보내면 요즘 세상에는 아동학대라 할 것이다. 사실 아이에게는 수치요, 인격 모독인 일인데, 예술적 안목이 없는 나와 작가가 시선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사진을 작년 여름에도 찍어서 비교해 봤더니 이 가을 사진이 단연 예쁘다.
생동하는 초록색을 지고있는 단풍 붉은빛이 이기고 있는 모양새다.  



< 해미 읍성 >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은 조선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사적 제 116호로 지정된 성이다.
산성이 아니고 평지에 지어진 성으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지정된 것이라 한다.

오가는 길에 무심히 성벽을 바라 본 적은 있으나 들어 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읍성은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 참석차 방문하여 더 알려진 게 아닌가 싶다. 수덕사에서 자동차로 30분 이내라 발길이 좋아 우리는 성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원래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진 성으로 총 길이는 1,800m 성벽 높이는 5m라고 하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문이 나있는 구조다. 정남향에 있는 이곳은 진남문으로 되어 있다.




잠양루(岑陽樓)라는 누각을 바라 보며 길을 건너니 죽 뻗은 성벽이 단정하다.





잠양루는 성의 동문으로, 성벽 옆 돌계단을 오르니 누각이 크지도 않고 참하게 자리잡았다. 성벽이 운동 경기장처럼 둥그렇게 마을을 에워 싼 것이 한 눈에 들어 온다. 타원형으로 둥글게 축성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저 멀리 단풍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가해 보여 사진을 찍겠다고 한 걸음 앞을 내딛으니 길 건너 경비 아저씨가 호각을 불어댄다. 위험하다는 의미일까? 





 동문을 통해 들어 가면 조선 시대의 민가를 재현해 놓은 것이 미니 민속촌같은 분위기가 난다. 조선 시대의 부농이나 상인의 집을 재현했다고 한다.

동구 밖 이 길이 이리도 다정해 보인다.






호서좌영(湖西左營) 이라는 문이 보인다.
새로이 복원한 것이라 오랜 느낌은 없으나 그래도 조그만 읍성에서 그 위세는 당당해 보인다.

1970년대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성내 건물은 모두 이전 철거하고 동헌이나 기타 건물 몇 동을 신축했다는 설명이 있다. 건물 몇 동을 빼면 읍성 안은 운동장처럼 비어 있다.





 호서좌영 문을 들어 서니 동헌이 있고, 동헌마루에는 마네킹 군졸들이 보인다. 


 다산 정 약용이 천주교 교인이라는 죄목으로 해미읍성에 유배된 적이 있고, 천주교 박해로 이곳에서 1,800여명이 처형당했다고 하니 천주교 성지로 여기는가 싶다.





축제 기간이 아니라서인지 마을을 관통하는 큰 길은 한적한데 한켠에 오두마한 천막에 주막들이 있어 음식을 팔기도 한다. 우리는 다른 곳에 점심 예약이 되어 있어 생수만 한잔 씩 마시고 나오느라 먹어보지 못했다.


 



청허정

동헌을 나와 옆으로 가파르게 난 계단을 오르니 소나무 숲에 정자가 나타난다. 가파른 계단에 숨이 차 포기하려다 가까스로 올라가니 청허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청허란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밝고 깨끗하다"는 뜻이고, 청허정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성종 22년(1491)에 세운 정자로, 현재 이 정자는 관련 기록을 근거로 2011년에 개축하였다는 안내판이 옆에 있다. 송림이 제법 울울하고 높은 지대라 주민들의 쉼터로 좋은 공간이 되어줄 것같다. 

 



느리게, 그러나 아주 느리지는 않게, 바삐 그러나 아주 바쁘지는 않게
우리 발걸음에 맞게 1박 2일, 콧바람을 쐰 것같다.
'이렇게 다닐 날도 얼마 아니야', '늙으면 죽어야지' 라는 말을 두고 쓰면서 올 가을에도 잘 다녀 왔다.
친구들 가득 태우고 운전해 주고, 친구들 먹이겠다고 무겁게 장 봐 오고, 고기 구어 주겠다고 거추장스런 바베큐 기구까지 싣고 다니는 친구 여럿 모이니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말로는 이런 미련한 일 하지 말라면서 늘 기대하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나쁜 마음이 습관되려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추억의 장소가 늘어난다는 것도 된다. 나쁘지 않다.
이 가을에도 그리움 하나를 또 그려냈다. 


일상이 무료하여 여행을 꿈 꾸고, 여행을 더 사랑하는 이유는 돌아 올 집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2018년 11월 2일 ~ 11월 3일 간의 여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