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8년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 가세요- 멋진 노년 이야기.

수행화 2018. 12. 14. 11:02

언제부터인가 신문은 답답한 뉴스 일색이라 읽는 일이 스트레스가 돼 버렸다, 오늘 아침도 심드렁하게 아침 신문을 넘기는데 사진 한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78세 ‘걸 크러쉬’ 할머니, 펠로시, 트럼프와 설전 후 인기 치솟아…..” 
빨간 코트에 선글라스 낀 근사한 여인 사진에 따른 기사 제목이다.


미국의 여성 하원의장 펠로시가 여배우처럼 훤칠해서 놀라고, 더구나 입심 좋은 트럼프와 토론은 마치고 나오는 장면이라 하니 더욱 멋져 보였다. 당당한 태도로 토론을 압도하여 인기를 끌었다고 전하면서 아울러 오렌지색 막스마라 코트와 아르마니 선글라스에도 많은 관심이 쏠렸다고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어쨌거나 내 관심은 78세 나이에 이렇게 멋진 모습일 수도 있다는 데 있었고,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자태에 매료되어 사진을 오려 두고 각성제로 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남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며 보람된 노년을 사는 사람들은 정말 보기가 좋다. 


지난 여름에 읽은 책,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를 다시 들춰 보게 됐다. 
67세의 나이에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주한 엠마 게이트우드 (Emma Gatewood) 할머니의 실화를 언론인 벤 몽고메리 (Ben Montgomery)가 엮은 책이었다. 엠마가 남긴 일기나 편지에서, 또 그녀 가족들이나 트레일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하여 그녀의 여정과 인생을 반추해 보는 글이었다. 다만 의지가 중요할 뿐 나이는 아무런 장애 요인이 안된다는 당당한 기록이라 해야겠다.


엠마는 1887년 오하이오 주 머시빌 출생으로 1907년 결혼하였고, 1955년 5월 2일. 그녀 나이 67세에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나섰다. 돈 달랑 200달러 들고 옷가지나 먹을 것 약간 넣은 자루 하나를 메고, 운동화에 셔츠 차림으로 가볍게 집을 나섰다. 운동화 여섯 켤레를 떨구어 내는 거의 5개월의 시간, 146일 여정의 시작이었다. 13개 주를 통과해 가며 3300km 길을 걸어 목적지인 캐터딘 산 정상에 올랐다고 한다. 그때까지 애팔레치아를 종주한 사람은 남자 여섯명 뿐, 여자는 물론 없어, 최초의 여성종주자가 된 순간이었다.  

 160cm의 키에, 68kg의 몸무게인 시골 할머니의 애팔레치아 트레일 종주 성공은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나 정작 그녀는 대단한 도전 의식이나 공명심이 있었는 게 아니고  "다만 한번 해보고 싶었다" "말로 듣던 것보다 힘이 들었다" 고 담백하게 소감을 말한다.


11명의 자녀와 23명의 손자를 둔 그녀의 인생은 고통과 인내의 삶이었다. 남편은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으나 가정에서는 엄청난 폭군이었고, 심한 학대를 일삼았다. 그런 환경에서도 11명의 아이를 키워내고, 농장을 운영하는 억척 주부로 묵묵히 살았다. 이 고통과 수난의 세월에 늘 책을 읽었고, 시간만 나면 숲을 찾아 혼자 걸었다고 한다. 숲이 좋았고, 숲이 주는 침묵이 좋았다고 하니 그녀에게 숲은 위안이며 영감의 원천이었는지 모른다. 54세에 마침내 이혼이 성립되어 자유를 얻게 되었고, 담대한 도전을 꿈꿀 수도 있었던 것같다. 고통에 무너지지 않고 오로지 두 발로 걷고 걸으며 숲의 고요에 자신의 고통을 내 맡기며 살아 낸 세월의 내공이 어떤 고난도 담대하게 받아 내는 강인한 할머니로 거듭나게 했나 싶다. 


쉼터도 열악하고, 표지판도 정비가 안된 시절, 침낭도 특수 장비도 없이 담요 하나에 의지해서 한뎃잠을 잤고,  야생 동물의 습격을 두려워 하기도 했고, 허리케인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서도 15km를 걷기도 했다. 적어도 하루에 20km 정도를 걸어 내면서 목표를 이룬 것이다. 안경이 부서지는가 하면 갈빗뼈가 으스러져 너덜거리기도 하는 등 숲이 쉽게 길을 터 준 것은 아니었다.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힘든 상황을 60년도 더 전에 이겨낸 할머니의 투지는 가히 초인적이었다. 


"뉴 햄프셔 주의 고럼, 1100m.
밤 하늘은 청명했고, 달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키가 별로 크지 않은 소나무와 이끼로 만든 잠자리 위로 달빛이 떨어졌다.....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희망이 그녀와 함께 했지만 엠마 자신이 원하는 것은 평화와 고요함, 그리고 자신을 위해 혼자 내딛는 발걸음이었다......별 빛이 어느새 자신을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가 중요한 존재로도 만들어 주는 그런 곳이었다."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라'는 말을 누군들 하지 않았겠는가? 트레일에서 만난 구조대원이 할머니의 도전을 걱정하며 해 준 말을 번역자가 독특하게 인용한 것같다. 첫 완주 이후에는 구간별로 나누어 종주했고, 세번의 종주를 마쳤을 때 그는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1957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트레일을 두번이나 완주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1973년 사망할 때까지 자연에서 평화를 찾는 일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원제가 'Grandma Gatewood's walk' 인데, 'The inspiration Story of Woman Who Saved the Appalachian Trail'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고 한다.  

삶의 무게가 그렇게 막중해도,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꿈 하나를 캐내는 지혜가 그렇고, 꿈을 구체화해서 실현하는 결단과 용기가 범상해 보이지 않아 아주 교훈적이다. 시도해 보지도 않은 채 안되는 핑게를 99가지는 꼽을 수 있는 우리에게 실로 많은 걸 말해 준다. "삶이 힘들면 숲으로 가라!", "침묵하는 숲에서 배움을 구하라" 는 울림으로 들리기도 한다. 


# 어제는 눈다운 눈이 내려 모임 약속도 취소하고, 창가에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앉아  뜨개질 좀 하고, 바깥 조금 내다 봐가며 무료하게 하루를 보냈다. 내 하루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라 사진 한장에 생각은 무성하게 가지치기를 하다가, 용맹한 할머니의 활약상까지 되짚어 봤더니 마음에 턱하니 먹장 구름 한 자락이 깔려 버린다. 


올해 김장을 조금 아담하게 해 넣으면서도 해 본 생각인데, 요 몇년 사이 알게 모르게 나의 가사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작년 봄에 담근 간장이 내 생애 마지막 간장이 될지도 모르겠고, 올해 김장도 이리 노략질처럼 하게 되었으니 산술적으로 내게 잉여 시간이 불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잉여 시간을 영리하게 굴려 볼 생각같은 걸 아직 해 보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니 부아 비슷한 감정으로 답답해져 버린 것이 구름 더미의 본질이다.


스러져버린 내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쓰라림이 일사분란하게 나를 공격하던 시절도 한 때인지, 이제 지쳐 나가 떨어진 모양인지 요즘 내가 자주 쓰게 되는 말은 "이제와서 뭘...." 인 것 같았다. 나 자신을 타박하는 피로감에서 그럭저럭 벗어나 평정심을 찾았나 했더니, 날씨 탓인지 불편한 심사가 되짚어 찾아 온 날이다. 

별 영양가는 없는 글이라도 쓰면서 마음을 또 고쳐 가지려 한다. 두려움에 갇힌 우리같은 사람이 있어서, 노년의 삶을 빛나고 영광스럽게 사는 그들이 더욱 돋보일테고, 세상은 균형을 잡아간다고 맘 편히 여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