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8년

2018년은 과거 속으로

수행화 2018. 12. 31. 23:22

또 한 해가 2018년이라는 한 묶음의 시간 다발이 되어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제야의 타종 현장 중계도 그저 이벤트 하나 보는듯 담담하기만 하다. 무미건조한 공기가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같은 따분한 기분을 달래고 추스려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낙관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곧 하게된다. 모르면 몰라도 해가 바뀌어 가는 걸 지켜보는 이 시간만큼은 누구나 경건해지고 소망을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크고 작은 기대를 마음에 담아 보기 때문이다. 그런 진정성으로 365개의 하루를 공평하게 받아든다. 그렇게 새해를 희망적으로 시작한다.


일년 전 오늘 가졌던 나와의 소박한 약속을 점검해 보려고 올해의 내 일상을 혼자 반추해본다. 달랑 몇 조각의 그림으로 설명이 충분하리만치 단순한 것이 보인다. 1월의 첫째 월요일과 12월 마지막의 월요일 풍경이 똑같고, 그렇게  화요일, 수요일.........일요일의 패턴이 거의 판박이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판박이 일상 사이로 뾰족 나온 날들이란 내 두번의 해외 여행이고, 맏손녀가 핀란드에 교환학생으로 간 일이다. 


두번의 여행이 친구들과 떠난 것이니 남편과 유럽 여행을 가고자 했던 나의 소망은 올해도 이루질 못하고 말았다. 소망을 이루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나의 위시리스트 목록에서 아주 삭제할 마음도 아직은 없어 한해 한 해 밀려 나가고 있다. 불가능에 가까이 가는 느낌이지만 내년에도 또 오랜 위시리스트 자리를 맡길 것이다. 


우리 손녀가 산 설고 물 선 핀란드 교환 학생으로 떠나겠다고 해서 놀라고 아뜩한 마음이었더랬는데, 벌써 6개월이 지나 잘 적응하고 지내니 고맙기만 하다. 아이를 케어해 주는 핀란드 현지 가정에서 보내 온 크리스마스 선물, 쵸콜렛과 쿠키가 그렇게 각별해 보이는 것은 우리 아이가 따뜻하고 안전하게 보호 받고 지내누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은  손녀 인생에 독특한 방점 하나를 콕 찍어준 것일테고,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아이에게서 배워야했다. 모름지기 어려움에는 정면을 향해, 그 한 가운데를 가르고 나가는 길이 최단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가져 보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 그렇듯이 책 읽기가 또 내 약속의 구체적인 한 부분이었다. 올해 읽었던 책 메모를 펼쳐 보다가 놀란 충격이 잘 가시지 않는다. 건성으로나마 나름 읽었고, 제목까지 또박또박 적어 두었건만 독서 노트를 펴보니 책이 보낸 멧세지가 까마득하니 이거야 원 읽지 않은 것이나 뭐 다를 바 없는 지경이었다. 쫒기면서 한 줄 남긴 메모 아닌가 싶게 난해하게 갈겨 쓴 채 노트를 방치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다. 책 본다는 건 허울뿐, 도서관 윈도우 쇼핑족이 된 기분이라 좋지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놓은 채 살아가는 인생은 아름다운 풍경 속을 눈 감고 산책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과 매일의 생활을 망각하기 위해 독서를 해서는 안됩니다. 좀 더 의식적으로 , 좀 더 원숙하게 자신의 인생을 틀어 쥐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산문집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에서 마음에 새기고자 했던 이 글이 바로 지금 나를 향해 던지는 충언이 되고 있다. '매일의 생활을 망각하기 위해 독서를 한다!'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다. 헤르만 헷세는 인간의 내적 성숙을 인도하는 우리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라 해도 족할 것이라는 내 나름의 찬사를 바치며, 이 지적을 바람결에 물결에 쓸려보내지 말아 주기를 나에게 부탁해 본다. 


글을 쓰다보니 저절로 반성이 된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은 반성하는 자 너그러이 용서해야 할 세모의 날이아니겠는가 하며 나를 위로하려 든다. 지난 일년 늘어 난 것은 나이 뿐으로, 내 행동 반경이 줄어 들었고, 내 앎의 범위가 좁아져 간 위에 책 읽는 능률까지 떨어졌다 하여 잔뜩 위축된 나에게 보내는 위로가 너무 급조된 것이고 인위적이라 마음 깊이 다다르지는 않는다.  


케임브릿지 사전에서 올해, 2018년의 단어로  nomophobia를 선정했다고 한다.  

no mobile phone phobia 를 말하고, 휴대폰이 없거나 사용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두려움과 걱정을 뜻한다고 한다. 일종의 불안감을 대변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 가족이 모여도 스마트폰으로 각자 자기 관심사만 들여다 보고 있으니, TV만 보던 지난 날들이 오히려 그리워지려 한다. 나란히 같은 화면을 바라 보며 실 없는 말이라도 오고 갔으니 말이다. 나의 경우 평소에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편이 아니라 생각하는데도 하루에 평균 2시간 전후의 시간을 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고 통계가 알려 주는 정도이니.....올해의 단어 선정이 이해가 된다. 자
발적 고립으로 만들어 낸 여유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이렇게 누수되는 부분이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현대인은 카페인 중독에 시달린다는 비유적 표현도 더불어 생각난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 의 중독 상태가 심각하다는 표현이었다. 카.페.인의 순기능은 오간데 없고, 너나 없이 보여주기 경쟁과 따라잡기 열망에 내몰리고 있는 형국이니 걱정스럽다. 타인을 좀 더 배려하는 마음가짐, 카페인에 함부로 휘들리지 않을 굳은 심지가 길러져야 할텐데.............모두들 집 나간 자존감을 불러 들여야 할 것같다.


대개의 현대인은 민망함이라는 말을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전에는 거울도 삼면경으로 자기 모습 비춰보기도 민망하다는듯, 살짝 바라보고 늘 닫아 두곤 했었는데, 지금은 각자 몇개의 거울을 가지고 나를 비추고 남을 비춰대며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관심 끌기에만 몰입하니 중독증은 물론이요,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증까지 부르지 않나한다. 우리는 뻔뻔한 것에도 단단히 중독이 됐나보다. 


# 지난 해 나와 한 약속을 만족스럽게 지키지는 못했으나 그럭저럭 애를 쓴 흔적은 있어 아주 맹탕은 아닌 것같다고 자평을 하니 절반은 성공이라며 후한 점수를 준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아직 찾지 못해 또 구태에 의존한 새해 약속을 써 보려 한다. 반성을 토대로 무리 없는 소소한 약속지를 써야하지 싶다. 성공을 위한 출정의식도 아니고  갑자기 내 시간이 눈부셔질 일도 없지만 새해를 맞는 지극히 작은 기대는 가져보려 한다. 


내 인생이 특별하여 멋진 제목이 곁들여질 이유는 전혀 없다. 물론 매년 그렇듯이 약속지를 써서 간직하고, 문득 문득 생각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알을 품어줘야 부화하는 것이지 바라만 보고 있다고 부화되는 건 아니라는 걸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일만 시간을 투자하여 결과를 얻어내는 사람들, 일만 시간을 투자하고도 결과가 나오지 않아 또 다른 방법의 일만 시간을 쓰며 도전하는 사람들이 진정 존경스럽다. 그들의 반복과 인내를 배워야 하리!! 반복의 힘을 나는 믿는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내년 말에는 떠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두번의 2019년은 없다.